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의 진실

by 역맥파인더

삼조선은 신·불 ·만 삼한의 분립을 말한 것이니 신한은 대왕(大王) 이요, 불·말 두 한은 부왕(副王)이다. 삼한이 삼경(三京)에 나뉘어 있어 조선을 통치하였음은 이미 제1 편에서 말하였거니와 삼조선은 곧 삼한이 분립한 뒤에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신한이 통치하는 곳은 신조선이라 하고 말한이 통치하는 곳은 말조선이라 하고 불한이 통치하는 곳은 불조선이라 하였다. 신·말·불 삼한은 이두문으로 진한(辰韓), 변한(弁韓)이라 기록된 것이고, 신·말 ·불 삼조선은 이두문으로 진(眞), 막(莫), 번(番) 삼조선이라 기록된 것이다. 똑같은 신·말·불의 음역(音譯)이 어찌하여 하나는 진·마·변이라 하고 또 하나는 진·막·번이라 하여 같지 아니한가? 이는 남북의 이두문의 용자(用字)가 달랐기 때문이거나 혹은 지나인의 한자 음역이 조선의 이두문의 용자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에는 고전(古典)이 거의 다 없어졌으므로 삼조선의 유래를 찾을 길이 없으나 지나사(支那史)에는 왕왕 보인다. - 신채호의 조선 상고사 중 제3편 삼조선(三朝鮮) 분립시대 제1장 삼조선의 총론 1. 삼조선 명칭의 유래 중에서

요동반도와 산동반도가 위아래로 합쳐져 있어 근역과 띠모양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고대 중국 황하 하류 이북 지역의 기원전 1286년의 모습

古朝鮮王儉朝鮮

古記云 昔有桓國謂帝釋也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국이 있었는데 제석(帝釋)을 일컫는 것이었다. 환인(桓因)의 서자(庶子)인 환웅(桓雄)이 천하(天下)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인간(人間)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雄率徒三千降於太伯山頂即太伯今妙香山. 神壇樹下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糓·主命·主病·主刑·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在世理化. 웅(雄)이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정상 즉 태백(太伯)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이다. 신단수(神壇樹;神檀樹)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라 하고 이에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하였다.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명(命)·병(病)·형(刑)·선악(善惡) 등 무릇 인간의 삼백육십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 神遺靈艾一炷‧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而不得人身. 熊女者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壇君王儉. 이때에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신(神) 환웅(雄)에게 기도하되 화(化)하여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이에 신 환웅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百日)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모습이 될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그것을 받아서 먹어, 기(忌)한 지 삼칠일(三七日)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금기하지 못해서 사람의 몸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熊女)는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매양 단수(壇樹;檀樹) 아래서 잉태하기를 빌었다. (환) 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녀와 혼인하였다. (웅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왕검(壇君王儉;檀君王儉)이라 하였다.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菟‧樂浪‧帶方北帶方. 通典 亦同此說. 당의 배구 전(裵矩傳)에 이르기를 “고려(高麗)는 본시 고죽국(孤竹國), 지금의 해주(海州)인데 주(周)가 기자(箕子)를 봉하고 조선이라 하였다. 한(漢)이 3군(郡)으로 나누었으니, 현토(玄菟)·낙랑(樂浪)·대방(帶方) 북대방(北帶方)이다.”라고 하였으며 통전(通典)에도 역시 이 설명과 같다.

漢書 則眞‧臨‧樂‧玄四郡, 今云三郡, 名又不同, 何耶? 한서(漢書)에는 곧 진(眞)·임(臨)·낙(樂)·현(玄)의 4군(四郡)인데, 여기서는 3군(三郡)이라 하며 또 이름도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 삼국유사 권제일 기이 제일(紀異第一) 고조선(古朝鮮) 왕검조선(王儉朝鮮)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國家) 이름이 환(桓)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환(桓)은 제석(帝釋)이라고도 일컬었다 남겼다. 그런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國家)는 그대로 인류사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무엇이 갖춰져 있어야 또는 어떻게 되어야 사람들 모인 곳이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기준은 다른 모든 명사들처럼 늘 문제여서 사람들은 이름을 지으면서 그 정의(定義)를 새겨 넣었다. 차(茶) 나무가 생장하는 지역에서 수확한 찻잎들을 건조하고 비에 젖지 않게 해주는 지붕 있는 집을 짓고 그 집안에 돼지를 기르며(家) 사는 사람들이 찾아낸 차(茶) 나무에 밧줄 매달린 주살(弋)을 소중한 차나무에 박히게 하는 게 아니라 나무 가지들에 걸리도록 발전, 고안된 창(戈)을 던져 찻잎을 수확해 살아갈 수 있도록 여러 요소들이 조직된 곳이 국가(國家)였다. 차(茶) 나무가 생장하는 지역은 까마귀 같은 새가 알을 낳기 위해 필요한 단백질을 만들기 위해 단단한 차(茶) 나무 열매를 찾아 껍질을 쪼아 깬 후 속을 먹은 후 질소가 가득한 하얀 배설물과 함께 그 씨앗들을 뿌려놓은 곳(日)이었다. 차(茶) 나무가 생장하는 지역(日)에서 과(戈)를 사용해 찻잎을 수확한 후 그 찻잎들을 모아 건조하고 지키는(囗) 것이 국(國)이었다.


