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색무취

by 소이

낯선 일을 시작한다는 건 어쩌면 약간의 용기만 있으면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일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든 아니든 적어도 시작에 있어서는 그렇다. 물론 그렇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은 것이라는 것은 잘 안다. 그 앞에는 때마다 다른 크기의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고, 그만큼 용기의 크기가 달라지기도 하니까.


나는 그런 일에 익숙한 편이었다. 별로 겁내는 일이 없었고 어떤 때는 새롭다는 자체가 설레기도 했다. 잘 모르면 선뜻 나서기가 망설여지기도 할 텐데 어쩌면 나는 몰라서 크게 두렵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씩 시도해봄직한 일들이 있다는 게 즐거웠고, 삶에 활력소가 됐다.


운 좋게 시작한 일을 별 탈 없이 계속 밥벌이로 삼을 수 있었고, 열심히 했다.

가끔 무식해서 용감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요즘은 그 말이 절절하게 와닿는다. 뒤늦게 전공을 해야 했고, 뒤늦게 모자란 공부를 채워야 했고, 얼마나 채워야 할지 모를 만큼 경력을 쌓아야 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메우면 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경력직 강사들이 시간을 메우듯 나도 그렇게 메우면 되지 않을까.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만 달리 다른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이런저런 정보를 알게 되면서 욕심껏 많은 과정들을 듣게 됐고, 이것만 해내면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닥치는 대로 욱여넣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만난 선배 강사와 대화를 나누던 중 "선생님~ 제 강의는 너무 무색무취 같아요"라고 한 적이 있다. 그 선배 강사에 비해서 많은 시간을 낙하산처럼 껑충 뛰어넘은 나는 기본적으로 할 줄 알아야 하는 것만 해도 너무 많았고, 그 격차를 좁히기에만 몰두가 되어있던 터라 어느 날 보니 아무리 스스로 생각을 해도 도무지 내 색깔이 안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야 선생님~ 선생님은 무지개 색깔이야~" 선배의 말은 꽤 따뜻했고, 조금은 희망적이었다.



그 이후로도 계속 레이스 하듯 달려왔고 이렇게 하다 보면 내 색깔을 찾겠지 생각했다. 최근 들어서는 조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첫 외부강의에 호평을 받기도 했고, 기존 강의에서도 신임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내가 원하는 형태의 강의에 조금 더 필요한 공부들을 하고 싶었고, 이미 벅찬 스케줄이긴 했지만 놓치지 아까운 과정을 알게 되어 하반기는 조금 과하다 싶게 일상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참여형 수업 설계를 위해 배우는 과정 역시 참여형 수업이었다. 모든 산출물이 프로젝트였고, 무임승차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또 과하게 떠맡아서 허덕이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적당한 선에서 할 일을 맡았고 그렇게만 해도 몹시 버거운 과정이었다. 오늘 마지막 팀 프로젝트가 있었고 순조롭게 마무리가 됐다.


실은 이 과정은 나와 협업을 제안한 선생님을 통해서 알게 된 과정이었는데 아마도 내가 이 과정을 수료하면 함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내 소식을 궁금해할 것 같아서 커피 한잔 하자며 만난 자리에서 난 예상치 못하게 몹시 당황스러운 이야기들을 듣게 됐다.


"나는 선생님 인간관계가 걱정돼~ 선생님 피드백을 조금 들었는데 아직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 현재 수강 중인 지도 강사와 같은 활동을 하는 이 강사님은 이런저런 조언을 하기 시작했고, 어쩌면 냉정한 피드백이 절실했던 나는 괜찮으니 있는 그대로 좀 더 들은 피드백을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정말 솔직하게 더 이야기해도 돼?.. 음... 무색무취래. 좀 더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할 것 같다고. 내 강의를 부탁하기에 리스크가 크다고 했어.. 그 지도 강사가 보는 눈이 정확한 사람이거든."


스스로 생각했던 '무색무취'를 타인을 통해 냉정하게 피드백받고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나쁘다고 하기엔 누가 나한테 이런 피드백을 줄까 싶어서 오히려 잘됐다 싶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내가 자기 강의 땜빵해주려고 새로운 거 배우나? 싶은 반감도 들었다. 그렇게 오늘 나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내 색깔을 한번 더 듣게 됐다. 어째야 하나.


물론 그 뒤에 이어진 자기의 경험담은 더 절절했고(아마도 1,2년은 누구나 그렇듯 고행의 길이 필요하다는 위로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눈물이 고이는 것도 같았지만 당장 내가 어째야 하는 막막함이 더 커서 적당히 대답해가며 듣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쌓으라는 조언에는 지금껏 쌓은 내 시간은 뭐란 말인가 싶었고, 보조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말에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내가 앞으로 하려고 하는 강의의 형태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 오늘 들은 조언을 새겨들어야만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저항 역시 결코 작지 않았다. 어쩌면 완전히 새롭지도, 완전히 익숙하지도 않은 계속 변화를 줄 수 있어야 하는 형태에서 나는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적당히 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무지개 색깔이라고 했던 선배 강사의 위안 역시 무색무취와 다르지 않은 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오늘의 무색무취가 1년 뒤, 2년 뒤 그때는 무슨 색이 되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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