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풍경을 해체하고 일상에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공간
자연 속에 놓인 건축이 인간에게 고요한 위로와 서정적인 해방감을 건넨다면, 도시 한복판에 세워진 건축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감각을 자극한다. 도시는 수많은 사람의 욕망과 자본, 그리고 겹겹이 쌓인 시간의 지층이 맹렬하게 충돌하는 거대한 용광로다. 이 복잡하고 폭력적인 텍스트 위에 세계적인 거장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공간을 밀어 넣었을까? 때로는 기존의 맥락을 철저하게 해체하고, 때로는 땅의 형태를 교묘하게 비틀며 일상에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다섯 개의 공간. 그 낯설고도 매혹적인 도시 건축의 여정을 시작한다.
6. 기억의 지층 위에 불시착한 매혹적인 우주선: 자하 하디드의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어느 날 아침, 서울에서 가장 번잡하고 혼란스러운 잿빛의 도심 한복판에 매끄러운 은빛 우주선 하나가 불시착했다. 직선 하나, 직각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비정형의 유기체. 마치 살아 숨 쉬는 금속 괴수처럼 땅을 물고 꿈틀거리는 이 기묘한 건축물의 등장에 서울은 발칵 뒤집혔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여성 최초로 수상한 위대한 건축가, '곡선의 여왕'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설계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첫인상은 그야말로 시각적인 폭력이자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DDP가 품은 진짜 서사는 이 매끄러운 알루미늄 패널의 외관에 있지 않다. 이 건축물이 딛고 선 '동대문'이라는 땅이 가진 지독하게 무거운 역사의 지층과, 그 위에 얽혀 있던 치열한 갈등을 이해할 때 비로소 이 공간이 도시에 던진 질문의 실체가 드러난다.
동대문은 단순한 번화가가 아니다. 땅을 파면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성곽과 훈련도감의 유구가 쏟아져 나오는 600년 역사의 심장부다. 동시에 이곳은 한국 근현대사의 뜨거운 심장 박동이 뛰던 터였다. 고교야구의 전성기부터 프로야구의 태동기까지, 흙먼지를 날리며 베이스를 훔치던 선수들의 거친 숨결과 수만 명의 관중이 토해내던 압도적인 환호성이 서려 있던 '동대문운동장'이 바로 이 자리에 있었다. 그뿐인가. 밤이 되면 전국에서 몰려든 상인들과 미싱 돌아가는 소리로 불야성을 이루던 치열한 삶의 터전이자 아시아 최대의 패션 시장이었다.
자하 하디드의 설계안이 당선되었을 때, 이 땅이 품고 있던 수많은 기억의 주체들은 맹렬하게 저항했다. 역사학자들은 600년의 맥락을 무시한 처사라며 분노했고, 땀방울이 서린 성지를 잃게 된 야구팬들과 시민들은 짙은 상실감에 빠졌으며, 터전을 위협받은 주변 상인들은 생존권을 걸고 반대했다. 장소성이 철저하게 거세된, 서양 건축가의 자아도취적인 '기억의 암살'이라는 뼈아픈 비판이 쏟아졌다. DDP는 탄생의 순간부터 주변의 모든 맥락과 불화하는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2014년, 숱한 논란을 뚫고 마침내 DDP가 그 거대한 은빛 몸뚱이를 드러내고 사람들의 발걸음을 허락했을 때, 도시는 예기치 못한 감각적 충격에 휩싸였다. 자하 하디드는 땅의 기억을 보존하는 대신, 동대문이 가진 역동적이고 무질서한 '에너지' 자체를 공간의 형태로 번역해 냈다. 그녀의 건축에는 명확한 정문도, 후문도 없다. 층간의 구분조차 모호하다. 마치 액체처럼 흐르는 곡선의 동선을 따라 걷다 보면, 관람객은 자신이 건물의 1층에 있는지, 지하에 있는지, 혹은 지붕 위를 걷고 있는지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이 철저하게 계산된 길 잃음(Lost in space)의 경험은 묘한 해방감을 선사한다. 반듯한 격자형의 도시 구조에 길들여져 있던 사람들은,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캔틸레버(Cantilever) 구조와 유장하게 휘어지는 노출 콘크리트 복도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공간 감각을 획득한다. 직선의 폭력성이 사라진 자리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유기적인 곡선만이 사람의 동선을 부드럽게 이끌며 낯선 낭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무엇보다 DDP가 도시와 교감하는 방식은 밤이 되었을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4만 5천 장에 달하는 제각기 다른 곡률의 알루미늄 패널들은 낮에는 잿빛 도시의 풍경을 반사하며 스스로를 숨기지만, 해가 지고 주변 평화시장과 쇼핑몰의 어지러운 네온사인이 켜지면 그 화려한 빛들을 온몸으로 흡수하며 사이버펑크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24시간 잠들지 않는 동대문의 맹렬한 상업적 속도와 무질서한 불빛들이 DDP의 매끄러운 곡선 피부 위로 미끄러질 때, 이 불시착한 우주선은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라 동대문의 박동을 펌프질하는 거대한 기계 심장처럼 느껴진다.
