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붉은 장벽

깨어진 마도로스의 꿈

by 최경열

유럽 최대의 자동차 항구, 독일 브레머하펜(Bremerhaven)에서 6,500대의 자동차를 모두 내려놓던 날, 나는 내 인생의 무거운 짐도 함께 내려놓았다고 믿었다. 링링에게 했던 "더 이상 기다리게 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내 생애 가장 뜨거운 맹세였고, 1등 기관사로서의 화려한 경력을 뒤로한 채 나는 미련 없이 울산항에서 보따리를 쌌다.

하지만 고향 변산반도에 도착해 마주한 차가운 공기는 내가 기억하던 포근한 고향의 바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앞으로 닥쳐올 거대한 비극을 암시하는 서늘한 전조였다.

1. 보이지 않는 창살, 출국금지

배를 타며 모은 결혼 자금은 넉넉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마음은 딴 곳에 있었다. 이미 부안 읍내 터미널 다방에는 어머니가 점찍어둔 '참한 규수'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부모님의 성화를 못 이겨 나간 맞선 자리, 나는 일부러 머리도 감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내 머릿속은 온통 링링뿐이었기에, 그 어떤 절세미인이 와도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어머니의 속은 타들어 갔지만, 내 결심은 확고했다.

Gemini_Generated_Image_j2igdnj2igdnj2ig (1).png 시골 터미널 다방 맞선 장면 <제미나이 이미지 설명>

나는 곧장 서울로 상경해 대사관과 변호사 사무실을 누비며 왕링링과의 결혼 수속을 시작했다. 여권, 호구부, 초청장, 신원보증서... 80년대 말, 아직 북방외교의 온기가 돌기 전인 냉전의 끝자락에서 국제결혼의 벽은 높고도 험했다. 특히나 상대가 '중공(중국)' 사람이라는 점은 말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의 문턱을 넘어야 함을 의미했다.

한 달 뒤, 청천벽력 같은 호출이 떨어졌다. 남산의 안기부 청사.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그곳의 지하실은 살기가 감돌았다. 조사관은 두꺼운 서류 뭉치를 내던지며 물었다.

Gemini_Generated_Image_cdmn7pcdmn7pcdmn.png 안기부에서 취조를 받고 있다 <제미나이 이미지 설명>

"자네, 링링이라는 여자 할아버지가 누군지나 알고 만난 건가?"

링링의 할아버지, 왕창린(王昌林). 6.25 전쟁 당시 인해전술로 한국군을 밀어붙였던 중공군 장교이자 훈장까지 받은 인물. 변산반도 시골뜨기 선원이 감당하기엔 '이데올로기의 벽'은 너무도 거대했다. 링링의 아버지 왕성쥔(王圣钧) 역시 공산당 간부 출신이었다. 공산당 간부출신으로 상해에서 무역업을 하시다가 싱가포르로 이민을 선택하신 화교출신이었다.

간첩 취급을 받으며 이어진 수차례의 조사 끝에 내게 내려진 판결은 '출국금지'였다. 사랑했던 여자의 순수한 눈망울은 국가 보안의 이름 아래 '포섭의 도구'로 난도질당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차마 링링에게 이 사실을 다 말하지 못한 채,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써 내려갔다.

[링링에게 보내는 편지]

나의 사랑하는 링링에게,

링링, 지금쯤이면 싱가포르의 붉은 노을을 보며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독일 브레머하펜 항구에서 너에게 했던 약속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어. 배에서 내려 고향 땅을 밟으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릴 줄만 알았는데, 우리 앞에 놓인 바다가 생각보다 훨씬 깊고 험하네.

지금 당장은 너에게 달려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사정이 생겼어. 행정적인 절차가 조금 복잡해져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내가 누구니, 거친 파도를 헤치고 울산 1호를 몰던 1등 기관사 아니니. 이까짓 육지의 파도쯤은 반드시 이겨내고 너에게 갈 거야.

링링, 조금만 더 나를 믿고 기다려줘. 내 마음속의 나침반은 언제나 너라는 항구를 향해 고정되어 있어. 우리가 채석강에서 보았던 그 아름다운 석양 아래 다시 함께 서는 날, 그때는 영원히 네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시 한번 맹세할게.

세상의 그 어떤 장벽도 우리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을 거야. 조만간 기쁜 소식을 들고 네게 갈게. 사랑한다, 링링. 나의 전부인 당신을.

Gemini_Generated_Image_k1sztjk1sztjk1sz.png 링링에게 보내는 손편지 <제미나이 이미지 설명>

2. 안재형과 자오즈민, 그리고 나의 비극

1988년 무렵, 온 세상은 탁구 스타 안재형과 자오즈민의 열애설로 떠들썩했다. 그들은 정부의 비공식 지원을 받으며 '핑퐁 외교'의 상징으로 화려한 결실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안재형이 아니었다.

그는 국위선양을 하는 국가대표였고, 나는 변산반도 시골 출신의 일등 기관사일 뿐이었다. 안재형에게는 노태우 대통령의 관심이 쏟아졌지만, 내게는 안기부의 차가운 취조실이 주어졌다. 자오즈민이 김포공항에서 언론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국빈 대우를 받을 때, 나의 링링은 입국하는 순간 간첩으로 몰릴 처지였다. 극과 극의 사랑 이야기. 국가가 허락한 사랑과 국가가 금지한 사랑의 비참한 대비였다.

3. 알코올의 바다에 침몰하다

선원수첩은 박탈되었고 여권은 종이 쪼가리가 되었다. 배를 타야만 살 수 있는 마도로스에게 바다를 뺏는 것은 사형 선고였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푸른 바다가 아니라 방구석에 뒹구는 빈 소주병이었다. 나는 서서히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Gemini_Generated_Image_x5ngsyx5ngsyx5ng.png 나는 서서히 알콜 중독자가 되었다 <제미나이 이미지 설명>

"내 아들아, 정신 좀 차려라! 스물아홉 아홉수가 무섭다더니, 멀쩡하던 놈이 왜 이리되었냐..."

어머니의 통곡이 마당까지 번졌다. 아들의 출국금지 소식에 가슴을 치던 어머니는 매일 술로 밤을 지새우는 나를 보며 사지가 타 들어가는 고통을 겪으셨다.

4. 석양보다 붉은 절망

취기가 오르면 나는 변산 채석강으로 향했다. 링링과 함께 걸었던 그 눈 덮인 바닷가. 그때의 석양은 우리 앞날을 축복하는 황금빛이라 믿었건만, 지금 내 눈앞의 석양은 피를 토해낸 듯 붉고 시렸다.

Gemini_Generated_Image_89j1lg89j1lg89j1.png 석양보다 붉은 절망 <제미나이 이미지 설명>

"링링, 나는 이제 바다로 갈 수도, 너에게 갈 수도 없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저물 때마다 내 영혼의 한 조각도 함께 침몰했다. 6,500대의 자동차를 실어 나르던 거대한 울산 1호의 기관실보다 더 뜨겁고 고통스러운 화마(火魔)가 내 가슴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출국금지라는 족쇄에 묶인 채, 나는 그렇게 서서히 알코올의 바다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사랑이 죄가 되고, 가족의 이력이 흉기가 되던 야만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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