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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철 Sep 07. 2020

자투리 시간도 모이면 하루가 되고 일 년이 된다.

찰나의 번갯불 아래에서도 써야 한다.



지금은 문예지나 신춘문예 등단이 글을 쓰는데 중요한 조건은 아니다.

자신의 글에 대해 전문가의 평가를 받아보려는 것, 글로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신춘문예나 문예지의 등용문을 두드리고 있지 않을까?

등단이라는 제도와 관계없이 좋은 글을 쓰는 분들도 많고 베스트셀러 작가들도 많다.

등단이란 제도가 필요한지에 대해 다른 나라의 사례와 비교해 여러 번 논의된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서는 등단 제도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려는 자세나 마음가짐을 이야기하려 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등단한 사람의 당선소감을 읽어보면 당선 전화를 받았을 때 그동안 고생한 기억이 떠올라 눈물을 흘렸다 한다. 또, 시상식장에서 당선자의 흘리는 눈물을 많이 보았다.

짧은 당선 소감에 담긴 당선자의 어려운 상황과 환경이 한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때마다, 당선 전화를 받으면 나도 눈물이 날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김칫국부터 미리 마셔 보는 것이다. 물론 앞부분에 떡 줄 사람이 빠졌다.

급하게 떡을 먹다가 기도가 막혀 예기치 못한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김칫국을 먼저 마시는 것이다.

신춘이나 문예지 등단 소식을 받고 기도가 막혀 죽을 일은 없으니, 마음껏 당선의 상상을 펼쳐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오히려 더 열심히 글을 써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

  

드디어 중앙 계간지에 시인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당선 소식과 축하 전화를 받았다.     


“축하합니다. 어디 문예지 누구입니다.”

“가을 문예에 시가 당선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멍......”

“감사합니다.”     

대화 끝.


염라대왕으로부터 위치 추적 전화를 받은 것도 아닌데 ‘감사합니다.' 다음을 이어갈 말이 없다.

무뚝뚝한 내 대답에 당선 소식을 전해준 상대방이 머쓱해져 어쩔 줄 모른다.

시상식 일정과 프로필, 당선소감, 사진 제출 안내를 받고 통화는 끝이 났다.


당선 소식을 접한 순간 가슴 한쪽이 허무로 가득 채워지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한 방울의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도 없었다.

너무 많이 떨어져 내성이 쌓여 정말 된 걸까? 하는 의구심은 들었다.

한편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시인이 이렇게 메마른 정서로 어떻게 글을 쓰나 하는 걱정도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가족들이 오히려 더 좋아했다.

마치 자기가 당선된 시인처럼 과도한 리액션과 상기된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런 모습을 보고, 나도 의무적으로 좋아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혼자만의 공간에 또 다른 나와 마주 앉아 생각에 잠긴다.

처음 시 공부를 하게 된 일, 일주일에 두 편 이상 쓰기, 동인들과의 합평에서 내 작품이 갈기갈기 찢어져 내용은 없어지고 제목만 남았던 일, 천 편의 시 필사, 신춘이나 문예지에 낙선한 일 등이 순식간에 휩쓸고 간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다. 4권의 대학 노트를 펼쳐본다.  

A4용지로 출력해 합평을 마친 한 편 한 편의 시가 대학노트 페이지마다 붙어 있다.

어떤 것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 원문을 읽어내기가 힘들 정도다.

천 편의 필사본도 넘겨본다. 좋아하는 시는 열 번 이상 필사를 했다.

이런 노력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아! 이제야 시인이 되었구나! 비로소 나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날 이후 시인으로서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시작은 되었지만 손과 마음은 움직이지 못하고 출발선에 그대로 서 있다.

시를 처음 접할 때, 시인은 좋은 시와 참신한 표현이 저절로 나오는 줄 알았다.

내가 시인이 되면, 단어 하나, 쉼표 하나라도 세심하게 쓰려고 마음먹었다.

습작 시절에는 완성도를 떠나 거침없이 써 내려갔는데. 등단 후, 한동안 단 한 편도 쓰지 못했다.

좋은 글을 써야겠다는 압박감이 감정과 정서를 얼어붙게 했다.

사유가 지배를 받으니 손톱으로 유리 긁는 문장들이 쏟아졌다.


그해의 등단 작품 중 최고의 찬사와 큰 기대를 받았던 신인들이 문단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좋은 작품을 써야겠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작용해 그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새삼스럽게 또 하나를 깨닫는다.

완벽주의와 좋은 글에 대한 지나진 집착이 창작의 걸림돌이라는 사실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직장에 다니면서 글을 쓴다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글은 언어나 사고의 연속성이 중요하다.

그러나, 천상계는 모르겠지만 인간계에서는 시인의 길보다 생계가 우선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야근에, 회식에, 늦은 귀가로 누우면 그대로 잔다.

어쩌다 일찍 퇴근해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켠다.

어제 완성하지 못한 언어와 감정을 끄집어내 이어보려 하지만 글의 진전이 없다.

어제의 그 감정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언어와 감정이 불연속이고 단절이다.

과부하가 걸린 직장 업무로 오늘과 내일에 병목현상이 발생했다.

감정과 이성이 접촉사고를 일으켜 만신창이의 문장이 쏟아져 나온다.      


금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새벽까지가 감정을 이어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그것도 모임이 없는 금요일이 한 달에 한두 번 되려나.

다음날 출근을 안 해도 되는 금요일 밤과 토요일 밤은 거의 뜬 눈으로 보낸 적이 많았었다.

이 기간이 마음 놓고 글을 쓸 수 있는 황금 같은 시간이다.

그러다 보니, 월요일 아침 출근길과 근무시간은 가장 힘든 날이 된다.

그래도 그 기간에 만족할 만한 글을 썼다면 근무시간도 그리 힘들지 않다.

그러나, 글이 생각과 감정의 겉핥기식 표현이라면 피로가 두 배로 밀려온다.


그럴 때는 전업 작가들이 부럽기만 하다.

특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를 선언한 사람들을 볼 때는 더욱 그러하다.

생업인 직장을 박차고 나오는 게 하는 글에 대한 열정.

육체와 정신이 젊었을 때 맑은 정신으로 살아 꿈틀거리는 좋은 글을 많이 써야 하는데,

나는 언제 전업 작가로 살아보나 하는 생각을 했다.    


드디어 나에게도 일 년의 휴가가 주어졌다.

그동안 못했던 독서와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평소 읽고 싶었던 역사, 종교, 철학, 미술사 등 마음껏 읽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미 마음은 들떠 있었다.

도서관 자료실에는 읽고 싶은 책들이 무진장 있었다.

낮에는 도서관에서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읽고 밤에는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매일 아침 8시에 도서관으로 출근해 오후 3시까지 책을 읽고, 나머지 시간에는 글을 쓰기로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인들과 술 약속이 빈번해졌고 자연히 몸도 마음도 나태해져 갔다. 게으름만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직장에 다닐 때는 시간이 없어 글을 못 썼는데 이제는 시간이 남아돌아도 글을 쓰지 못하는 나를 본다.     

다시 한번 되돌아본다. 무엇인 문제인지.


글을 쓸 수 있는 수많은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

글 쓸 시간이 없다는 것은 자기 위로를 위한 변명이다.

종군기자는 전쟁터에서 자기 목숨을 담보로 글을 쓴다.

형설지공의 여건은 글 쓰기에 좋은 환경이다.

칠흑의 어둠에 찰나의 번갯불 아래에서도 써야 한다.

자투리 시간도 모이면 하루가 되고 일 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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