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차산업(茶産業)을 재건해 나당전쟁(羅唐戰爭)의 전비(戰費)를 마련해 달라는 문무대왕(文武大王)의 부탁을 받은 원교국사(圓敎國師) 의상(義湘)이 실크로드 상방의 차산업 (茶産業) 독점에 첨병(尖兵)으로 나선 법상종 승려들의 감시를 따돌리고 문무대왕의 청을 이루기 위해 달려간 곳은 바로 대국통(大國統) 자장율사가 갔던 명주(溟州: 강원도)였다. 속초(束草), 양양(襄陽)이 그 시작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85 미터 높이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황룡사 9층 목탑의 첨탑(尖塔)은 동해(東海)를 통해 경주(慶州)를 향해 오는 모든 무역선(貿易船)들을 안내하는 이정표(里程標)와 등대(燈臺) 역할을 했고 각 층은 하나의 누각(樓閣)처럼 시루에서 나온 찻잎들을 신속하게 냉각, 건조하는 훌륭한 공간이었다. 울산(蔚山) 태화강변(太和江邊)에 지은 태화사(太和寺)는 차(茶) 무역선들에 실려 있는 찻잎들을 모두 인수한 후 증차(蒸茶) 제조를 위해 양산(梁山) 통도사(通度寺)로 보내는 역할을 했었다. 선덕여왕이 죽자 김춘추와 김유신은 신라의 차산업(茶産業)을 포기(抛棄)하는 대가(代價)로 신라의 보존(保存)을 얻어냈고 그래서 새로운 차(茶) 산업기지(産業基地)의 비밀스러운 구축은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요청이 되었다. 새롭고 비밀스러운 차(茶) 교역로(交易路)를 만들기 위해 경주(慶州)를 떠난 자장(慈藏)이 선택한 곳은 최오지(最奧地)인 태백산맥(太白山脈)이었다.
동예(東濊)로, 하슬라(何瑟羅)로 불리던 시절부터 울릉도(鬱陵島)를 통해 일본 차무역선(茶貿易船)이 해류(海流)와 계절풍(季節風)에 휘말려 본의 아니게 들어오고 있던 명주(溟州)가 그의 목표였다. 신라 전래(傳來)의 차(茶) 산업을 지키기 위해 오대산(五臺山)까지 들어간 자장(慈藏)은 마침내 새로운 차(茶) 교역로를 만들어냈다. 강릉(江陵)과 평창(平昌), 동해(東海)와 정선(㫌善), 영월(寧越), 속초(束草)와 횡성(橫城), 원주(原州), 단양(丹陽)과 충주(忠州), 원주(原州)와 제천(堤川), 괴산(槐山)과 공주(公州)에 사찰(寺刹)들을 각각 건립(建立)하고 그들을 거미줄처럼 연결한 최초의 내륙(內陸) 횡단(橫斷) 교역로(交易路)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신라의 아달라(阿達羅) 이사금(尼師今)이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 같은 내륙 종단(縱斷) 교역로를 만든 이후 최초로 만들어진 횡단(橫斷) 교역로의 이름은 차령(車嶺). 수레 거(車) 자로 위장(僞裝)했으나 그것은 분명 차령(茶嶺)이었다. 피 물고 덤벼드는 실크로드 상방의 청부업자(請負業者) 법상종 승려들의 경계(警戒)를 풀기 위해 차령(茶嶺)은 차령(車嶺) 말고도 산맥(山脈)이라는 위장막(僞裝幕) 하나를 더 뒤집어써야 했다. 차령산맥(車嶺山脈). 산맥 아닌 산맥이 만들어진 연유였다.