우리 민족이 건국한 국가들은 그 국호(國號)가 대부분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國家)인 환국(桓國)은 국호가 환으로 외자(字)였다. 환(桓)의 사성음(四聲音)은 그러나 [huan]이다. 후[hu]와 안[an], 두 개의 발음으로 분리할 수 있는 환(桓)의 발음은 사실 후[hu]라고 발음되는 호(虎)와 안[an]으로 발음되는 안(鞍, 鞌, 犴, 豻), 두 글자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쉽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호(虎)와는 달리 안이라는 글자는 국가처럼 파자(破字)라는 방법을 통해 그 숨은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안[an]이라는 사성음(四聲音)을 가진 한자(漢字) 중 국호(國號)나 부족명으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자는 鞍, 鞌, 犴, 豻 네 글자 정도인데 이 글자들은 가죽 혁(革) 자와 개사슴록변 개(犭) 자, 갖은 돼지시(豸) 자가 부수인 게 특징인 글자들이다. 안장이라는 뜻을 가진 鞍자와 동의어인 鞌자, 그리고 수확한 찻잎들을 널어 건조하는 시설로 개발된 방패 간(干) 자도 포함하고 있는 야생에서 살아가는 들개를 말하는 안(犴, 豻) 자는 모두 사성음으로 시옹[xiong]으로 발음되는 곰 웅(熊) 자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인류사 최초의 국가이며 우리 민족의 첫 국가인 환국(桓國)의 구성원이 환웅과 그가 인솔한 삼천명의 천강(天降)한 이주(移住) 세력과 같은 굴(窟)에서 함께 살았다(同穴而居)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동일한 지역에서 함께 살아온 곰 부족(部族)과 호랑이 부족(部族)으로 이뤄진 토착(土着) 세력이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중 토착세력인 웅족(熊族)의 웅(熊) 자는 몇 개의 동의어를 갖고 있는데 누를 황(黃) 자와 곰 능(能) 자가 합쳐진 윗 사진의 1번 곰 웅자와 개사슴 록(犭) 자와 곰 능(能) 자가 합쳐진 2번 곰 웅자, 그리고 돼지 시(豕) 자와 팔뚝 굉(厷) 자가 합쳐진 3번 곰 웅자가 그것들이다. 곰 웅(熊) 자의 고어(古語)와 동의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사항은 이들 글자에 나타난 돼지(豕, 豸)와 개(犭), 그리고 황(黃)이 모두 곰 부족 계열의 사람들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달의 산(루왜은조리 Rwenzori Mt.)에서 배달(背達)할 때 북쪽으로 떠나 지금의 이집트와 레반트 지역에 정착한 사람들은 복본(復本)을 약속하며 배달(背達)을 결정했던 궁희(穹姬)의 자손인 황궁씨(黃穹氏) 사람들로 각각 개와 돼지를 이용해 차(茶) 나무를 찾아내던 사람들이었다. 여기에서 곰 부족과 연관된 또 하나의 동물은 사슴이었다. 사슴은 주기적으로 탈피해야 하는 뱀처럼 주기적으로 탈각(脫角)을 해야 했기에 알을 낳기 위해 많은 단백질이 필요한 새들처럼 단백질 섭취에 혈안이 된 동물이었는데 이들 사슴을 이용해 차(茶) 나무를 찾아내던 사람들 또한 곰 부족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바이칼(Baikal) 호수 남서변에 있는 훕스굴 호수를 둘러싼 지역에 순록들을 유목하며 사는 차탄족(Tsaatan 族) 사람들은 이런 곰 부족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알게 해 준다. 바이칼 호수 남서쪽에 있는 훕스굴(khuvsgul) 호수 지역에 사는 차탄족(Tsaatan)이 순록(馴鹿)들을 유목하며 아직도 살고 있는 그곳 남동변에는 환웅이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등 삼천명의 사람들과 함께 이주해 온 신시(神市)인 불간(Bulgan)이 위치해 있다.



