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판타지 오브 머니

캔디와 부자 빌런의 랩소디

by Mira

투자를 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

대중문화 속에서 부자가 묘사되는 방식은 늘 일정한 패턴을 따른다.


소설과 영화 속 부자는 악덕업자다.

무차별적 개발을 밀어붙이고, 약자와 아이를 괴롭히며, 권력자 앞에서는 비굴하게 굴기도 한다.

월스트리트에서는 회사를 사고팔며 피와 노동의 가치를 농락하는 탐욕자로 등장한다.


그들은 언제나 주인공을 괴롭히는 빌런의 자리에 선다. 관객은 그들의 오만에 분노하고,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가난한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한다.

나 역시 오랫동안 이런 판타지를 아무 의심 없이 소비해 왔다.


삼각관계도 빠질 수 없다.

돈 많은 남자(재벌 2세, 실장님, 본부장님),

명랑하고 매력적인 캔디,

그리고 꿈과 재능은 있지만 가난한 남자.


결말은 늘 같다.

캔디는 가난한 남자를 버리고, 신분상승을 이룬다.

잠시 화려한 세계를 맛보다가, 버림받은 남자의 복수로 다시 추락한다.


수십 년간 반복된 이 멜로드라마는, 돈을 사랑의 배신자로, 가난을 순정의 상징으로 만든다.


도대체 이건 누구를 위한 판타지일까?

약간의 변주만 거쳐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영원한 삼각관계의 테제로 자리 잡았다.


관객은 늘 가난하지만 선량한 자에게 마음을 준다.

그들을 사랑하는 건 어쩌면 자기 동일시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부자는 아니지만, 진정성은 가지고 있다”는 자기 위안.


정치인들이 서민 코스프레를 여전히 반복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대중은 가난과 순정을 결합한 이미지에 끌린다.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 이윤에만 집착하는 사업가는 비난과 조롱, 분노와 풍자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정의의 심판을 받아 무너지는 순간.

관객은 거기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하지만 나는 늘 궁금했다.

자본가가 무너지면, 노동자는 어디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가야 할까?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다면 오히려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복잡하고, 반전의 반전이 꼬리를 문다. 인생처럼.


정말 빌런의 돈은 탐욕의 상징이고 약자의 눈물일까?

나는 돈을 사랑한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돈으로 해결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고 믿는다.


문명 이전 사회에서는 갈등이 생기면 칼과 창, 바위와 대포가 오갔다. 적의 목을 베어 창에 꽂아 전시했고, 패자는 승자의 노예가 되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다르다.

돈이야말로 그 갈등을 조정하고 해소하는 가장 효율적인 매개체다. 그러니 현대인에게 돈은 단순한 커런시가 아니다. 생명, 생존 그 자체다.


킬링타임 영화든, 예술영화든, 결국은 비슷한 도식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 밑바탕에는 생각보다 훨씬 깊게 뿌리내린 PC주의가 있었다는 걸 깨닫고, 나는 조금 놀랐다.


이렇게 관객들을 가난하고 약하지만 선량한 자들에게 감정이입하도록 유도하는 시선,

과연 누구의 것일까?

진짜 부자의 시선일까, 가난한 자들의 위안일까, 아니면 대중을 길들이는 서사의 장치일까?


누군가는 돈을 탐욕과 파멸로 이끄는 것으로 규정하고, 돈을 좇는 사람을 경멸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말입니다,

누군가 당신을 경멸한다면, 당신은 그의 곁에 가까이 있고 싶을까?


돈의 입장도 마찬가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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