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과 균형 사이
기획예산팀 이태준 주임은 눈이 뚫어져라 예산 엑셀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모니터 하단에 메신저 알림이 반짝였다. 그는 곧바로 메신저 창을 띄웠다. 인재육성팀의 최수연 주임이 총무팀의 김승우 주임과 자신을 대화방에 초대하며 메시지를 남겼다.
최수연: "두 분, 지금 바쁘세요? 잠깐 대화방 초대했어요!"
김승우: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급작스레 초대합니까?ㅋㅋ"
최수연: "아니, 태준님 오늘도 야근한다는 소문이 있어서요. 이게 말이 돼요? 요즘 시대에?"
이태준: "하하, 소문이라니요. 그냥 일이 좀 있어서요. 보고자료 준비해야 해서 정시에 못 끝날 것 같아요."
김승우: "헐, 진짜요? 무슨 보고서길래 그렇게 바쁜 건가요?"
최수연: "아니, 일이야 내일 하면 되는 거잖아요. 퇴근은 정시에 해야지."
김승우: "맞아요! 수연님 말이 딱 맞네요. 회사는 우리가 야근한다고 더 잘 돌아가는 것도 아닌데. 칼퇴가 기본 아닙니까?"
이태준: "여러분은 정말 멋지네요. 워라밸 잘 지키시고. 근데 기획예산팀은 일이 많아서 쉽지 않아요."
최수연: "그런 눈치 게임이 진짜 싫어요. 태준님, 너무 착한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자꾸 일을 몰아주는 거죠. 가끔은 단호하게 퇴근하셔야 해요."
김승우: "맞아요. 저도 초반에는 선배들 눈치 때문에 고민했는데, 이제는 눈치 안 보고 정시에 칼같이 나갑니다. 시간이 지나니까 오히려 뭐라 안 하더라고요."
최수연: "그게 정답이죠. 눈치 볼 거 없이 우리도 우리 삶을 챙겨야죠. 태준님도 곧 따라 나오실 거죠?"
이태준: "하긴, 승우님이 그런 성격이긴 하죠. 근데 우리 팀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라... 선배들이 늦게까지 일하고 있는데 저 혼자 나가기가 좀 그래요."
김승우: "흠... 선배들 눈치는 좀 그렇긴 하죠. 근데 우리가 이 회사 오래 다니려면 그런 문화도 바꿔야 되는 거 아니겠어요?"
최수연: "맞아요! 요즘 같은 시대에 눈치 보면서 야근하는 건 말도 안 돼요."
김승우: "MZ세대의 혁명을 기대해 보죠. 우리끼리라도 단단히 뭉쳐야 합니다."
최수연: "승우님, 우리끼리 먼저 가요. 그럼 수고요~"
김승우: "칼퇴!"
이태준은 메신저 창을 닫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김승우와 최수연의 메시지는 보이지 않았고, 이내 메신저에서 연결이 끊어졌다. 이태준은 동기들이 정시에 퇴근하는 걸 보고 있자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자신의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서류들이 야속하기만 했다.
이때 차경민 팀장이 자료를 검토하다가 슬며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이 주임, 아직 안 갔어?"
"아직 보고서 마무리를 못 해서요..." 이태준이 말끝을 흐렸다.
차경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우리 때는 말이야, 6시가 되면 저녁을 뭘 먹을까 고민했지. 칼퇴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고. 일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어. 요즘 친구들 보면 참 신기해. 정시에 딱 맞춰 가버리니까."
이태준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 그러게요."
차경민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주임은 알아서 해. 뭐라고 안 할 테니까. 근데 요즘 우리도 세대 차이 때문에 고민이 많아. 특히 MZ세대 친구들이 정시에 가버리면, 선배들 입장에서는 좀 억울한 기분이 들 때가 있거든."
이태준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옆에 있던 박성우 차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사실 저도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예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잖아요. 요즘 친구들은 그런 면에서 확실히 달라요."