복본(復本)을 다짐하며 배달(背達)을 결행했던 황궁씨(黃穹氏)의 후손들이 한식(寒食)과 단오(端午) 사이에 찻잎을 차(茶)로 가공해 전 세계 사람들에게 공급하여 일 년 내내 먹게 하기 위해 개발한 첫 번째 방법은 찻잎들을 말리는 방법이었다. 찻잎들을 말리기 위해 개발한 기구가 간(干)이었고 이런 간(干)들에 찻잎들을 줄줄이 널어 말리던 모습에서 서늘하다, 시원하다란 뜻을 가진 상(爽) 자가 상형 되었다. 방패 간(干) 자에 방패라는 뜻 말고도 말리다, 건조하다란 뜻이 있는 연유였다. 이런 간(干)은 차(茶) 나무를 찾기 위한 탐색견으로 훈련시키던 들개들을 묶어 놓는 장치로도 사용되었기에 들개 안자로 쓰이기도 했다. 이렇게 간(干)을 만들어 찻잎을 말리는 모습을 상형한 상(爽) 자의 사성음은 상[shuang]인데 이 상이란 사성음은 자책육사(自責六事)로 유명한 탕왕(湯王)이 개국한 상(商) 나라의 상자와도 매우 유사한 발음이고 흉노에게 쫓겨 박트리아와 간다라 지방으로 들어가 쿠샨(KuShan) 제국을 세웠던 귀상(Guìshuāng 貴霜)족과 상미(Shuāngmǐ 雙靡)족에게도 공통으로 들어가는 발음이었다. 비와 햇빛을 차단하는 지붕 밑에 기둥들을 박고 그 기둥들을 들보들로 연결해 시렁 구실을 하는 그것들에 찻잎들을 널어 건조해 차(茶)를 만들던 곰 부족의 독특한 차(茶) 제조 방법은 그래서 시원하다, 서늘하다란 뜻의 상(爽) 자를 만들어냈고 후일 같은 공간 내에서도 찻잎의 건조 정도에 따라 구역을 나눈 것을 반영한 미(爾) 자가 상형 되었다. 또한 같은 공간에 더욱 많은 찻잎들을 널어 건조하기 위해 간(干)을 개량한 특별한 구조물이 궁(弓)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미족(彌族)으로 불리기도 했다. 광개토대왕이 396년 직접 수군을 이끌고 20일간 공격해 함락시켰다는 백제 북쪽 변경의 요충지(北鄙之襟要也)가 관미성(關彌城)인 연유였다. 미족(彌族)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관문(關門)이란 뜻이었다.



시원할 상(爽) 자의 부수로 쓰인 밝은 모양 리(㸚) 자는 리[li]라는 사성음을 가지고 있는 사귈 이와 매달을 려라는 다른 뜻과 발음을 함께 가진 글자인데 고구려의 려(麗) 자가 만들어진 시작이었다. 고구려의 려(麗) 자는 곱다, 아름답다는 뜻 외에도 붙잡아 매다, 떨어지지 않게 부착하다, 걸리다는 뜻을 가진 글자인데 이는 찻잎들을 기둥들 사이를 연결한 가로대(들보)에 정연하게 걸어 널어 건조하는 모습 때문에 가지게 된 뜻이었다. 천연 지붕을 가진 기슭(厂)에 찻잎들을 널어 걸어놓은 들보(干)들은 후일 인공적으로 건설된 기슭인 집(广) 안에 설치된 기둥과 기둥 사이에 건너 지른 들보들(鹿)로 바뀌었고 이들 들보에 정연하게 널어 말리는 찻잎들은 질서 정연하다 하여 리(麗) 자가 상형 된 거였다. 찻잎들을 말리고 건조하던 곳집, 산기슭을 뜻하는 록(鹿) 자가 사슴이라 뜻을 갖게 된 것은 사슴의 뿔들이 찻잎들을 널어 말리기 위해 설치한 기둥과 들보들이 서있는 모습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시옹[xiong]이라고 발음되는 곰 웅(熊) 자에서 파생된 다른 글자는 시[xi]로 발음되는 해(奚) 자인데 이 해(奚) 자는 닭을 근역(槿域)에 가져온 사람들이었다. 닭 계(鷄) 자는 해족(奚族)의 새(鳥)가 닭이라는 것을 밝혀주는 글자인데 해족(奚族)의 시원(始原)은 수탉을 국조(國鳥)로 삼는 지금의 프랑스가 대부분인 갈리아 지역의 켈트족이었다. 사라진 차(茶) 나무를 찾아 대륙의 동쪽으로 오게 된 사람들이었다. 시[xi]라는 발음은 시[si]로 또는 이[yi]로 변형되었는데 시[si]로 변형된 글자들에는 사사로울 사(厶) 자, 사로국 할 때의 사(斯) 자, 절 사(寺) 자들이 있고 이[yi]로 변형된 글자에는 새 을(乙) 자, 평탄할 이(夷) 자, 주살 이(弋) 자, 쑥 애(艾) 자 등이 있다. 시와 이처럼 변형된 발음 중에는 지가 있는데 이 지 발음은 [ji][zhi][qi][chi][shi]로 여러 발음기호로 다르게 표기되는 대동소이한 발음이었다. 숟가락 시(匙) 자, 성씨 씨(氏) 자, 돼지 체(彘) 자, 가를 지(支) 자 등이 이 변형 발음에 해당되는 글자였다. 그중 지(氏, 支) 자는 월지족(月支族)의 지(支) 자를 쓸 때 사용하는 글자였는데 이는 월지족의 지족(支族)이 곰 부족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壬辰四十九年 蓋斯原褥薩高登潛師 襲鬼方滅之 一羣養雲二國 遣使朝貢. 於是 高登手握重兵 經畧西北地 勢甚強盛 遣請爲右賢王 帝憚之不允 屢請乃許 號爲豆莫婁. 소태단군 재위 49년 임진(기원전 1289)년에 개사원(蓋斯原) 욕살(褥薩) 고등(高登)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공격하여 멸망시키자 일군(一群)과 양운(養雲)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때 고등이 대군을 장악하고 서북 지방을 경략하니 세력이 더욱 강성해졌다. 고등이 임금(소태단군)께 사람을 보내어 우현왕(右賢王)이 되기를 주청 하였다. 임금께서 꺼리시며 윤허하지 않다가 거듭 청하므로 윤허하고, 두막루(豆莫婁)라 불렀다.