DDP는 과거의 기억을 보존하는 데는 실패했을지 모른다. 성곽의 흔적과 야구장의 환호성은 매끄러운 금속 패널 아래로 영원히 묻혔다. 그러나 이 폭력적일 만큼 강렬한 랜드마크는, 공간이 어떻게 도시의 풍경을 지배하고 사람들의 발걸음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지 증명했다. 익숙한 일상을 해체하고, 도시를 향해 끊임없이 불화의 질문을 던지며, 마침내 스스로 새로운 장소의 맥락을 창조해 낸 거장의 맹렬한 에너지. 우리는 그 불편하고도 매혹적인 은빛 공간 속을 유영하며, 현대 도시가 감내해야 할 욕망과 혁신의 낭만을 동시에 목도하게 된다.
7. 화려한 욕망의 거리 위, 침묵으로 벼려낸 단단한 쐐기: 헤르조그 앤 드 뫼롱의 '송은(SONGEUN)'
도시의 풍경은 그곳에 깃든 자본의 크기와 욕망의 농도를 가장 정직하게 비추는 거울이다. 서울 청담동 명품 거리는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욕망이 가장 노골적이고 화려하게 발산되는 무대다. 세계적인 하이엔드 브랜드들의 플래그십 스토어들이 저마다 화려한 유리 파사드와 번쩍이는 로고를 앞세워 시각적인 아우성을 치는 이곳. 이 맹렬하고 피로한 시각적 과잉의 거리 한복판에, 주변의 모든 소음을 일거에 삼켜버리는 거대한 '침묵의 덩어리'가 하나 내려앉았다. 스위스의 위대한 건축 듀오, 헤르조그 앤 드 뫼롱(Herzog & de Meuron)이 한국에 처음으로 선보인 조형물, '송은(SONGEUN) 문화재단'의 신사옥이다.
대로변에서 마주한 송은의 첫인상은 당혹스러울 만큼 폐쇄적이고 단호하다. 주변 건물들이 어떻게든 내부를 과시하기 위해 투명한 유리를 두르고 있을 때, 이 건물은 창문 하나 없는 육중하고 거대한 콘크리트 벽으로 스스로를 완벽하게 밀봉했다. 하지만 이 건물을 더욱 기묘하게 만드는 것은 11층 높이로 치솟은 그 예리하고 독특한 '형태'에 있다. 정면에서 보면 위압적인 직사각형의 콘크리트 매스(Mass)지만, 측면으로 돌아가는 순간 건물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베어져 나간 직각삼각형의 쐐기 모양을 하고 있다. 거장은 왜 청담동 한복판에 이토록 기형적이고 예리한 사선의 볼륨을 꽂아 넣었을까?
그 해답은 거장의 순수한 예술적 직관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이고 척박한 '한국의 건축 법규' 안에 숨어 있다. 도심 속 건축은 하늘을 마음대로 점유할 수 없다. 특히 주거 지역과 맞닿아 있는 상업용 부지의 경우, 뒤편 주택가의 일조권(햇빛을 받을 권리)을 보장하기 위해 건물의 높이와 형태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일조권 사선제한'이라는 까다로운 법규를 따라야 한다. 한국의 수많은 도심 건축물들이 위로 올라갈수록 기형적인 계단 모양으로 깎이거나, 타협적인 사선으로 찌그러진 지붕을 갖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법의 통제 때문이다.