송하은 대리가 말을 받았다. "그렇긴 한데, 요즘 사회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잖아요. 점점 정시 퇴근이 당연한 걸로 여겨지고, 워라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특히 MZ세대는 취업할 때도 그런 부분을 중요하게 본다고요."
"이 주임님 동기분들은 정시에 퇴근한다면서요? 우리 팀만 이렇게 바쁜 건가 싶기도 하고, 부럽기도 해요. 저도 퇴근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눈치가 보이더라고요. 선배들은 다 일하고 있는데 저 혼자 나가기가..."
차경민이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물론 요즘 세대가 나쁜 건 아니야. 자기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건 정말 좋은데, 우리 때는 그런 생각조차 못 했거든. 회사가 곧 삶이었으니까. 그래서 요즘 세대를 보면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어."
박성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습니다, 팀장님. 저도 그때는 6시 되면 뭐 먹을지 생각하곤 했죠. 그런데 지금은 정시에 퇴근하는 친구들 보면 한편으론 부럽고, 한편으론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습니다."
이태준은 대화에 끼어들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속으로는 '정시에 퇴근하는 동기들 얘기를 하면 내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팀 내 분위기와 선배들의 시선이 그의 어깨를 더 무겁게 짓눌렀다.
그는 말없이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며 보고서 작업을 이어갔다. '다른 팀 동기들처럼 정시에 퇴근하는 건 정말 불가능한 걸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기획예산팀의 직원들은 그렇게 한참을 더 각자의 모니터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었다. 시간이 밤 9시를 훌쩍 넘겨서야 차경민 팀장과 박성우 차장은 사무실을 나와 흡연장으로 향했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지만, 두 사람은 여유롭게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박 차장, 요즘 젊은 친구들 보면 정말 이해하기 어렵더라고. 자기들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는 건 알겠는데, 우리 때와는 너무 다르니 적응이 안돼."
"저도 그렇습니다, 팀장님. 요즘 애들 보면 대단하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점도 있지만, 때론 좀 지나치다 싶어요."
차경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멀리 사무실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러게 말이야. 나도 예전에 그렇게 일찍 퇴근해서 내 삶을 즐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어.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말이야. 참 그래."
"맞습니다. 그렇다고 요즘 친구들에게 강요할 수도 없고, 난처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팀이 바쁠 때는 같이 좀 고생해줬으면 하는 게 솔직한 마음이에요. 그래도 이 주임이 우리 팀에 있어서 다행이에요"
사무실에 홀로 남겨진 이태준은 여전히 책상 앞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사무실은 이제 적막 그 자체였다. 공기의 무게마저 무겁게 느껴지며, 자신이 두드리는 키보드 소리만이 적막한 사무실을 메웠다.
이태준은 고개를 들어 텅 빈 사무실을 바라보았다. ‘왜 나만 남았을까? 다른 팀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게 퇴근할 수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의 눈에 피로가 쌓여가며 글자들이 흐릿해졌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지금 이걸 끝내지 않으면, 내일은 또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라.’
한편으로는 억울함이 밀려들었다. ‘나도 정시에 퇴근하고 싶다. 하지만 이 팀에선 그게 통하지 않아.’ 그의 손은 키보드 위에서 멈칫거렸고,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이태준의 마음속에는 동료들에 대한 부러움과 자신에 대한 질책이 뒤엉켜 있었다.
잠시 후 차경민이 사무실로 들어오면서 이태준에게 말을 건넸다. "이 주임, 아직도 하고 있는 거야?" 차경민은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아무래도 내가 먼저 나가야겠네. 이 주임도 적당히 마무리하고 너무 늦지 않게 들어가라. 여기서 밤새울 필요는 없잖아."
박성우도 서류를 정리하며 가방을 챙겼다. "이 주임, 너무 부담 갖지 마. 오늘 못 끝내면 내일 하면 되잖아." 그는 이태준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나갈 때 사무실 불 끄는 거 잊지 말고."
차경민과 박성우가 사무실을 떠나며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이태준은 깊은 한숨을 쉬며 텅 빈 공간에 홀로 남게 되었다. 이태준은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했다. "네, 팀장님. 금방 끝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