乙未五十二年 右賢王高登薨 其孫索弗婁 襲爲右賢王. 재위 52년 을미(기원전 1286)년에 우현왕 고등이 죽고(薨),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우현왕을 계승하였다.

於是 右賢王 率左右及獵戶數千 遂卽位于夫餘新宮. 帝不得已 傳玉册國寶 廢徐于餘 爲庶人. 우현왕이 소식(서우여에게 양위)을 듣고 임금께 사람을 보내어 멈추기를 청하였으나, 임금께서 끝내 듣지 않자 우현왕이 좌우의 사람들과 사냥꾼 수천 명을 이끌고 부여 신궁(夫餘新宮)에서 단군(檀君)으로 즉위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부득이 옥책(玉冊)과 국보(國寶)를 우현왕에게 전하고, 서우여를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었다. - 환단고기의 단군세기(檀君世紀) 소태(蘇台) 단군 중에서



이런 곰 부족(熊族)의 조선(朝鮮) 지배는 그러나 기원전 1300년경 대륙 서쪽의 지중해 동부 지역에서 일어난 바다민족의 발흥으로 끝나게 되었다. 기원전 1800년경부터 시작된 기후 한랭화로 해상무역이 절정에 다다른 때에 그로 인해 해안 지역으로만 차(茶) 거래가 집중되는 바람에 발생한 차(茶) 부족으로 각종 질병에 시달렸던 흑해 북부 내륙 지방의 유목 민족들이 해상무역으로 번영을 누려왔던 동지중해상의 거의 모든 항구 도시국가들을 공격해 대대적인 파괴를 감행했다. 그들이 항구 도시들을 공격할 때 성곽 같은 방어 시설이 거의 없는 바다를 통해 배를 타고 공격해 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바다민족이었지 사실 그들은 바다와 항해에는 무지한 내륙 지역의 유목민족들이었다. 때문에 이들의 침략으로 레반트 지역에서 일어난 대규모 난민사태로 엄청난 숫자의 이주민이 단군조선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단군세기(檀君世紀)에 귀방(鬼方)이라 기록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호랑이 부족의 후손들이었고 그들은 절구(臼)를 이용해 차(茶)를 즙(汁)으로 만들어 먹는 사람들이었다. 차즙(茶汁)또는 차죽(茶粥 tea broth)이 만들어진 역사의 시작이었다. 이런 호랑이 부족의 대규모 유입으로 조선은 지금의 중국 청해성을 주된 강역으로 하는 개사원(蓋斯原) 욕살(褥薩) 색불루(索弗婁)가 소태(蘇台) 단군을 밀어내고 21대 단군으로 즉위하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스트레스로 인해 소변이 자주 마려워지는 오줌소태란 말이 생겨난 고사였다. 호족(虎族)의 후예인 색불루는 단군이 되자 군권(軍權)이 분리독립된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를 군권이 단군에게 집중된 삼조선관경제(三朝鮮管境制)로 변경했다. 차(茶)를 제조해 내는 근역(槿域)과 진한(辰韓), 번한(番韓)으로의 차(茶) 수송을 맡아 관리하는 마한(馬韓)과 차(茶)의 카라반 무역을 담당하던 번한(番韓) 그리고 이 두 한(韓)을 조정, 중재하는 진한(辰韓)으로 구분된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는 사실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이 항상 과도한 경쟁으로 문제가 야기되던 마한과 번한의 교차지역, 즉 지금의 산동성 서부와 하북성 북부지역인 대방(帶方)의 서쪽 지역에서의 분쟁(紛爭)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제도였다. 지금의 산동성 북서부와 하북성 북부 지역은 대방(帶方)을 통해 들어온 근역(槿域)의 차(茶)들이 진한(辰韓)의 초원로와 천산북로(天山北路), 그리고 월지(月氏)의 천산남로(天山南路)로 나뉘는 분기점이었다. 서로 더 많은 근역(槿域)의 차(茶)를 확보하기 위한 이 지역에서의 두 부족 간 치열한 경쟁은 자주 분쟁으로 이어졌고 대립으로 결말났었다. 환국(桓國) 때부터 이 지역의 차(茶) 무역을 관리해 온 것은 황궁씨로부터 천부인(天符印)을 인수한 유인씨(有因氏)였는데 그들은 웅족(熊族)이었다. 월지(月氏) 같은 호족(虎族)들의 차(茶) 무역 참여가 본격화되면서 웅족(熊族)의 과도한 차(茶) 무역 독점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제도가 호족(虎族)과 웅족(熊族)의 영역 경계를 명확히 하는 관경제(管境制)였다.


