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주철교위의 소녀
그림 속의 14살 소녀는 나의 엄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수남이의 엄마는 수남이가 13살 되기도 전에 아이 열을 낳았고
너른 밭과 논을 홀로 일구며 아이들을 키워냈다.
엄마의 힘이었던 큰언니를 일찌감치 시집 엄마는
큰아들 아래로 내리 넷이나 아들을 낳았다만
교복에 사각모자 씌워 도시로 학교를 보내기 위해
부른 배로 내내 열심히 일을 했다.
수남이는 자연히 학교도 가기 전부터 물을 길고 부뚜막 불을 키워내고 쌀을 씻어 불려 놓을 줄 알아야했다.
논밭의 대부분의 작물은 팔아서 오빠들 학비와 사업자금 군대 빼주려는 뇌물로 다 써내고
나 먹을 것은 없노라고 징징거릴 법한대도 수남이의
어린 맘에 혼자만 억척을 부리며 일해야 하는 엄마를 돕고 싶은 자연스러운 마음이 몸을 움직이게 했다.
집안 남자들은 학교를 가도
수남이는 동생을 등에 엎고 재넘어 밭까지 배고프다 힝힝 거리는 동생을 엎고
엄마에게 걷고 또 걸어가야 했다.
아이에게 배불리 젖을 먹이고 돌아오던 길에도 문득 문득 히죽이곤했다.
명문고에서 수재이고 기타도 잘 치는 오빠들이 넷이나 있으니
오빠들의 키가 커갈수록
세상 좋은 모든 것을 여동생에게 해주리란 이유없는 기대가 확신으로 커져갔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일구어내는 그 많은 밭떼기와 논마지기는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기 때문이었다.
깊은 강바닥까지 꽁꽁 얼어버린 수남이의 열 네살 겨울은 책임이란 게 뭔지 아직 모를 어린 여덟째가
열째 갓난아기를 땅바닥에 놓고 팽이치기에만 열중했던 해였다.
막내가 죽은 이유는 그 때문이라고 수남이는 생각하며 아까워했건만
머지않아서는 엄마가 돌아가셨다.
수남이의 14년 인생동안 보아온 엄마는 억척스레 일하고, 툭하면 배가 불러왔었고, 오빠들과 아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바람나 따로 살림을 낸 사위때문에 먹을 것도 변변히 못 먹고 사는 큰 딸에 대한 애닲픔으로 가슴을 쳐대곤 하면서도 살림돕는 수남이에게만 악악댔던 모습이었다.
그런 엄마의 부재가 자신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당장은 가늠은 하지 조차 못한 어린 나이라 제대로 슬퍼할 줄도 몰랐더랬다.
그 해 수남이는 연달아 몰아치는 갑작스런 헤어짐을 감당해야했다.
가난했던 동네 친구 점례가 서울행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땅이 없었고, 아버지는 술만 드셨고, 먹을 것이 없어 얼굴이 누렇게 떠있곤 했던 점례지만 자존심이 강해 쌀한 번 꾸러 오지 않던 점례네가 모두 이사를 가기로 한 것이다.
점례가 고개돌려 빼꼼 뒤돌아 보다 홀짝 올라타버린 새까맣고 기다란 기차가 저멀리 사라지고 나서야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헤어짐이라는 게 어떤 건지 실감됐다.
그러고 목덜미아래로까지 이어져 내리는 뜨끈함의 정체가 눈물이었다는 걸 알아챔과 동시에 왈콱 설움이 쏟아졌다.
이 세상에 오롯이 혼자 남아버렸다는 두려움도 알게 되었다.
철길을 건너고, 시커멓게 깊은 강길을 따라 집으로 걷는 내내 수남이의 눈물은 멈추지를 않았다. 」
멈추지를 않았다는 이 이야기는 나의 70살 엄마 수남이가 50살 딸인 나에게 말해준 이야기다.
내가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이야기다.
엄마에게도 분명 유년시절의 추억과 이야기가 있었을 법 한데
난 한 번도 묻지를 않았던 게다.
나는 그저 경치 좋은 강가의 숲과 나무를 그렸을 뿐이지만 가만히 내 곁에서 그림을 보다가
손가락으로 선을 그으며
" 나 어릴 적 우리 동네 화순에는 여기에 다리가 있었어, 다리가 엄청 두껍고 컸지. 점례가 그 다리위로 달리는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간날, 나는 집에 돌아오는 내내 울었었어." 라며 담담히 말했다.
내 풍경화에 엄마의 화순 철다리를 그려넣고
그 때 안아주고 위로해주지 못했던 내 엄마의 안쓰러운 등어리 가진 단발머리 14살 소녀도 그려넣었다.
엄마는 오래 오래 이 그림을 좋아하신다.
70이 넘은 엄마는 내 곁에 얼마나 오래 계실 수 있을까.
아직 늦지 않았을 때
엄마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어졌다.
그대들도 나이가 먹어갈수록 선명해지고 있을 엄마의 추억에 대해
내가 그녀의 인생에 없었던 시절의 기억에 대해
한번쯤 .. 넌즈시.. 물어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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