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사촌동생이 태어날 때, 삼촌이 예닐곱살이 된 내손을 꼭 잡으며
"J야, 동생들이 태어나도 질투하지 말아. 삼촌은 네가 제일 좋아" 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알겠어 삼촌" 한편으로 속상했지만 다 큰 냥, 답을 해드렸던 기억이 있다.
나는 외가댁 동생들보다는 어른들과 어울렸다. 밥을 먹을 때에도 어른상 한 귀퉁이를 차지했었고, 더 커서 성인이 되고 난 뒤에도 외삼촌들과 같은 술상에 앉아 대작했다. 외할머니와 삼촌, 이모의 사랑은 나의 자존감이자, 디폴트 값이었다. 나는 공부도 곧 잘했고, 좋은 직업을 얻었으며, 사회생활도 당연히 가장 먼저 했기에 기대와 관심을 많이 받았다.
첫 결혼, 첫 출산의 주인공도 역시 나였다. 명절날 처음으로 외할머니에게 용돈을 드린 것도, 선물을 안겨드리는 것도 나였다. 나는 아버지를 포함한 친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외가에 관심과 애정을 쏟았으며 아내도 알게 모르게 마음이 쓰였는지, 외가댁 식구들을 어려워하지 않고 살갑게 대해주었다.
그 이후 사촌동생들도 차례차례 사회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았다. 외가댁 가족들은 많아졌고, 어른들은 나이가 들었다. 할머니는 여든이 넘었다.
나는 할머니와 삼촌, 이모들, 그들의 자녀들과 변치 않는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동생들은 조금 어색했고 그들의 배우자들은 까마득한 대학 후배를 보는 것 같았다. 사실 나보단 그들이 나를 더 어려워할 것이 뻔하기에 씁쓸하고 속상했다.
어느 명절모임이었을 거다. 친정식구들도 내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언제부턴가 어머니도 본인의 친정에 오지 못했다. 나는 그때 저녁식사자리에서 어른들과 앉지 않고 사촌동생들 쪽 테이블로 갔다. "J야 왜 그리로 가냐? " " 삼촌 저 오늘은 애들이랑 식사할게요"
나는 사촌동생들과도 잘 지냈기 때문에 나는 냉큼 다가가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거기엔 동생들의 남편, 아내들도 있었다. " 형 왜 이리로 와요? "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 K 가 나에게 웃으며 물었다. " 응 이제 나도 젊게 놀려고" 너스레를 떨며 내가 대답했다. 나는 동생들의 배우자들이 약간 어색한 정도였지만, 그들이 상대하기에 나는 꽤 어려운 사람이었을 거다. 나이차도 많고, 같은 성씨인 집안사람도 아니고, 게다가 나의 아버지는 그들의 처부모, 혹은 시부모와 관계가 안 좋은 사람.. 대화 중에 괜히 미안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 곧 나는 나 스스로에 떠밀려 슬그머니 삼촌들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거봐 J야 너는 이리로 와서 놀아야 해" 삼촌이 말했다. "그러게요. 괜히 제가 그랬네요" 태연히 내가 대답했다. 친척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즐겁게 건배를 하고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이 집안의 맏이셨다. 외할아버지가 이른 나이에 돌아가시고, 외할머니는 젊은 나이에 다섯 자녀를 키워내셨다. 첫째 딸, 둘셋 넷째 아들, 그리고 막내딸. 우리 엄마는 대학을 졸업하고 이른 나이에 학교선생님이 되셔서 유일하게 집에서 돈을 벌어오는 사람이 되었다.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 가정의 실질적이고, 경제적인 가장이 된 엄마는 모든 돈을 외할머니께 갖다 바쳤고, 그 돈으로 여섯 이서 생활을 꾸려나갔다. 삼촌들에게 우리 엄마는 , 누나이지만 부모와 같았다고 했다.
"그냥 누나라고 하면 아버지한테 몽둥이로 맞았단다, 항상 누님이라고 호칭을 해야 했지" 둘째 삼촌이 말했다. " 누님이 벌어온 돈으로 우리가 그 좁은 방에서 생활했지. 할머니도 오죽 힘드셨겠냐, 삼촌들은 사고뭉치들이었으니까" 막내삼촌이 거들었다. "그 암울하고 처절했던 집에 J야 네가 태어났는데 정말 금덩이가 우리 집에 선물로 온 것 같았다. 우울했던 할머니가 항상 웃음꽃이 폈어, 삼촌들은 잠 잘 자리가 없어서 부엌 편에서 잤지만, J야 네가 태어나고, 그 어두운집에 밝은 전등이 켜진 것 같았다. " 첫째 삼촌이 말해주셨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나, 너무 많은 생각을 했나. 결국 과음을 하고 두통으로 잠에서 깼다. 희리멍텅한 기억 속에 나는, 이유없이 사방군데 영역표시를 하는 생명체 같기도 했고 , 초대받지 못한 축제에 몰래 숨어 들어온 이방인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술 취해서 괜스레 오버했던 기억들이 칼날처럼 들어와 머리에 박힌다. 무엇이 두려웠나, 아니면 불안했나. 친척들의 표정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곤란해했을 수도 있었겠다.
"여보. 당신은 이 집안의 주인공중 하나야. 당신이 얼마나 이 가족들을 사랑하는지 내가 알고, 어른들이 당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나에게도 다 보이더라. 나는 당신 가족이 부러워 어쩜 모두가 이렇게 잘 지내실까? 할머니께서 참 복이 많으신 것 같아." 아내가 내 마음을 아는 것처럼 나에게 말했다.
그래. 아내말이 맞을 것이다. 그렇다. 그렇지만 그렇다 해도, 시간이 지났으니 모든 게 예전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각자 나이를 먹었고, 새로운 가족을 얻었고, 바라봐야 할 곳이 달라졌다. 나는 이때까지는 자타공인 주인공이었으나 이젠 마음을 달리 먹어야 했다. 6살 때의 대답을 이제 다른 깊이와 의미로 다시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외할머니, 맏이인 어머니, 첫 손주인 나는 깨지기 힘든 강한 결합을 공유하는 것 같았지만,
나와 아버지관계로 인하여 어머니가 한 축을 비우게 되었고 할머니는 점점 나이가 드셨다. 나뭇가지들은 분지를 치며 더욱 풍성해졌고 굵어지다, 기둥과 가지가 서로 뒤엉켜 더 큰 나뭇기둥을 이루었는데, 본래 그 나무의 씨앗은 외할아버지의 성씨(姓氏)이니, 나는 다시 한번 그 당연한 사실을 깨달으며 아내를 향해 겸연찮게 웃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