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원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
인자하게 생긴 노부부께서 처음 진료실에 들어왔다. 70대 후반인 J할아버지와 L할머니께서는, 다른 의원을 다니다가 퉁명스럽고, 불친절한 진료 때문에 결국 정착하지 못하고 우리 의원에 오셨다 했다. 나는 개원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기에 한 분 한 분이 소중했던 터라 더 살갑게 맞이해 드렸다. J는 손주뻘인 나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잘 부탁드린다고 하셨고 나는 반사적으로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앞으로 제가 잘 봐드리겠습니다" 진료실에서 7,80대 어떤 부부는 사이가 안 좋아 따로 병원에 방문하기도 하고, 다른 부부는 항상 손잡고 함께 오기도 하는데, 이 부부는 후자였다.
거의 사나흘에 한 번꼴로 오셔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점점 그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J는 학교의 교장이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이에 비해 정정하셨고, 교양 있으셨으며, 진료 시에도 필요한 내용을 반듯한 글씨로 메모해 오셨다. 주로 환자는 할머니였다. J는 왜소하고 말랐다. 그녀는 기존에 고혈압, 갑상선저하증 등 만성질환도 있었지만 평소 위장이 많이 안 좋고, 기본적으로 몸이 약했다. 속이 쓰려서 위장약을 먹으면 변비가 생기고, 변비가 치료되니 장이 꾸룩꾸룩하여 식사를 못 한다는 둥, 증상들이 얽히고설켜서 L을 귀찮게 하였다. "다른 곳에 가봐도 할 게 없다고 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J보다 4살 어린 L은 항상 할아버지에게 부축을 받아 쓰러질 듯 진료실의자에 앉았고, 신세 한탄부터가 진료의 시작이었다. 진료실내 보호자 의자가 있었지만, J는 항상 할머니 뒤에 서서, 죄송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다, 가끔 바닥에 고개를 숙이시곤 했다. 나는 그런 J의 모습을 볼 때마다 좀 더 성의껏 진료를 보려 노력했다.
세월이 흐르며, 차트의 진료기록도 쌓여갔고 우리의 대화도 함께 깊어졌다. 어르신들은 나의 휴가 때 용돈을 예쁜 봉투에 넣어 주시기도 했고, 나는 나의 자녀들 사진들을 보여드리기도 했다. 환자와 의사 그 적정거리 선 안팎에서 우린 이웃사촌처럼 서로의 삶을 공유했다. 내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고 알려드렸을 때 그분들은 본인의 손주를 본 것처럼 기뻐하셨고 며칠 뒤에 조그맣게 돌반지를 선물하시기까지 했다.
나는 나의 아버지와 관계가 서운했고, 그들은 그들의 자녀, 며느리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 나는 나의 가정사를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이야기를 종종 해주셨었고, 그게 나의 마음을 좀 더 열게 끔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사실 L의 진료가 편한 것은 아니었다. 병이 나아지게끔 해야 하는 게 의사의 역할인데 여러 방법을 동원해도 답이 보이지 않아 막막했고, 수십 번 L의 푸념을 듣다 보니 뻔한 레퍼토리가 지겹기도 했다. 가끔씩 할머니의 말을 끊기도 했고, 퉁명스럽게 대꾸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J는 고개를 숙였고, 그들을 보면 나는 죄송했고, 속상했고, 답답했다. 할아버지의 마음을 다 알 수 없어서, 조금은 알 것만 같아서.. 사실 알고 싶지 않아서..