왼쪽 지도 하단에 있는 원은 대방을 통해 마한이 보낸 근역의 차를 두고 웅족과 호족이 더많이 가져가려고 분쟁하는 지역이었다. 원래 웅족인 유인씨가 지배하던 지역이었다.


단군조선이 고조선(古朝鮮)으로 불린 데에는 웅족(熊族)이 다스리던 조선이 호족(虎族)이 다스리는 조선이 되었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고(古) 자는 사성음으로 구 [gu][ku]라고 발음되는데 이는 호랑이(虎)를 가리키는 후[hu]의 변형음이었다. 고(古) 자의 갑골문을 보면 절구에 찻잎들을 넣고 절굿공이로 찧어 그 즙을 그릇에 담아내는 모습이 상형 되어 있는데 이는 호족(虎族) 고유의 차(茶) 제조법이었다. 차즙(茶汁) 또는 차죽(茶粥)을 만들어 먹는 법이었다. 우리 민족이 국 없이 밥을 못 먹는 전통이 있는 연유였고 국밥이 그토록 성했던 이유였고 설날에 떡국을 먹는 전통이 생긴 연원이다. 단군조선(朝鮮)의 선(鮮) 자는 사성음으로 시앤[xian]으로 발음되어 시옹[xiong]으로 발음되는 곰 부족(熊族)과의 친연성(親緣性)을 강하게 나타내는 글자인데 물고기와 양(ram), 두 글자가 합쳐진 선(鮮) 자는 이들을 관장하는 수메르의 신(神)인 엔키(Enki)를 뜻하는 글자였다. 이것은 곰 부족(熊族)이 수메르인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웅족과 호족의 이런 연합은 예맥족(穢貊族)이란 우리 민족을 가리키는 고유한 이름을 갖게 했는데 이때 예(穢)는 호족(虎族)을 맥(貊)은 웅족(熊族)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예(穢) 자는 벼 화(禾) 자와 해 세(歲) 자가 합쳐진 글자인데 핵심은 해 세(歲) 자에 있는 살 바른 뼈 알(歹) 자에 있었다. 부여의 개창자 동명왕과 고구려의 개창자 추모왕, 사로의 박혁거세와 가야의 김수로왕의 탄생신화인 란생신화(卵生神話)는 호랑이 부족의 상징이었는데 그 이유는 사슴 때문이었다. 주기적으로 탈각(脫角) 해야 하는 사슴은 그래서 알을 낳는 새들처럼 많은 단백질을 섭취해야만 했고 질소가 포함된 새들의 배설물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를 좇아 이동해 새의 배설물에 들어있는 질소를 자양분 삼아 생장하는 차(茶) 나무 잎을 먹어야 했다. 즉 사슴들의 서식지를 찾아내면 그 숲에는 반드시 차(茶) 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뜻이었다. 호랑이는 말사슴(Red deer)이나 말코손바닥사슴(Moose 또는 Elk) 같은 대형 사슴이 사는 곳에서만 존재하는데 이러한 차(茶) 나무와 대형사슴 그리고 호랑이의 먹이사슬 관계가 호족(虎族)을 예족(穢族)으로 부르게 한 연유가 되었다. 개를 의미하는 개사슴록변 견(犭) 자나 돼지를 의미하는 갖은 돼지시(豸) 자를 부수로 갖는 맥(貊) 자를 쓰는 맥족(貊族)은 개와 돼지를 차(茶) 나무 탐색용으로 사용한 웅족(熊族) 사람들이었다.


빗살무늬토기 밑바닥에 구멍들이 나있는 이유는 시루로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찜기는 압날문(押捺文)토기였다. 출처 여행을 즐겨락. 빗살무늬토기분포도 출처 KBS


소도(蘇塗)라 불렸던 삼한 지역은 이들 맥족(貊族)이 지배하는 땅이었고 마한(馬韓) 또한 마(馬) 자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시루를 이용해 찻잎을 찌고 비와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곳에서 건조해 차(茶)를 제조하는 방법을 채택한 웅족(熊族)의 강역이었다. 시루의 최초 형태는 빗살무늬토기였고 시루 밑의 찜기는 빗살무늬토기와 함께 제작 사용되었던 이른 민무늬토기였다. 건조한 찻잎들이 쪼그라들어 돌돌 말려 바늘모양으로 변한 것을 상형한 무늬를 빗으로 압인해 무늬를 만든 것으로 오해해 붙인 이름이 빗살무늬토기였다. 이런 빗살무늬토기의 전파 경로를 나타낸 지도는 수메르와 웅족의 이동경로와 다름 아니었다. 웅족과 달리 뒤늦게 대륙 서쪽에서 출발해 지금의 중국 청해성 지역을 발판으로 하북성까지 진출한 호족(虎族)의 후예 예족(穢族)은 그곳의 터줏대감인 웅족의 후예, 맥족(貊族)과 어려운 혼거(混居) 생활을 해야만 했고 맥족이 애지중지한 지금의 중국 동해안 연안으로는 영역을 넓힐 수 없었다. 예족(穢族)이 몰려 살았던 지역을 흐르는 강이라 해서 예하(濊河)라 불린 강이 지금의 북경에 있었다는 건 예족(濊族)의 강역이 대방(帶方)과는 멀리 떨어진 북쪽지역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 요(遼)의 사성음 발음은 리아오([liao]인데 이 글자의 진짜 뜻은 멀다가 아니라 웅족과 호족이 즉 맥족(貊族)과 예족(穢族)이 혼거 하는 지역을 뜻하는 것이었다. 리[li]는 시루와 간(干)을 이용해 차(茶)를 만드는 웅족 즉 맥족을 뜻하는 것이었고 아오[ao]는 절구로 찻잎을 찧어 즙을 내어 죽(粥) 같은 차(茶)를 만드는 호족(虎族) 즉 예족을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의 중국 동해안 지역은 차나무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라던 부상국이라 불리던 근역과 제잠(鯷岑)의 유일한 인근 지역이었다. 따라서 대방과 주산군도를 포함한 중국 동해 연안지역은 황궁씨로부터 천부인을 넘겨받은 유인 씨 부족이 처음부터 장악했던 곳이었고 그 후로도 그들의 후손들만이 터 잡을 수 있는 지역이었다.