헤르조그 앤 드 뫼롱의 천재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일반적인 건축가들이 법규의 제한선을 피하기 위해 매스를 계단식으로 파편화하거나 어떻게든 쓸모없는 자투리 공간을 만들어낼 때, 이들은 오히려 그 법적인 제한선 자체를 건물의 가장 강력한 '디자인 모티브'로 무기화했다. 대지 뒤편으로 그어진 사선 제한의 보이지 않는 각도를 그대로 따라 건물의 뒷면을 과감하게 사선으로 잘라낸 것이다. 법이 강제한 족쇄를 수용하되, 그것을 군더더기 없는 하나의 완벽하고 날카로운 기하학적 덩어리(Monolith)로 치환해 냈다. 규제에 굴복해 기형적으로 잘려 나간 패배의 형태가 아니라, 도심의 하늘을 예리하게 베어내는 가장 조형적이고 당당한 쐐기로 뒤바꾼 통쾌한 역발상이다.
법규가 만들어낸 이 차갑고 예리한 형태에 따뜻한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다름 아닌 '재료의 물성'이다. 헤르조그 앤 드 뫼롱은 '숨어 있는 소나무'라는 뜻을 가진 '송은(松隱)'의 이름을 건축물의 피부 위에 물리적으로 새겨 넣기로 했다. 그들은 콘크리트를 타설할 때 일반적인 매끄러운 패널 대신, 실제 소나무 판재를 엮어 만든 거푸집을 사용했다. 콘크리트가 굳어지고 나무 거푸집을 떼어낸 자리에는 소나무 특유의 옹이와 거친 나뭇결이 화석처럼 고스란히 각인되었다. 멀리서 보면 차갑고 폭력적인 콘크리트 덩어리지만, 가까이 다가가 손을 얹으면 숲속의 늙은 나무를 만지는 듯한 따뜻하고 서정적인 촉각적 반전이 일어난다. 시각적 허영으로 가득 찬 청담동 거리에서, 이토록 철저하게 본질적인 재료의 물성만으로 승부하는 건축물의 존재감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육중한 콘크리트 벽 한구석에 깊숙이 파인 입구를 통해 내부로 들어서면, 바깥의 소음은 거짓말처럼 차단되고 동굴 같은 고요함이 찾아온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어두운 로비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나선형 계단은,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공간에 유기적인 리듬감을 부여하며 관람객을 지하의 깊은 전시실로 인도한다. 창이 배제된 폐쇄적인 구조는 역설적으로 내부의 예술 작품과 공간감 그 자체에 완벽하게 몰입하게 만드는 최적의 장치가 된다. 화려한 자본의 거리를 등지고 어두운 콘크리트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 행위는, 피로한 일상에서 벗어나 내면의 감각을 회복하는 짧고도 강렬한 의식과도 같다.
송은은 도시의 건축이 척박한 법적 제약을 어떻게 우아하게 뛰어넘을 수 있는지, 그리고 거리에 난무하는 시각적 소음을 어떻게 침묵으로 제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교본이다. 주변의 건물들이 더 크고 화려한 목소리로 자신을 뽐내려 할 때, 이 거대한 콘크리트 소나무는 그저 단단하게 대지에 뿌리를 내린 채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도심의 횡단보도 앞에 서서 이 날카롭고 묵직한 침묵의 쐐기를 응시할 때, 공간이 도시와 인간에게 던지는 질문의 무게는 그 어떤 화려한 건축물보다도 크고 깊게 다가온다.
8. 수직적 탐욕을 허물고 대지의 문화가 된 계곡: 도미니크 페로의 '이화여자대학교 ECC'
한국에서 건축은 오랫동안 씁쓸하고도 천박한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공간이 담아내는 삶의 질이나 그것이 도시에 환원하는 문화적 가치보다는, 오로지 얼마의 이윤을 창출하고 얼마나 높은 용적률을 뽑아낼 수 있는가 하는 철저한 '부동산'의 논리가 모든 것을 압도해 왔다. 건물의 높이는 곧 자본의 크기였고, 넓어진 바닥 면적은 곧 임대 수익이었다. 대지가 품고 있는 역사나 주변 환경과의 조화 같은 낭만적인 단어들은 포크레인의 굉음과 시멘트의 냄새 속에서 가장 먼저 질식당했다.
