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L233. 당근 탕진 스토리

Souvenir from Carrot

by Mira



1. 당근에서 탕진 중



이번 달에만 당근에서 800만 원을 썼다.

정말 내가 미쳤나 싶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냥 두기로 했다.

외국 여행 한 번 다녀온 셈 치기로.


고양이 간식부터

눈여겨보던 부엌살림, 식물, 향초,

그리고 이솝과 산타마리아 노벨라 화장품까지.


감각을 자극하는 비싸고 좋은 브랜드만 골라 담았다.

그동안 긴축재정으로 억누른 감각의 욕망이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다.


르쿠르제 주물 냄비에 올리브오일을 두르고 토마토를 굽는다.

페페론치노로 살짝 매콤한 맛을 추가하고.

바삭하게 구운 토스트에 얹어 오픈 샌드위치를 바샤 커피와 함께 먹는 아침.

미슐랭 식당이 부럽지 않은 맛집이

우리 집 식탁에서 펼쳐진다.



이제 싸구려 코팅 프라이팬은 바이바이~




2. 부끄러운 흑역사



긴축재정에 집중할 때,

이솝과 산타마리아 노벨라 화장품이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1년에 한 개 사서 아껴 쓰면 욕망을 억눌렀다.


한 번은 후배가 다 쓴 이솝 핸드크림을 버리길래

쓰레기통에서 그걸 주워왔다.

컬러와 용기의 그립감을 혼자 조용히 느껴보았다.


이 브랜드가 가진 철학과 매장 인테리어를 보면 나는 존경심이 생긴다.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지키면서 변화와 다양한 시도를 멋지게 해내는 브랜드.

그 제품을 소유하면 나도 그런 철학 위에 삶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은 로망이 생긴다.





3. 감각이 돌아오는 기분


퇴직이 확정되니,

내 안의 억눌린 감각이 다시 깨어나는 걸 느낀다.


우드 톤, 브라운 글라스, 미니멀한 라벨.

이솝의 세계를 집 안에 구현하는 일은

요즘 나를 가장 설레게 하는 작업이다.


아침마다 마시는 바샤 커피.

향과 질감만으로 하루의 중심을 잡아준다.

어떤 커피에서도 맡아보지 못한 꽃향기와 초콜릿 향.

위로하는 듯한 부드러운 질감.


이런 감각적 만족에 얼마나 굶주려 있었는지.




4. 나는 디자이너였구나


회사에서 디자인을 한다는 건

결국 타인의 요구를 반영하는 일이었다.

브랜드의 니즈, 리더의 컨펌과 취향.



정작 디자이너인 나의 콘셉트와 감각은

무용했다.


나의 감각과 생각을 반영하지 못하고 반복되는 업무는 나를 소진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퇴직자가 된 지금이 오히려 더 ‘디자이너 같은 삶’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집 안에서 내 방식으로 실현해 본다.


클라이언트도 나고, 에이전시도 나.

프로세스 전체가 내 세계다.


가끔 스케일을 잘못 맞추기도 하고

톤이 어긋나기도 한다.

그러나 결과가 마음에 맞아떨어지는 순간

깊은 만족감이 든다.



나는 디자이너였구나.

누구의 컨펌도 필요 없다.

나의 일상과 공간을 나만을 위해 디자인한다.




5. 감각적 욕망


인간의 욕망에는

생활에 필수적인 것 외에도 감각적인 욕망이 있다.


아름다운 것, 생명이 있는 것,

그저 곁에 두기만 해도 좋은 것들.


나는 집과 병원을 오가는 단순한 생활을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옷이나 입을 수 없다.

편한 맨투맨을 색깔별로 구비해 두고

아침에 끌리는 색을 입는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을

대충 하고 싶지 않다.


컬러에서 얻는 에너지는 나의 하루를 생기 있게 한다.

나의 일상은

이런 소소한 감각들로 리듬 있게 움직인다.


물론 돈이 꽤 많이 든다.

이제는 긴축재정모드 해제




6. 언리미티드 예산



긴축재정의 시절에는

이런 소비를 철저히 경계했다.


그래서 지금의 탕진이

우습고, 조금 어이없다.

억눌렀던 욕망이 이렇게까지 분출될 줄이야.


갖고 싶은 것에 ‘언리미티드’로 소비해 보는 경험을

이제는 허락한다.




7. 향초과 꽃들


우울증이 극심했을 때는

침대에서 나오는 일조차 버거웠다.


하루가 이불속에서 시작해

이불속에서 끝났다.


그런 내가 요즘은

당근 거래하러 전철로 10분 거리쯤은 씩씩하게 다녀온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예쁜 ‘나의 물건’을 만나러 가는 길이

설레는 산책이 된다.


이게 무슨 회복 지표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움직인다.


새로 사 온 향초를 켜는 순간

나는 확실히 행복을 느낀다.


꽃을 정리하고 물을 갈아주고

다듬는 시간도 행복한 의식이 된다.




8. 소비의 추억


나는 지금

불필요한 소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회복시키고,

취향을 복구하고,

흩어진 정체성을 다시 조립하고 있다.


이 탕진적 소비는

전환기의 의식과도 같다.


이 탕진템은

그동안의 긴축재정을 통해 얻은

나의 성취를 자축하는 수브니에


이 시기가 지나, 당근 할 기운도 없는 할머니가 되면

지금 산 물건들을 보면서

혼자 빙긋 웃겠지.



즐기자.

이 순간의 감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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