그러나 자장율사는 그 차(茶)들을 구입(購入) 해 줄 머천트(Merchant:차상인)를 만들어 내지는 못하고 죽었다. 자장(慈藏)이 그토록 고대하던 문수보살(文殊菩薩)은 사실은 신라 차(茶)를 구입해 줄 수 있는 머천트(Merchant 茶商人)였고 그 머천트(Merchant 茶商人)는 싸고 질 좋은 신라 차(茶)를 대량으로 판매하는 자장(慈藏)을 신뢰했었다. 중국 오대산(五臺山)에서 신라의 차(茶)를 구입해 줄 머천트(Merchant 茶商人)를 만나 선덕여왕의 신라 차산업(茶産業) 보호(保護) 정책(政策)을 성공적으로 뒷받침했던 자장(慈藏)이었다. 세계 시장에 신라 차(茶)가 교역되고 있는지를 삼엄(森嚴)하게 감시하는 실크로드 상방(商幫) 때문에 접선(接線) 장소도 옮기기도 하고 형편없는 몰골로 위장(僞裝)도 하며 자장(慈藏)과 오랜 관계를 맺어 온 머천트(Merchant 茶商人)도 자장(慈藏)을 만나려 했지만 변장(變裝)한 머천트를 알아채지 못한 자장(慈藏)의 실수로 결국 신라 차(茶) 수출(輸出)은 이뤄지지 못했다. 중국 오대산(五臺山)에 터 잡고 오랫동안 자장(慈藏)과 차무역(茶貿易)을 이어온 그를 그가 원한 장소에 창건한 정선 아우라지의 갈반지(葛盤地) 정암사(淨巖寺)에서 돌아서게 한 건 세작(細作)으로 들어와 있던 시자(侍子)의 간계(奸計)때문이었다. 그 시자는 용화향도(龍華香徒)의 화랑(花郞)이었다.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 제4권 자장정율조(慈藏定律條)에 이 이야기가 자세히 수록되어 있었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태백의 깊은 갈반처(정암사)를 찾았다. 어느 날 어떤 노거사가 남루한 가사를 수하고 칡으로 된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가지고 와서는 시자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자장을 보러 왔다”라고 했다. 시자는 “스승을 받들어 모시면서부터 나의 스승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이를 보지 못하였는데,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러한 광언(狂言)을 하는가”라고 답했다. 이에 거사가 말하기를 “다만 너의 스승에게 고하여라”라고 했다. 시자가 들어가서 고하니, 자장이 깨닫지 못하고 말하기를 “심각한 광자(狂者)인가 보다”라고 했다. 시자가 나와서 그를 쫓으니, 거사가 말하기를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아상(我相)이 있는 자가 어떻게 나를 볼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삼태기를 뒤집어서 터니 죽은 개가 변화하여 사자보좌(師子寶座)가 되었다. 그 자리에 올라가 방광 하며 떠나갔다. 자장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바야흐로 위의 를 갖추고 방광한 빛을 찾아서 남쪽봉우리(南嶺)로 황급히 올라갔다. 그러나 이미 묘연(杳然)하여 미칠 수 없게 되니 마침내 몸이 떨어져서 죽었다(殞身). 이에 다비(茶毘)하여 뼈를 돌구멍 가운데 안치했다.》
영월(寧越)이라는 지역은 당 태종에 의해 압살 당해야 했던 신라의 차(茶) 산업을 보존하고자 간난신고(艱難辛苦)를 마다하지 않고 차령(車嶺)이라는 새로운 동서(東西) 횡단(橫斷) 차무역로(茶貿易路)를 만들었던 자장율사(慈藏律師)의 대계(大計)에서 가장 핵심적인 지역이었다. 