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찢겨진 돛

그리고 채석강의 비명

by 최경열

어머니의 통곡 소리는 썰물처럼 빠져나가지 않고 내 귓가에 흉터처럼 남았다. 매일 술에 절어 폐인이 된 아들의 모습을 어머니께 보여드리는 것은 자식으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 결국 보따리를 싸서 집을 나섰다. 발길이 닿은 곳은 링링과 함께 걸었던, 우리 사랑의 성지이자 이제는 지옥이 되어버었다.

친구 남열이가 운영하는 언덕 위 카페는 1년 전 링링과 왔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그 근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쓰러져가는 슬레이트 집 한 칸을 빌렸다. 블록 담벼락은 매서운 바닷바람에 반절이 날아갔지만, 채석강의 명물인 후박나무만은 꼿꼿이 버티고 있었다. 마당에서 그물을 꿰매던 주인 정 씨 아저씨는 투박하지만 정이 넘쳤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폐가였다. 6,500대의 자동차를 호령하던 1등 기관사의 자부심은 소주병과 함께 방구석을 뒹굴었다.

Gemini_Generated_Image_kol2j8kol2j8kol2.png 집을 피해서 임시 거처 했던 채석강 언덕 위의 집

1. 라면 한 박스와 소주 한 병, 침몰하는 영혼

동네 점빵에서 라면 한 박스를 샀다. 문득 원목선을 타던 시절, 보르네오 섬에서 라면 한 박스와 맞바꿨던 원주민의 독한 술이 생각났다. 그때는 젊음의 객기였지만, 지금 내게 라면은 끼니가 아니라 독한 소주를 넘기기 위한 최소한의 거름망일 뿐이었다.

시큼한 김치를 넣은 라면 한 그릇에 소주 한 병. 아침, 점심, 저녁의 경계가 사라졌다. 취기가 오르면 위도가 보이는 낭떠러지에 서서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술기운에 일렁이는 바다는 마치 나를 부르는 거대한 무덤 같았고, 파도 소리는 "이제 그만 쉬라"는 속삭임으로 들려왔다.

2. 바람에 날려 보낸 마도로스의 꿈

호주머니를 뒤졌다. 안기부의 조사 독촉장, 무용지물이 된 결혼 신청서, 이제는 종이 쪼가리가 된 해기사 면허증과 여권... 그리고 링링의 사진.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갈기갈기 찢었다. 찢겨진 조각들은 채석강의 거친 바람을 타고 허공을 휘저었다. 저 바람을 타고 위도를 지나 싱가포르까지 날아가기를, 내 찢겨진 꿈과 사랑이 그곳에 닿기를 바랐다. 마도로스의 긍지도, 미래도 그렇게 산산조각 났다.

나는 링링이 선물한 파카 만년필을 쥐었다.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을 고백하는 도구가 아니라, 내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칼날이었다.

Gemini_Generated_Image_5v50uf5v50uf5v50.png 채석강 낭떠러지에서


[유서: 링링, 그리고 나의 어머니께]

링링, 내 답장이 없어도 기다리지 마. 내가 이 세상에 계속 존재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어쩌면 우린 저세상에서나 만날 팔자인가 봐. 이 무게를 견디지 못한 못난 나를 부디 용서해 줘.


어머니, 자나 깨나 아들 걱정뿐이셨던 나의 어머니. 이 불효자를 부디 잊으시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셔야 합니다. 정말 죄송하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할머니... 바다에 나가지 말라던 할머니의 점괘를 어긴 제 잘못입니다. 어른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객기가 눈을 가려 결국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갑니다.

신고 있던 검정 고무신을 가지런히 포개어 그 속에 유서를 밀어 넣었다. 남은 소주를 단숨에 들이키고, 나는 아무 미련 없이 시커먼 심연 속으로 몸을 던졌다. 차가운 바다가 나를 집어삼키는 순간, 모든 기억이 암전 되었다.

3. 5톤 도락구(Truck)에 실려 온 천운

눈을 떴을 때, 비릿한 바다 냄새 대신 코끝을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느껴졌다. 옆에는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친구 남열이가 앉아 있었다.

저녁이 되어도 내가 보이지 않자, 불안한 예감에 아지트를 찾았던 남열이는 절벽 끝 고무신과 유서를 보고 바다를 샅샅이 뒤졌다고 했다. 파도에 휩쓸려 바위틈에 걸려 있던 나를 발견한 남열이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나를 업고 뛰었다. 그는 자신의 **5톤 도락구(트럭)**를 미친 듯이 운전해 부안 혜성병원까지 달려왔다. 죽음의 문턱에서 나를 건져 올린 것은 친구의 투박한 손과 낡은 트럭 엔진 소리였다.

정신을 차린 내게 남열이가 떨리는 손으로 편지 한 통을 건넸다. 싱가포르에서 온, 링링의 답장이었다.

Gemini_Generated_Image_dooncdooncdooncd.png 혜성병원에서

[링링의 편지: 오빠는 나의 등대야]

오빠, 보내준 편지 가슴에 품고 한참을 울었어. 독일 브레머하펜 마지막 항구에서 보내온 "다시는 혼자 두지 않겠다"던 그 약속, 나는 한순간도 잊은 적 없어. 그런데 우리 앞의 바다는 왜 이토록 깊고 험할까.

나 오늘 싱가포르 한국 대사관에 다녀왔어. 사람들 눈빛이 너무 차가워서 무서웠어. 내가 사랑하는 오빠의 나라 사람들이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서류 한 장 때문에 우리가 왜 죄인처럼 고개를 숙여야 하는 걸까? 이제 나, 오빠가 있는 한국에 갈 수 없대. '블랙리스트'라는 무서운 이름 아래 내 이름이 올랐대.

오빠, 들었어? 오빠네 나라 안재형 선수랑 자오즈민 선수는 온 국민의 축복을 받으며 사랑하고 있다며. 그들 앞의 벽보다 우리 벽이 훨씬 높겠지만, 오빠... 나 절대 포기 안 할 거야. 오빠가 울산 1호의 엔진을 지키던 용감한 1등 기관사였던 것처럼, 나도 우리 사랑을 지킬게.

제발 술로 몸 버리지 마. 오빠가 무너지면 싱가포르에서 오빠만 기다리는 내 세상도 통째로 무너지는 거야. 오빠는 내 인생의 유일한 등대야. 오빠가 빛을 잃으면 나는 길을 잃어버려. 우리 다시 만날 그날까지 꼭 건강해야 해.

Gemini_Generated_Image_1hlmlu1hlmlu1hlm.png 링링의 편지

내가 차가운 바다에 몸을 던지던 그 시각, 링링은 나를 살리기 위해 기도를 하고 편지를 쓰고 있었다. 내가 죽으려 했던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나의 생존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 돌아온 그날, 변산반도의 새벽 공기는 유난히도 차고 맑았다. 나는 깨진 조각들을 이어 붙인 채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제 링링의 편지에 답장할 이유도, 용기도, 의무도 내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이미 한 번 죽은 목숨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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