기원전 1285년 쿠데타로 21대 단군으로 즉위한 색불루때 확립한 호족(虎族)의 조선 지배는 그러나 기원전 997년에 즉위한 27대 두밀단군(豆密檀君) 때 바이칼 호수가 범람하고 아란산이 붕괴하는 등의 강력한 자연재해로 인해 와해되고 기원전 971년 웅족(熊族)인 해모(奚牟) 단군에게로 지배권이 다시 이양되었다. 호족은 호[hu] 발음처럼 부여[buyu] 같이 주로 우[u]로 발음되는 이름을 사용했고 웅족은 웅[xi] ong 발음처럼 고리[koli] 같이 주로 이[i]로 발음되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렇듯 서로 조선의 단군 자리를 주고받으며 한나라로 굳건히 살아가던 두 민족이 돌이킬 수 없는 갈등으로 빠져든 건 대방(帶方)이 사라져 버린 지각변동 때문이었다. 기원전 425년 요동반도와 산동반도가 위아래로 붙어있어 띠처럼 보인다 하여 대방(帶方)이라 불리던 땅이 지금의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로 떨어져 분리되는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대방(帶方)을 통해 근역(槿域)의 차(茶)를 마한을 통해 손쉽게 전달받아 이를 초원로와 천산북로로 수송해 주면서 살아가던 요(遼) 지역 사람들의 생활터전이 붕괴되어 버렸다. 지금은 그저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요하(遼河)에 쓰는 단어에 불과한 처지로 전락했지만 요(遼)란 글자는 웅족과 호족이 즉 맥족과 예족이 함께 살아가던 지역을 뜻하던 글자였다. 대방(帶方)과 주산군도(舟山群島)를 통해 들어오는 근역과 마한의 차(茶)를 다시 시루에 찌고 간(干)이라는 특수시설에 건조(乾燥)해 수출하던 리[li]와 절구질과 졸이는 작업을 통해 즙 또는 죽(粥)을 만들어 수출하던 아오[ao]가 함께 살아간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요(遼)였다. 이런 요(遼)에 요동반도가 떨어져 나가는 지각변동으로 근역(槿域)의 차(茶)가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발해(渤海)가 지금처럼 큰 바다가 되어버린 게 그때였다. 땅이었던 곳이 바다가 되자 물이 솟아오른 바다라 해서 이름도 발해(渤海)가 된 바다였다. 기원전 425년 요동반도가 떨어져 나가기 전 황하는 지금의 황하처럼 래주만으로 흘러가지 않고 홍택호를 향해 흘렀다. 맥족과 예족이 혼거 하던 지역이었기에 불렸던 요(遼 Liao)라는 지역 이름은 지금 연성 시(聊城 Liaocheng)라는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정처없이 유랑하는 호족(예족)이 차지해 명명된 낙랑은 그래서 영원히 정착하란 뜻을 가진 지금의 영정하(永定河 Yongding) 이북지역과 연산이남지역이었다.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가 생기게 된 것도 대방(帶方)을 통해 지금의 산동성과 하북성 지역으로 들어온 근역(槿域)의 차(茶)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한 과열된 경쟁이 자칫 대결로 악화되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한 제도였는데 대방 자체가 지각변동으로 사라져 버려 근역(槿域)의 차(茶)를 확보할 방법이 일순간 사라지자 이 지역(遼)의 웅족과 호족은 큰 경제적 위기에 봉착했다. 대방의 주도권을 웅족이 가졌기에 낙랑(樂浪)이라는 근역차(槿域茶)를 중개하는 또 다른 지역의 주도권을 가졌던 호족은 그나마 웅족보다 나은 상태였다. 낙랑(樂浪)이라는 이름은 호족(虎族)이 정처 없이 떠도는 유랑(流浪)을 계속하는 모습에서 나온 이름이었다. 기원전 1285년 바다민족의 대대적인 침입으로 발생한 전대미문의 혼란에 호랑이 부족 후예 색불루(索弗婁) 단군이 삼한(三韓) 체제를 삼조선(三朝鮮) 체제로 변경하여 군권(軍權)을 한 손에 틀어 쥠으로써 그 위기를 돌파한 것처럼 역시 호랑이 부족 후예인 구물(丘勿) 단군 또한 요동반도가 산동반도에서 떨어져 나가 막조선(莫朝鮮: 馬韓)과 불조선(不朝鮮: 番韓)을 연결해 줬던 차(茶) 무역로가 단절된 결과로 초래된 경제 위기로 발생한 기원전 425년의 위기를 삼한(三韓) 체제로 변경하며 수습했다. 병권(兵權)이 진조선(辰朝鮮)의 단군에 집중되는 것이 삼조선 체제였고 병권이 진한(辰韓)만이 아니라 마한과 번한에도 각각 독립적으로 주어진 것이 삼한 체제였다. 그러나 엄청난 자연재해로 야기된 전대미문의 총체적 위기 속에서 구물단군이 단행한 삼한체제로의 체제변경은 대방이 사라져 경제 공황을 맞이한 맥족(貊族)에게는 알아서 살 길을 찾으라는 냉혹한 외면에 다름없었다. 맥족(貊族)의 어려움을 외면한 예족(穢族)은 그러나 곧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이치를 몸서리치게 경험하게 되었다. 예(穢)와 맥(貊)의 불화와 분리를 틈타 그동안 요(遼) 지역으로의 진출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태행산맥 서남부에 도사리고 있던 진(晉) 나라에 의해 예족이 축출되는 역사가 벌어진 것이었다. 기원전 414년 도마관(倒馬關)과 자형관(紫荆關), 거용관(居庸關)을 차지하고 요(遼) 지역에서 초원로로 보내지는 모든 차(茶) 무역을 독점하던 예족이 건설한 중산국(中山國)이 연(燕) 나라와 조(趙) 나라에 의한 계속적인 침공으로 기원전 296년에 끝내 멸망한 것이 그것이었다. 곰 부족이 찻잎들을 시루로 찌고 기둥과 들보들 위에 가지런히 정렬해 건조하는 차(茶) 제조법을 썼기에 마(馬)라는 글자를 썼고 호랑이 부족을 가리키는 후[hu] 란 발음이 변형되어 부 [bu] 구 [gu] 루[lu] 주[ju] 란 발음으로도 사용되어 호족의 지역은 불조선(不朝鮮: 番韓)이 되었다. 한(韓)이라는 글자가 곰부족을 대표하는 글자였기에 이에 대한 호랑이 부족을 대표하는 글자로 만들어진 것이 조(朝) 자였다. 고조선(古朝鮮)은 글자 그대로 호랑이 부족과 곰 부족의 연합국가를 말하는 거였다.