이러한 자본의 폭력적인 문법은 비단 상업 공간에만 머물지 않았다. 진리의 상아탑이라 불리는 대학 캠퍼스들조차 언제부턴가 기업의 생리를 닮아가며, 더 높고 더 거대한 랜드마크를 하늘로 쏘아 올리며 자신들의 권위와 자본력을 과시하기 바빴다. 하지만 이 숨 막히는 수직적 욕망의 틈바구니 속에서, 건축물이 이익을 좇는 탐욕적인 덩어리가 아니라 온전히 사람을 품어내는 '문화'이자 '공유하는 지형'이 될 수 있음을 가장 파격적인 방식으로 증명해 낸 공간이 있다. 바로 프랑스의 거장 도미니크 페로(Dominique Perrault)가 설계한 '이화여자대학교 ECC(Ewha Campus Complex)'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요구 조건은 무려 2만 평(약 66,000㎡)에 달하는 방대한 캠퍼스 시설을 서울 한복판에 밀어 넣는 것이었다. 한국의 일반적인 부동산 논리에 익숙한 건축가들이라면, 당연히 수십 층짜리 육중한 타워를 세워 주변 풍경을 무자비하게 짓누르며 학교의 위상을 과시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미니크 페로는 이 맹렬한 수직적 팽창의 공식에 완벽한 '역발상'으로 응수했다. 그는 건물을 하늘로 쏘아 올리는 대신, 대지의 배를 가르고 그 거대한 볼륨을 땅속 깊은 곳으로 모조리 묻어버리는 길을 택했다. 건축의 이기적인 형태를 지워버리고 대지와 건축을 하나로 융합시키는 그만의 철학, 이른바 '그라운드스케이프(Groundscape)'가 거대한 계곡의 형태로 구현된 것이다.
한국의 기형적인 건축 생태계에서 '지하 공간'이란 그저 볕이 들지 않는 값싼 주차장이나, 답답한 공기로 가득 찬 수익형 지하상가를 파내기 위한 삭막한 콘크리트 무덤에 불과했다. 하지만 페로가 파고든 지하의 계곡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공간이다. 그는 완만하게 내려가는 계곡의 양쪽 벽면을 아찔할 정도로 거대한 유리 파사드(Facade)로 세워 올리고, 그 한가운데로 도시의 빛과 바람, 그리고 계절의 변화가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오게 만들었다. 무려 지하 6층 깊이까지 내려앉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양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투명한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풍부한 자연광은 이곳이 땅속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망각하게 만든다. 오히려 빛을 가로막는 지상의 빽빽한 마천루들보다 훨씬 더 쾌적하고 눈부신 해방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2만 평의 건물이 사라진 지상부의 지붕은 어떻게 되었을까? 놀랍게도 그곳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완만한 산책로이자 아름다운 옥상 정원으로 탈바꿈했다. 건물이 대지를 흉측하게 점유하고 사람들의 통행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는 대신, 스스로 누군가가 밟고 지나가며 사색을 즐기는 '공공의 풍경(Landscape)'이 되기를 자처한 것이다.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단 1평의 땅이라도 더 사유화하고 높은 담장을 둘러 문을 걸어 잠그는 한국적 부동산의 이기주의를 통쾌하게 비웃듯, ECC는 캠퍼스와 도시의 굳건했던 경계를 허물고 시민들에게 길과 공원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이 거대한 계곡의 한가운데 서서 양옆으로 치솟은 유리의 협곡을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공간이 건네는 진정한 위로와 마주하게 된다. ECC는 건물을 높이 세워 시각적으로 군림하려는 얄팍한 자본적 과시가 얼마나 공허하고 피로한 것인지를 침묵으로 고발한다.
이곳은 평당 얼마로 계산되는 차가운 매물이 아니다.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계곡의 바람을 타고 흐르고, 연인들이 지붕 위의 정원을 거닐며, 도시의 평범한 일상이 스며드는 거대한 문화적 그릇이다. 건축이 이윤 창출의 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발걸음이 모이는 '문화적 지형'으로 승화될 때 도시가 얼마나 경이로워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완벽한 선언. 도미니크 페로의 이 장엄한 지하 계곡은 한국 건축을 향해, 진정한 랜드마크란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가 아니라 이토록 사람을 깊게 품어내는 대지의 낭만 속에 있다는 묵직한 진실을 가르쳐주고 있다.