자장대사가 영월(寧越)에 있는 사자산(獅子山)에 흥녕사(興寧寺: 지금의 법흥사)를 창건해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적멸보궁(寂滅寶宮)을 건립한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게다가 궁예가 출가한 세달사(世達寺:후일 흥교사)는 의상대사(義湘大師)가 문무대왕의 청(請)으로 차무역(茶貿易)을 통해 나당전쟁(羅唐戰爭) 군자금(軍資金)을 마련해 나가는 데 있어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찰이었는데 그것은 삼국유사 제3권 탑상 편(塔像編)에 나오는 “낙산(洛山)의 두 성인(聖人) 관음(觀音)과 정취(正趣) 그리고 조신(調信)”조(條)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세달사(世達寺)에 소속된 영월(寧越) 소재 장원(莊園)을 양양(襄陽)의 낙산사(洛山寺)에서 파견(派遣)한 조신(調信) 스님이 관리(管理)하고 있음을 보여준 이 기록은 의상대사가 창건한 낙산사와 영월에 있는 세달사가 함께 동일한 주체에 의해 운영되는 사찰들이란 걸 증거(證據) 해 주는 것이었다. 자장율사가 개척(開拓)하고 의상대사가 완성한 차령(車嶺 실상은 茶嶺)이라는 동서(東西) 횡단(橫斷) 무역로(貿易路)에서 단양(丹陽)과 함께 바퀴 중심축(中心軸) 같은 역할(役割)을 담당(擔當)했던 영월(寧越)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궁예(弓裔)였기에 해양무역파(海洋貿易派)인 왕건(王建)이 먼저 그의 휘하(麾下)로 스스로 찾아 들어올 정도로 정세(情勢)를 빠르게 판단(判斷)하는 실력(實力)을 함양(涵養)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꾸만 더워지는 기후변화(氣候變化)가 바다에 예측 불가능한 태풍(颱風)들을 계속 만들어 내 결국 바다를 통한 차(茶) 무역이 불가능해질 거라는 그의 예지력(豫智力)은 그러나 왕건에 의해 탄핵(彈劾)당하고 만다.
구산선문(九山禪門)중 실제로 통일신라 말기에 형성된 산문(山門)은 여덟 개였고 그중 문경에 터 잡은 희양산문(曦陽山門)은 개창 초기에 실크로드 상방(商幇)이 운영하는 법상종단(法相宗團)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기에 결국 실질적으로 활동한 것은 총 일곱 산문(山門)이었다. 문경(聞慶)의 희양산문(曦陽山門)이 일찌감치 법상종단의 법주사(法住寺)에 의해 파괴된 건 문경이 가진 차(茶) 무역로로서의 전략적 가치(價値) 때문이었다. 문경(聞慶)과 충주(忠州)를 연결해 남한강(南漢江)을 수로(水路)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계립령(鷄立嶺)과 영주(榮州)와 단양(丹陽)을 연결해 역시 남한강(南漢江)을 수로(水路)로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죽령(竹嶺)은 월악산(月岳山)과 소백산(小白山)에 의해 가로막힌 남과 북을 연결시켜 주는, 150년대에 신라 아달라(阿達羅) 이사금이 개발한 내륙 종단(縱斷) 무역로(貿易路)였다. 그러나 이 길들을 통해 수송(輸送)되는 차(茶) 물동량(物動量)이 법주사(法住寺)에 의해 관제(管制)되는 보은(報恩) 옥천(沃川)을 통해 이동하는 차(茶) 물동량에 비해 미미(微微) 한 것이어서 법상종단의 감시와 경계는 그리 크지 않았었다. 그러다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죽령(竹嶺)의 동북쪽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해 온달(溫達) 장군이 시작하고 그의 죽음으로 버려졌던 마구령(馬驅嶺)을 차(茶) 무역로(貿易路)로 새로이 개발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마구령(馬驅嶺) 개통은 계립령과 죽령을 개통한 아달라(阿達羅) 이사금이 일찍이 사도성(沙道城)을 축성(築城)해 방어할 정도로 무시 못할 규모로 일본 찻잎(茶葉)이 들어오는 영덕(盈德)과 새로이 의상(義湘) 대사가 개발한 무역항 울진(蔚珍)으로 들어오는 일본 찻잎(茶葉)을 한껏 이용하기 위해 꺼내든 기상천외한 대책이었다. 