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제주도. 해가 뜨면 나가서 귤을 땄다. 정해진 만큼의 일을 하면 하루가 끝났다. 4시 30분쯤 일을 마치고 샤워 후 이불에 쓰러져 잠이 들면 어느새 새벽 5시가 되었다. 몸은 고됐지만 구조는 단순했다. 일한 만큼 돈이 생기고, 다음 달의 생활을 어렴풋하게나마 계산할 수 있는. 그렇게 며칠째 귤을 따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라도 살아갈 수 있다면, 빈센트 반 고흐는 왜 끝까지 그림만 그렸을까. 왜 그렇게 가난한 삶을 선택했을까.’라고.
우리는 고흐를 떠올릴 때 자주 계산기를 든다. 수입은 거의 없었고, 생활은 불안정했으며, 정신은 끝내 무너졌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그의 삶은 분명 비합리적이다. 그림만 계속 그리겠다는 결정은 현실적인 생존 전략이라기보다 오히려 자신을 해치는 선택처럼 보인다.
하지만 귤을 따는 손을 잠시 멈추고 생각해 보니 질문은 조금 달라졌다. ‘그는 정말로 그림을 왜 ‘선택’ 한 걸까. ‘그림’ 말고는 자신을 붙들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걸까.’
고흐는 처음부터 화가였던 사람은 아니다. 미술상 직원, 교사, 전도사, 책 판매원으로 살았던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직 안에 오래 머물지 못했고,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했으며, 정해진 시간과 규칙 속에서 자신을 유지하지 못했다.
귤을 따는 일은 힘들었지만 적어도 나를 무너뜨리지는 않았다. 반면 고흐에게 노동은 안정이 아니라 붕괴에 가까웠다. 그는 일 속에서 버텨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나마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만큼은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잠시 가라앉았다. 캔버스 앞에 서 있으면 자신이 살아 있다는 감각이 또렷해졌고, 붓을 들고 있는 동안만큼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그림은 현실이었다. 그림은 그를 붙들어 두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돈 되는 일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타협’은 고흐에게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았다면 오히려 그는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귤을 따며 버텼던 나와 달리, 그는 다른 방식으로만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같은 시대에 살지 않았지만, 각자 다른 방식으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 하루를 보냈다.
고흐의 선택은 잔혹했다. 가난을 견뎌야 했고, 외로움에 잠식되었으며, 끝내는 자기 자신에게서도 도망치지 못했다.
“현실을 좀 고려했어야지.”
“돈 벌면서도 그림은 그릴 수 있었잖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흐는 현실을 몰랐던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할 수 없는지, 무엇을 포기하면 끝내 자신을 잃게 되는지를.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그의 선택은 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에게 가장 정직한 선택이었다.
그의 진짜 비극은 그림 외에는 살아남을 길이 없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런 사람을 받아줄 사회적 안전망이 없었다는 데 있다.
귤을 따던 그날, 고흐의 삶을 떠올리며 나 자신의 기준을 다시 생각하였다.
어떤 삶의 무게를 견뎌야 살아갈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부터는 견디는 순간 나 자신을 잃게 되는지.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하루를 버티며 살아간다. 중요한 건 어떤 선택이 옳은지가 아니라, 어떤 선택이 나를 끝까지 지킬 수 있는지 알아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