9. 거장의 매혹적인 유희인가, 청담동의 화려한 신기루인가: 프랭크 게리의 '루이비통 메종 서울'
도시의 건축은 때로 거대한 '마스크'와 같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파사드(Facade)를 보며 환호하지만, 그 가면 뒤에 숨겨진 공간의 본질이나 땅이 가진 진정한 맥락과의 대화를 놓치기 일쑤다. 서울 청담동, 자본의 욕망이 가장 노골적으로 춤추는 명품 거리 한복판에 불시착한 프랭크 게리(Frank Gehry)의 '루이비통 메종 서울'은, 바로 그 '거장의 가면'에 대해 가장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공간이다. 이 비정형의 유리 덩어리는 과연 거장이 한국의 문화적 맥락을 치열하게 고민해 내놓은 위대한 성취일까, 아니면 그저 자신의 유명세를 무기 삼아 자본의 거리 위에서 즐긴 한바탕 값비싼 '유희'에 불과할까.
프랭크 게리는 현대 건축의 판도를 바꾼 해체주의의 거장이다.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이나 미국의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에서 보여준 것처럼, 그는 육중한 티타늄과 유리를 마치 부드러운 천처럼 구기고 비틀어, 건축이 고정된 상자라는 고정관념을 해체하며 시각적인 혁명을 일으켰다. 그의 이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브랜드가 된 지금, 한국이라는 낯선 대지에 그의 시그니처가 새겨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화제였다.
거장은 이 건물을 설계하며 한국의 전통적인 요소들, 특히 동래학춤의 유려한 도포 자락의 움직임과 조선시대 화성 성곽의 기하학적 형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공언했다. 그의 수사(Rhetoric)는 매혹적이었다. 해체주의 거장의 파격적인 곡선이 한국의 전통적인 리듬감과 만나 새로운 차원의 앙상블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기대감은, 청담동 거리를 넘어 한국 건축계를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마침내 베일을 벗은 루이비통 메종 서울을 마주했을 때, 그 설레임은 묘한 당혹감으로 변모했다. 청담동의 빽빽한 마천루들 사이로 치솟은, 마치 얼음 덩어리가 춤추는 듯한 거대한 유리 파사드는 시각적으로는 압도적이다. 솜씨 좋은 장인이 정교하게 엮어낸 수백 개의 곡면 유리 패널들은 빛을 반사하며 도심 속에 환상적인 신기루를 만들어낸다.
문제는 그 '압도적인 가면' 뒤의 공간이다. 거장이 그토록 찬양했던 '동래학춤'의 영혼은, 이 육중하고 차가운 유리 패널들 사이에 과연 온전히 스며들어 있는가? 아니면 그저 자신의 전매특허인 '구겨진 곡선'을 합리화하기 위해 가져다 쓴 편리하고 얄팍한 수사적 장치에 불과한가?
루이비통이라는 슈퍼 럭셔리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라는 본질은, 이 건축물의 형태를 더욱 모호하게 만든다.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핸드백과 화려한 의상들이 진열된 내부 공간은, 겉으로 드러난 거장의 파격적인 곡선과는 거의 아무런 유기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내부는 그저 값비싼 인테리어로 치장된, 여느 명품 매장과 다를 바 없는 상업적인 상자에 불과하다. 겉은 춤추듯 해체되어 있지만, 속은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에 맞추어 정형화되어 있는 이 기묘한 불화. 이 순간, 프랭크 게리의 곡선은 땅의 맥락이나 사람의 감정을 매만지는 '시간이 만든 공간'이 아니라, 그저 럭셔리 브랜드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쓰인, 세상에서 가장 비싼 '포장지'처럼 느껴진다.
ECC가 탐욕의 수직성을 포기하고 땅을 파고들어 사람을 품는 문화가 되었다면, 송은이 청담동의 소음을 침묵으로 제압하는 단단한 쐐기가 되었다면, 루이비통 메종 서울은 오히려 그 자본의 화려함 속에 자신을 가장 적극적으로 투신하며 시각적인 '소음'을 보태는 방식을 취한다. 거장의 유희는 매혹적이지만, 그것은 도시의 풍경을 해체하고 일상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잿빛 도심 속에 더 화려하고 더 자극적인 신기루를 하나 더 추가할 뿐이다.
우리는 이 은백색의 유리 협곡 앞에 서서, 거장의 이름값에 맹목적으로 환호하기 전에 냉정하게 물어야 한다. 이것은 과연 건축인가, 아니면 그저 자본과 거장의 명성이 만들어낸 거대한 조각품인가? 한국의 전통 문화는 이 공간 안에서 진정으로 살아 숨 쉬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마케팅을 위한 편리한 도구로 소비되었는가? 프랭크 게리의 루이비통 메종 서울은, 공간의 낭만이 사라진 자리에 거장의 화려한 '수사'와 자본의 '욕망'만이 남았을 때 건축이 얼마나 아름답지만 공허한 신기루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씁쓸하고도 매혹적인 반면교사다.