예족(穢族) 군장(君長) 남려(南閭)가 28만 명을 이끌고 한무제(漢武帝)에게 투항할 수밖에 없었던 연유는 바로 기원전 425년에 발생한 요동(遼東) 반도와 산동(山東) 반도의 분리사건 때문에 발생한 엄청난 경제 혼란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경제 혼란에서 가장 처절한 희생을 당한 건 대방 지역에서 건너오는 마한의 차(茶)들을 무역하며 살아가던 비타하(啤沱河)라고도 불리는 지금의 호타하(滹沱河) 남북지역에 퍼져 살던 사람들이었다. 패수(浿水)의 위치를 놓고 많은 갑론을박이 있었던 것과 같이 요동 지역을 놓고도 많은 논란이 있는데 요동 지역을 찾으려면 기준이 되는 요(遼)를 가장 먼저 찾아야 한다. 요(遼)는 사성음으로 리아오[liao]라고 발음하는데 이는 곰 부족을 의미하는 리(麗 [li]와 호랑이 부족을 의미하는 아오(熬 [ao]가 합쳐진 말인데 이는 두 부족이 함께 사는 지역이란 말이다. 즉 지금의 창주시(滄州) 북변을 흐르는 북패수(浿水 Beipaihe)의 서쪽과 연결된 호타하(滹沱河 Hutuo) 유역을 말하는 것이었다. 호타하는 후투오[hutuo]라고 발음되는데 이중 타(沱)자는 지[chi]라고도 발음되는데 이는 맥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따라서 호타하는 호족인 예족을 가리키는 후[hu]와 웅족인 맥족을 가리키는 지[chi]가 함께 한 강이었다. 예하라는 강이름이 그 강이 흐르는 북경이 예족의 땅이었음을 상기시키듯 호타하는 그 땅이 예족과 맥족이 함께 어우러져 살았던 곳임을 알게 해주는 지명이다. 따라서 리아오[liao]라고 발음되는 요라는 지명도 곰 부족을 의미하는 리[li]와 호랑이 부족을 뜻하는 아로가 합성된 지명이었다. 아오 [ao]는 오(熬) 자인데 오(熬)는 볶다는 뜻 말고 오랫동안 끓여 풀 같은 상태 또는 진한 액체로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고 중국어 사전에 설명되어 있다. 즉 오(熬 ao)는 주스 또는 즙, 죽(broth)을 말하는 거였다. 동지에 팥죽을 쑤어 먹고 설날에 떡국을 끓여 먹는 우리 민족의 전통은 호랑이 부족이 절구를 개발해 적용한 새로운 차(茶) 제조법에 기인한 것이었다. 요(遼)는 곰부족이 마한으로부터 건너온 찻잎들을 시루에 찐 후 매달아 말리고 건조해 차(茶)를 만들고 호랑이 부족이 마한의 찻잎들을 절구에 찧은 후 그 즙으로 차죽(tea broth)을 만들던 지역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곳은 원래 이름이 위택관(葦澤澤)이었던 낭자관(娘子關)이 있는 석가장(石家莊)과 자형관(紫荆關)과 도마관(倒馬關)이 있는 이현(易縣)과 보정 지역을 아울러 부르던 지역명이었다. 이런 요(遼) 지역을 발해와 접한 동해지역과 구분한 강은 지금의 Xiaobai 강이다. 이 강 이름이 시아오바이인 이유는 그 강이 곰 부족을 의미하는 시[xi]와 차즙, 차죽(熬)을 의미해 그것을 만드는 호랑이 부족을 상징하는 아오[ao], 그리고 배달(背達)을 의미하며 경계선을 뜻하는 패[浿 pei]가 함께 담겼기 때문이었다.