문무대왕(文武大王)으로부터 당(唐) 나라의 침략(侵略)으로 벌어질 나당전쟁(羅唐戰爭)에 사용될 신라의 전쟁비용 조달(調達)을 부탁(付託) 받은 의상대사가 자장율사(慈藏律師)처럼 당나라의 감시(監視)가 소홀(疏忽)한 동해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일본 차(茶)를 교역해 그 이익으로 군자금(軍資金)을 충당(充當)해 낼 방법을 찾아낸 것이었다. 의상(義湘)은 영주(榮州) 부석사에서 소백산을 마주 보고 있는 온달산성(溫達山城)이 있는 단양(丹陽) 영춘면(永春面)에 비마라사(毘摩羅寺)를 창건해 부석사(浮石寺)와 연결함으로써 울산(蔚山)과 울진(蔚珍)으로 들어오는 일본 차(茶)를 차령(車嶺)을 통해 수출(輸出)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새로운 교역로는 의상(義湘)에게 자장(慈藏)과는 달리 차령(車嶺)을 통해 차(茶)들을 머천트들에게 판매(販賣)하게 하는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물론 그 성공 이면(裏面)에는 토번(吐蕃:지금의 티베트)이 신라에 주둔(駐屯)해 있다 서역전선(西域戰線)으로 파병(派兵)된 당나라 군세(軍勢)를 일거에 전멸(全滅)시켜 준 뜻밖의 사건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어도 의상(義湘)의 성공은 역사적인 것이었다. 설인귀(薛仁貴)가 그 문책(問責)으로 서인(庶人)으로 강등(降等)될 정도였으니 당나라가 받은 당시 충격(衝擊)은 엄중(嚴重) 한 것이었다.
의상대사의 성공(成功) 이후 영주(榮州)와 문경(聞慶) 사이에 있는 지역들에 대한 법상종단의 경계(警戒)는 삼엄(森嚴)하게 되었다. 지금 법주사(法住寺)에 있는 거대한 무쇠솥(鐵鑊)은 문경(聞慶)과 괴산(槐山)을 잇는 이화령(梨花嶺)을 개발해 새로운 교역로(交易路)를 확보하고자 선종(禪宗)으로 갈아입은 천태종단(天台宗團)이 문경의 희양산(曦陽山)에 창건한 봉암사(鳳巖寺)에 있던 무쇠솥(鐵鑊)이었다. 교역로의 패권(覇權)을 장악(掌握)해 풍부한 재정(財政)을 쓸 수 있었던 김제(金堤)의 금산사(金山寺)와 보은(報恩)의 법주사(法住寺), 그리고 공산(八公山)의 동화사(桐華寺)를 비롯해 사찰(寺刹) 이름을 유가사(瑜伽寺)라 지어 유가종(瑜伽宗)처럼 가장(假裝)한 수많은 법상종단(法相宗團) 사찰(寺刹)들에서는 그렇게 거대한 무쇠솥을 제작해 써야 할 이유가 없었다. 수많은 요사채(寮舍)와 전각(殿閣)들, 암자(庵子)들이 이미 충분히 건축(建築)되어 있는 법상종단의 사찰(寺刹)들과 사원(寺院)들은 그렇기에 차(茶) 제조(製造) 기술자들도 이미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다. 조리(調理)하기도 어렵고 만드는데 비용도 많이 들고 유지관리하기도 어려운 거대한 무쇠솥을 사용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법상종단이었다. 그러나 이제 막 창건해 법당(法堂) 말고는 딱히 다른 건물들이 거의 없었던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 같은 선종(禪宗)으로 가장(假裝)한 화엄종단(華嚴宗團 실상은 천태종단) 사찰들에서는 재정(財政)마저 빈약(貧弱)해 전각(殿閣)들을 여러 채 짓는 대규모 건축사업도 난망(難望)한 상황에서 전차(煎茶)를 한 번에 대량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거대한 무쇠솥(鐵鑊)은 반드시 있어야 될 필수 생산수단이었는데 사실 그렇게 크게 만든 또 다른 진짜 이유는 전차(煎茶)를 제대로 만들어 낼 줄 아는 전문(專門) 기술자(技術者)가 한 둘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한 뒤였다. 밥이나 국(湯)을 만들어 먹자고 제조(製造)하는 데만도 엄청난 비용을 들여야 하는 거대한 무쇠솥(鐵鑊)을 만들 만큼 무모(無謀)했다면 법상종단이 그토록 모질게 패권(霸權)을 유지(維持)할 수는 없었을 역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