10. 자본의 육중한 매스 속을 파고든 달항아리의 여백: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아모레퍼시픽 본사'
도시의 욕망과 자본주의의 생리가 가장 적나라하게 응축되는 건축물은 단연 '대기업의 본사(Headquarters)'다. 한국 건축사에서 기업의 사옥은 오랫동안 권력의 크기를 시각적으로 과시하는 거대한 트로피이자, 탐욕스러운 자산 증식의 도구였다. 주변의 맥락은 아랑곳하지 않고 얼마나 더 높이, 더 뾰족하게 하늘을 찌르는가. 혹은 얼마나 더 번쩍이는 유리 커튼월로 외관을 포장하여 타인의 시선을 압도하는가. 그것이 성공한 기업을 증명하는 가장 직관적이고 폭력적인 문법이었다.
이 맹렬한 수직적 팽창과 시각적 과잉의 경쟁 속에서, 서울 용산 한복판에 들어선 영국의 거장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의 '아모레퍼시픽 본사'는 기존의 모든 한국적 사옥 공식을 묵직하게 배반한다. 이 거대한 건축물은 하늘을 찌르는 대신 스스로를 정육면체의 육중한 덩어리(Cube)로 단호하게 묶어두었고, 화려하게 번쩍이는 대신 무광의 백색 얼굴로 도시의 소음 속에 고요히 침잠한다. 이 공간은 막대한 자본과 세계적인 거장이 만났을 때, 어떻게 그 자본의 덩어리가 이기적인 요새를 넘어 도시의 고결한 풍경이자 시민들의 문화적 자산으로 진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모범적이면서도 씁쓸한 교보재다.
데이비드 치퍼필드는 이 단단하고 절제된 매스를 구상하며 한국의 '백자 달항아리'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프랭크 게리가 동래학춤의 곡선을 유리에 억지로 구겨 넣듯 1차원적인 형태의 모방에 그쳤다면, 치퍼필드의 접근은 달랐다. 그는 둥근 도자기의 형태를 베끼는 대신, 달항아리가 가진 '비례의 안정감'과 그 안에 담긴 '비움의 미학'이라는 본질만을 섬세하게 추출하여 이 거대한 현대적 큐브 속에 이식했다.
그 본질적인 태도는 건물의 피부, 즉 파사드(Facade)에서 가장 먼저 드러난다. 건물의 외관을 감싸고 있는 것은 매끄럽고 차가운 유리가 아니라, 수만 개의 수직 알루미늄 핀(Fin)들이다. 이 무광의 백색 루버들은 획일적인 평면이 아니라 크기와 배열을 미세하게 달리하며 건물 전체를 덮고 있다. 태양의 궤적과 날씨에 따라 빛을 머금고 산란시키는 이 섬세한 피부는, 마치 가마에서 갓 구워낸 도자기의 표면처럼 시간마다 깊고 풍부한 질감을 만들어낸다. 주변의 거대한 랜드마크들이 햇빛을 날카롭게 반사하며 시각적인 폭력을 행사할 때, 이 건물은 빛을 부드럽게 흡수하며 용산의 복잡한 풍경 속으로 은은하게 스며드는 거대한 여백이 된다.
하지만 이 건축물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진정한 도발과 위대함은, 절제된 외관이 아니라 덩어리 내부를 과감하게 도려낸 '비워낸 공간(Void)'에 있다. 용산이라는 황금 같은 땅 위에 세워진 이 거대한 큐브의 중간중간에는, 마치 누군가 거대한 숟가락으로 건물 허리를 파낸 듯한 3개의 거대한 구멍, 즉 '루프 가든(Roof Garden)'이 존재한다. 한 층의 바닥 면적을 최대한 넓게 뽑아내어 임대 수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지상 과제인 한국의 척박한 부동산 생태계에서, 치퍼필드는 건물 내부의 심장부 수천 평을 과감하게 허공으로 비워버렸다.
