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채석강의 비명
어머니의 통곡 소리는 썰물처럼 빠져나가지 않고 내 귓가에 흉터처럼 남았다. 매일 술에 절어 폐인이 된 아들의 모습을 어머니께 보여드리는 것은 자식으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 결국 보따리를 싸서 집을 나섰다. 발길이 닿은 곳은 링링과 함께 걸었던, 우리 사랑의 성지이자 이제는 지옥이 되어버었다.
친구 남열이가 운영하는 언덕 위 카페는 1년 전 링링과 왔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그 근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쓰러져가는 슬레이트 집 한 칸을 빌렸다. 블록 담벼락은 매서운 바닷바람에 반절이 날아갔지만, 채석강의 명물인 후박나무만은 꼿꼿이 버티고 있었다. 마당에서 그물을 꿰매던 주인 정 씨 아저씨는 투박하지만 정이 넘쳤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폐가였다. 6,500대의 자동차를 호령하던 1등 기관사의 자부심은 소주병과 함께 방구석을 뒹굴었다.
동네 점빵에서 라면 한 박스를 샀다. 문득 원목선을 타던 시절, 보르네오 섬에서 라면 한 박스와 맞바꿨던 원주민의 독한 술이 생각났다. 그때는 젊음의 객기였지만, 지금 내게 라면은 끼니가 아니라 독한 소주를 넘기기 위한 최소한의 거름망일 뿐이었다.
시큼한 김치를 넣은 라면 한 그릇에 소주 한 병. 아침, 점심, 저녁의 경계가 사라졌다. 취기가 오르면 위도가 보이는 낭떠러지에 서서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술기운에 일렁이는 바다는 마치 나를 부르는 거대한 무덤 같았고, 파도 소리는 "이제 그만 쉬라"는 속삭임으로 들려왔다.
호주머니를 뒤졌다. 안기부의 조사 독촉장, 무용지물이 된 결혼 신청서, 이제는 종이 쪼가리가 된 해기사 면허증과 여권... 그리고 링링의 사진.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갈기갈기 찢었다. 찢겨진 조각들은 채석강의 거친 바람을 타고 허공을 휘저었다. 저 바람을 타고 위도를 지나 싱가포르까지 날아가기를, 내 찢겨진 꿈과 사랑이 그곳에 닿기를 바랐다. 마도로스의 긍지도, 미래도 그렇게 산산조각 났다.
나는 링링이 선물한 파카 만년필을 쥐었다.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을 고백하는 도구가 아니라, 내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칼날이었다.
[유서: 링링, 그리고 나의 어머니께]
링링, 내 답장이 없어도 기다리지 마. 내가 이 세상에 계속 존재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어쩌면 우린 저세상에서나 만날 팔자인가 봐. 이 무게를 견디지 못한 못난 나를 부디 용서해 줘.
어머니, 자나 깨나 아들 걱정뿐이셨던 나의 어머니. 이 불효자를 부디 잊으시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셔야 합니다. 정말 죄송하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할머니... 바다에 나가지 말라던 할머니의 점괘를 어긴 제 잘못입니다. 어른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객기가 눈을 가려 결국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갑니다.
신고 있던 검정 고무신을 가지런히 포개어 그 속에 유서를 밀어 넣었다. 남은 소주를 단숨에 들이키고, 나는 아무 미련 없이 시커먼 심연 속으로 몸을 던졌다. 차가운 바다가 나를 집어삼키는 순간, 모든 기억이 암전 되었다.
눈을 떴을 때, 비릿한 바다 냄새 대신 코끝을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느껴졌다. 옆에는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친구 남열이가 앉아 있었다.
저녁이 되어도 내가 보이지 않자, 불안한 예감에 아지트를 찾았던 남열이는 절벽 끝 고무신과 유서를 보고 바다를 샅샅이 뒤졌다고 했다. 파도에 휩쓸려 바위틈에 걸려 있던 나를 발견한 남열이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나를 업고 뛰었다. 그는 자신의 **5톤 도락구(트럭)**를 미친 듯이 운전해 부안 혜성병원까지 달려왔다. 죽음의 문턱에서 나를 건져 올린 것은 친구의 투박한 손과 낡은 트럭 엔진 소리였다.
정신을 차린 내게 남열이가 떨리는 손으로 편지 한 통을 건넸다. 싱가포르에서 온, 링링의 답장이었다.
오빠, 보내준 편지 가슴에 품고 한참을 울었어. 독일 브레머하펜 마지막 항구에서 보내온 "다시는 혼자 두지 않겠다"던 그 약속, 나는 한순간도 잊은 적 없어. 그런데 우리 앞의 바다는 왜 이토록 깊고 험할까.
나 오늘 싱가포르 한국 대사관에 다녀왔어. 사람들 눈빛이 너무 차가워서 무서웠어. 내가 사랑하는 오빠의 나라 사람들이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서류 한 장 때문에 우리가 왜 죄인처럼 고개를 숙여야 하는 걸까? 이제 나, 오빠가 있는 한국에 갈 수 없대. '블랙리스트'라는 무서운 이름 아래 내 이름이 올랐대.
오빠, 들었어? 오빠네 나라 안재형 선수랑 자오즈민 선수는 온 국민의 축복을 받으며 사랑하고 있다며. 그들 앞의 벽보다 우리 벽이 훨씬 높겠지만, 오빠... 나 절대 포기 안 할 거야. 오빠가 울산 1호의 엔진을 지키던 용감한 1등 기관사였던 것처럼, 나도 우리 사랑을 지킬게.
제발 술로 몸 버리지 마. 오빠가 무너지면 싱가포르에서 오빠만 기다리는 내 세상도 통째로 무너지는 거야. 오빠는 내 인생의 유일한 등대야. 오빠가 빛을 잃으면 나는 길을 잃어버려. 우리 다시 만날 그날까지 꼭 건강해야 해.
내가 차가운 바다에 몸을 던지던 그 시각, 링링은 나를 살리기 위해 기도를 하고 편지를 쓰고 있었다. 내가 죽으려 했던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나의 생존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 돌아온 그날, 변산반도의 새벽 공기는 유난히도 차고 맑았다. 나는 깨진 조각들을 이어 붙인 채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제 링링의 편지에 답장할 이유도, 용기도, 의무도 내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이미 한 번 죽은 목숨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