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살이 episode no.1
한국에선 집안에서 큰 거미를 보는 일이 극히 드물다. 하지만 영국은 날씨 자체가 습한 곳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집들이 모두 짧게는 50년, 길게는 몇 백 년씩 된 건물이라 그런 건지 크고 작은 거미들이 정말 많았다.
하루는 영국 친구 집에서 놀고 있었다. 음악도 듣고 수다도 떨며 한참을 놀다가 저녁을 먹기 위해 나는 화장실로 손을 씻으러 들어가려 했다. 그때 영국 친구가 다급히 나를 부르더니
"Watch out for the spider!"
'거미 조심해!'
라고 한다.
나는 속으로 화장실에 거미가 자주 나오나 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웬 걸.
친구는 '거기 수도꼭지 사이에 거미가 줄을 치고 살고 있는데 거미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조심해! 일주일째 내 애완 거미야!'라고 덧붙인다.
즉, '거미가 나오니까 너 조심해!'는 나의 완벽한 오역이었다.
저렇게 세면대에는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이 각각 나오는 두 개의 수도꼭지가 있는데 그 사이에 거미가 줄을 치고 댕강댕강 매달려 있었다. 친구는 일주일째 그 거미를 치우지 않고 만날 때마다 'Hi'라고 한다는 이야기까지 덧붙여준다. 덕분에 거미줄이 끊어질까 조심조심하며 물을 틀고 겨우 손을 씻고 나왔다.
이때, 이 영국 친구의 거미사랑을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얼마 후 그 영국 친구가 우리집에 놀러와서 같이 영화를 보고 있었다.
주황색 복도등만 켜 두고 거실의 불은 끄고 영화를 감상하는데..
갑자기.
정말 축구공 만한 거미의 그림자가 거실에 나타났다.
징그러움을 넘어선 무서움으로 다가왔다. 복슬복슬 털까지 그림자로 선명하게 보이니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림자만 보일 뿐 진짜 거미가 어디에 있는 건지는 가늠할 정신도 없었다. 혼자 소리를 지르고 호들갑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진짜 거미를 찾기 시작했다.
결국 거실과 복도 사이의 유리창에 어른 손바닥만 한 거미가 기어가고 있었고, 남편에게 빨리 잡으라고 닦달했다. 아마 거미의 위치가 조명과 가까워서 그림자는 그렇게 컸던가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남편도 이렇게 큰 거미는 처음 본 지라 우왕좌왕하며 두꺼운 책으로 거미를 잡으려고 하는데, 내내 얌전하게 내가 호들갑 떠는 걸 웃으며 즐기고 있던 영국인 친구가 이번엔 난리가 났다.
"No! Never!! Don't kill him! Just let him go!!! No!"
'절대 안 돼! 거미 죽이지 마! 그냥 가게 해! 안돼!'
남편이 거미를 죽일까 봐 다급해진 거다. 절대 죽이면 안 된다고, lucky를 없애는 거라고 엄청 흥분해서 소리친다.
영국에선 거미가 돈과 명예 등 행운의 상징이라 거미를 죽이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하며 거미를 잡으려고 하는 남편을 저지하고, 나는 이 거미를 놔주면 내가 잠잘 때 올까 봐 무서워서 안된다고, 빨리 도망가기 전에 거미를 잡으라고 남편을 다그치고.
결국 중간에서 남편이 거미를 죽이지 말고 현관문 밖으로 보내주자고 해서 극적으로 타협했다.
타협은 했지만..
거미가 강아지도 아니고, 가라는 곳으로 갈 리가 없으니 남편과 친구가 최대한 거미가 다치지 않게 조심조심하며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거미님을 문 밖으로 배웅해드렸다.
거미가 나가고 나니 어찌나 허탈하고 또 난리 쳤던 우리의 모습이 우습던지 안정을 되찾고는 다시 한번 깔깔거리며 웃었다. 친구는 내가 앞으로도 거미를 죽일까 걱정이 되었는지 자기 없을 때 거미가 나타나면 절대 죽이지 말고 집 밖으로 보내주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날 그렇게 크고 복슬복슬한 거미를 본 탓인지, 그 이후에 본 거미들은 나도 이제 그냥 귀여울 정도다. 한국에서도 장마철이면 가끔씩 작은 거미가 보이는데 거미를 볼 때마다 그 친구의 말이 귀에 맴돌아서 얇은 종이에 올려서 밖으로 보내주곤 한다. 거미가 행운의 상징이건 아니건 중요하진 않다.
우리 집에 잘못 온 거미.
굳이 해 칠 필요 없이, 그대로 밖으로 되돌려 보내면 그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