그는 꽉 막힌 콘크리트 상자 속에서 하루 종일 형광등 불빛에 의존해야 하는 고층 빌딩의 숙명을 거부했다. 비워낸 거대한 구멍에는 흙을 덮고 단풍나무를 심었으며, 수면에 물을 채웠다. 덕분에 거대한 건물 깊숙한 곳까지 자연 채광이 스며들고, 20층 높이의 공중에서도 직원들은 창문을 열어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도시의 바람과 호흡할 수 있게 되었다. 이윤을 위해 층층이 면적을 쌓아 올리는 탐욕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사람의 숨통을 트여주는 자연을 채워 넣은 것이다. 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 허공으로 날려버린 이 막대한 '여백'의 가치는, 청담동 거리를 수놓은 그 어떤 명품관의 장식보다도 호화롭고 낭만적인 건축적 결단이다.
나아가 이 자본의 성채는 스스로의 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도시를 향해 두 팔을 벌린다. 건물의 1층, 거대한 아트리움(Atrium)은 출입증을 목에 건 직원들만의 폐쇄적인 로비가 아니다. 지하철역에서부터 외부의 보행로까지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오는 도시의 광장이자, 시민 누구나 머물 수 있는 거대한 실내 거실이다.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된 장엄한 1층의 빈 공간을 거닐며 미술관의 전시를 관람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시민들의 모습은 대기업의 사옥이 도시와 어떻게 건강하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사적인 자본이 쌓아 올린 철저한 사유지임에도 불구하고, 1층의 문턱을 없애고 큐브의 허리를 비워냄으로써 도시의 공공성을 환원하는 성숙한 태도. 결국 아모레퍼시픽 본사는 겉보기에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공간이 사람을 존중하고 도시와 소통하는 법을 가장 우아하게 실천하고 있는 건축이다.
우리는 이 육중하고도 담담한 달항아리 앞에서 씁쓸한 현실과 일말의 희망을 동시에 목도한다. 막대한 자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런 낭만적인 비움조차 시도하기 힘든 한국 건축의 척박한 현실을 뼈아프게 자각함과 동시에, 진정한 거장의 손길이 닿았을 때 돈으로 환산되는 '부동산'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을 다독이는 고결한 '문화'로 탈바꿈할 수 있는지 그 경이로운 증거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폭력적인 수직의 욕망을 버리고 묵묵히 도시의 배경이 되기를 자처한 이 거대한 백색의 큐브는, 시간이 만든 공간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우리에게 진정한 건축의 품격이 무엇인지 묵직한 침묵으로 답하고 있다.
제주의 수면 위에 고요히 떠 있던 방주교회의 서정부터, 원주 산자락에서 마주한 노출 콘크리트의 서늘한 충격, 파주의 하늘을 담아내던 유려한 백색의 곡선과 화성 계곡에 쌓아 올린 붉은 벽돌의 숭고함, 그리고 강릉 앞바다를 향해 활짝 열려 있던 눈부신 해방감까지.
자연의 품을 떠나 도심으로 들어와 마주한 낯선 은빛 우주선의 역동성과 청담동의 소음을 삼켜버린 단단한 콘크리트 쐐기, 수직적 탐욕을 묻어버리고 대지의 계곡이 된 캠퍼스, 자본의 거리 위에서 춤추던 매혹적이고도 씁쓸한 유리 파사드를 거쳐, 마침내 스스로를 비워내어 도시를 품은 이 거대한 백색의 큐브에 이르기까지.
한국이라는 땅 위에 세계적인 거장들이 남긴 이 열 개의 궤적은 우리에게 하나의 분명한 진실을 이야기한다. 건축은 평당 단가와 용적률로 매겨지는 단순한 '부동산'이나 기능적인 껍데기가 아니라, 그 시대의 철학과 자본, 그리고 인간의 감정을 켜켜이 엮어낸 거대한 '문화'라는 사실이다.
동일한 거장의 손길을 거쳤음에도 어떤 건물은 대지를 포용하는 따뜻한 위로가 되고, 어떤 건물은 얄팍한 자본의 장식품으로 전락하며, 또 어떤 건물은 일상에 날 선 질문을 던지는 도발적인 예술이 된다. 바라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딛고 선 땅의 맥락에 따라, 심지어 그 공간을 방문한 날의 날씨와 쏟아지는 빛의 각도에 따라 건축은 끊임없이 다르게 읽힌다.
공간을 감상하는 데 단 하나의 완벽한 정답은 없다. 다만 우리가 매일 스쳐 지나가는 이 도시와 풍경 속에 이토록 다채롭고 매력적인 입체적 텍스트들이 숨 쉬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기꺼이 시간을 내어 이 공간들을 직접 거닐고, 벽면의 질감을 만져보며, 나만의 시선으로 사유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