어느 날은 할머니가 혼자 오셨다. 들어오시자마자 눈물을 흘리시길래 왜 혼자 오셨냐 물으니 할아버지와 대판 싸우셨단다. 집에서 여느 때처럼 아프다고 끙끙 앓으니, 할아버지께서는 병원에 가자셨단다. 가봤자 뭐 하냐고, 낫지도 않는데 가는 길이 힘들어서 더 죽겠다 볼멘소리를 냈더니, 할아버지께서 버럭 화를 내고 집을 나가셨단다. 서러워서 집에서 엉엉 울다가 보란 듯이 혼자 집에서 나왔는데 걸어갈 힘이 없어 지인을 불러 택시를 타고 왔단다. "저렇게 무심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양반과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원장님?" L은 할아버지가 없어서인지 흉을 보기 시작했다. " 어머님, 아버님께서 얼마나 잘 챙겨주시는데 그러세요" 내가 웃으며 대답했는데 할머니는 눈을 찌푸리며 "아니에요, 집에 둘이 있으면 얼마나 삭막한 줄 아세요? 내가 속상해요" 라며 엉엉 우셨다. "그래요? 어머님, 병원에 오시면 제가 대신 잘 챙겨드릴게요" 하고 넘긴 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늙어 몸이 말을 듣지 않고, 낫지 않고 가망 없다고 들으면 마음이 어떨까. 여러 이유로 자녀. 며느리와 멀어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들도 보지 못하면 얼마큼 고독해질까? 내 한 몸, 내 마음 건사하지 못해 나의 배우자에게 의지한 채, 그와 내 마음을 바늘로 휘어파며 살아가야 한다면, 매일 하루의 시작을 쉬이 할 수 있을까? 기대없이, 사는게 아니라 죽어가는 과정이라 느낀다면 그 안에 행복의 씨앗이 움틀 수 있을까? 물론 남녀노소 모두에게 각자의 희로애락은 분명 존재할 거고, 겪어보지 않은 내가 타인의 인생을 함부로 재단하거나 평가할 생각은 없지만, 누구에게나 인생의 마지막은, 그 불꽃이 희미해지고, 홀로 고독해진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기도 하다. 나 또한 그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기에, 할머니의 삶을 관조하며 나의 미래를 그려보았다. 할아버지의 삶도 딱하긴 마찬가지였다. 함께 사는 아내가 고통과 슬픔속에 살아간다면 나의 삶도 그렇게 변질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봐도 나를 도와줄 이 하나 없다면, 결국 나는 오롯이 간병인으로서 내 마지막 삶을 바쳐야 하는 것이다. 갑작스레 터질 아내의 호출을 대기하며 핸드폰을 놓지 못하는 그러한 삶. 아내의 투정과 한(恨), 그리고 참담함을 받아낼 이가 나 혼자일 테니, 나는 그럼 삭힐 수도 없는 끄득한 울분을 누구에게 토해내야 한단 말인가.
어느 날 할아버지가 혼자 오셨다.
물론 그도 만성질환 약을 규칙적으로 받는 환자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 아버님 오늘은 혼자 오셨네요?"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내 인사를 듣자마자 J는 갑작스레 울컥 눈물을 터트렸다. " 나 너무 힘들어요 원장님, 아내 간병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처음이었다. 수없이 할머니의 눈물을 봤지만 그의 강렬한 감정의 분출을 보고 느낀 건.. 나 또한 그의 찢어지는 외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가, 뭐에 쫓기듯 위로의 말을 해드렸다. 내가 무슨말을 했는지, 잘은 기억나지않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좀 더 많이 들어드릴껄. 손이라도 잡아드릴껄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어찌됐건 할아버지께서는 시간이 흐른 뒤에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꾸벅 인사를 하시며 진료실을 나가셨다.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어느 날이었다. 진료실 밖에서부터 할머니 우는 소리가 났고 때마침 대기가 없어, 얼른 진료실로 모셨다.
"어머님 왜 우세요?" 인사 아닌 인사를 건넸다.
"남편이 하늘로 갔어요" 할머니께서 말했다. 나는 너무도 놀라서 할머니를 바라만 보았다.
"너무 힘들어서 수액을 좀 맞고 갈래요" 할머니께서는 짧게 말하고, 직원의 부축을 받아 수액치료실로 들어가셨다. 수액실로 따라 들어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금 상중(喪中)이라 하였다.
진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영정 사진 속 J는 웃고 있었던 것 같다. 상주옷을 입은 아들들이 나를 맞이했다. 그들은 아버님을 닮았다. 할머니가 이전부터 말해줬던 아들들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적어도 나보다는 나은 아들 같아 보였다. 그들도, 며느리들도 보통의 인상을 가진 보통 사람들이었다.
할머니가 자고 일어나 보니 할아버지가 안 보이더란다. 산에 간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긴가민가 헷갈려 기다리다가 , 전화도 받지 않아 결국 실종신고를 했는데, 산에서 발견되셨다고 한다.
그 이후 할머니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간간히 병원에 오셨는데 올 때마다 통곡인지 비명인지 오열을 토해내고 가셨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살라는 거냐, 혼자 먼저 가버리고, L은 야속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수없이 외쳐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따라 첫 번째 자살시도를 하였고 실패했다가 끝내 두 번째 자살시도를 하여 세상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