곰 부족과 호랑이 부족의 연합 전통이 중국 동부 지역에서 깨진 것은 기원전 425년에 일어났던 요동반도의 산동반도로부터의 분리가 가져온 대방의 파괴 때문이었다. 대방의 파괴는 진조선의 조정하에 고래로부터 이루어져 왔던 막조선과 불조선의 상호 협력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공인되어 온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명보다 무려 천년이나 앞선 문명으로 그 증거들을 속속 내놓아 요하문명으로 새로이 정리되어 불리고 있는, 홍산문화로 불렸던 지금의 요녕성 능원시 동북변 지역에서 발굴되는 우하량(牛河梁) 유적지(遗址)는 발굴된 그 엄청난 유물과 유적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이곳이 어째서 그런 엄청난 문명이 인류사 최초로 일어난 곳인지 의심받아 왔는데 그 이유는 우하량이 위치한 지리적 한계 때문이었다. 수메르 문명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남북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두 개의 큰 강 유역을 이용해 사방으로 탁 트인 평원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통해 그 문명의 형성을 수긍하게 만들었다면 우하량으로 대표되는 요하문명은 수메르 문명이 가진 사방으로 탁 트인 지리적 타당성이 전혀 없는 위치였기 때문이었다. 연산 산맥으로 서쪽은 애로가 존재하며 남쪽은 발해란 바다로 막혀 있고 동쪽은 요택이라는 늪지로 봉쇄된 그 지역이 어떻게 그런 엄청난 문명을 인류사 최초로 일으켰는지 의심받아 온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바다로 떨어져 있는 요동반도와 산동반도가 하나로 포개져 있어 모양이 허리띠 같다 하여 대방이라 불리던 땅으로 존재해 마한과 번한, 막조선과 불조선의 대규모적인 육상 교류를 가능케 한 지역이었다면 발해라는 바다로 넘실대고 있는 지금의 하북성 당해진 동쪽까지 모두 육지였다는 것이어서 우하량은 그야말로 막조선(마한)과 불조선(번한) 그리고 진조선(진한)을 연결하는 최적의 요충지였다는 것이 수긍될 수 있다. 요동반도와 산동반도가 분리되지 않고 포개어진 땅으로 대방을 이루고 있었을 때 막조선과 불조선은 별 어려움 없이 언제든 교류 협력할 수 있었고 그런 협력은 기원전 770년에 시작된 춘추시대에서도 황하 하류 이북의 땅을 고조선의 영토로 유지할 수 있게 하는 힘이었다. 춘추시대의 상황을 그린 고지도를 보면 제나라와 노나라, 송, 정, 위나라 같은 대표적 나라들이 모두 지금의 황하 중하류 이남의 땅에 위치해 있는 것은 그런 연유였다. 기원전 425년 요동반도와 산동반도가 분리된 사건은 차(茶)를 제조하고 중개하고 수송하는 역할을 분리하여 모두가 주도적인 지위를 누리며 경제 활동을 가능하게 해 준 삼한관경제가 기능하지 못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비록 차(茶) 나무가 생장하는 소도지역인 근역에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마한은 근역에서 나온 차(茶)를 가공해 번한에 팔아 경제적 안정을 꾀할 수 있었고 번한은 그 차(茶)를 다시 가공해 서역으로 무역함으로써 경제적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차(茶)를 제조하는 웅족의 막조선과 차(茶)를 재가공하는 호족의 불조선이 지금의 북경과 고당현을 남북으로 잇는 선을 경계선으로 그 역할을 구분하고 있었다. 요동반도가 산동에서 떨어져 나간 후 불조선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호족 조선인들이 뭉쳐 세운 나라가 중산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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