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분리(分離)
대개 마음의 상처는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않을 때 생긴다.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과는 상호 간에 원만하고 말 것도 없어 상처를 주고받을 수도 없다.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 많은 상처를 주고받는 까닭은 서로 가깝기 때문이다.
가족원은 기쁨과 고통의 원천이다. 부모가 자녀로부터 상처를 받지 않는 방법이 있을까? 있다. 자녀에게 원하는 것이 없을 때이다. 그럴듯한 말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타당한 말이 아니다. 자녀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부모는 더 이상 부모가 아니다. 아무런 기대를 받지 않는 자녀는 더 이상 자녀가 아니라 남이다. 자녀에게 부모다운 기대를 할 때 부모는 부모가 된다.
이상한 말 같지만 자녀로부터 아무런 상처를 받지 않은 부모는 부모가 아니다. 실제로 자녀로부터 아무런 상처를 받지 않고 사는 부모는 있을 수 없다. 자녀로부터 아무런 상처를 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그것은 자녀의 허물을 용서하고 수용하여 갈등을 최소한으로 줄였거나, 자녀가 준 유형무형의 기쁨과 보상이 상처보다 더 크다고 믿는 경우이다.
마찬가지로 부모로부터 아무런 상처를 받지 않고 자란 자녀도 없다. 부모의 자원은 부족하기 마련이다. 자녀가 부모에게 원하는 바람은 온전히 충족될 수도 없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없는 것은 선의(善意)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이 가진 능력과 자원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가족원 사이의 갈등이 증폭되는 경우이다. 비현실적으로 서로에 대한 기대를 키울 때 갈등은 커진다. 부모가 자녀를 강하게 통제하려 하고, 자녀가 부모의 요구를 거부할 때다. 부모가 자녀를 강하게 통제하려는 이유는 부모의 뜻을 따르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설령 그 기대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고 타당할지라도 부모의 자녀에 대한 비난과 압박은 폭력성을 띠게 된다. 그 순간 부모는 자녀의 압제자가 된다. 성장을 막는 족쇄가 된다. 그때 자녀는 부모라는 감옥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을 것이다. 경제적 사회적 자립을 꿈꿀 것이다. 자립에 실패하면 좌절하고 무기력해지며 우울해질 것이다. 이때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분리(分離)다.
부모는 자녀를 놓아주어야 한다. 부모의 욕구를 조정하여야 한다. 높은 기대 수준을 낮은 기대 수준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녀의 삶 자체를 존중해야 한다. ‘그의 모습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어야 한다. 대개 부모는 자녀가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려고 애쓴다. 자녀의 일탈을 두려워한다. 당연하다. 부모의 그런 기대와 노력은 타당하다. 그러나 지나치면 독(毒)이 된다.
안타깝지만 때로는 자녀의 실수와 실패와 추락을 그의 삶의 일부로 인정해야 한다. 자녀의 추락을 보는 것은 슬프고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삶에는 역설적인 면이 있다. 약자의 세상을 살아보아야 더 큰 그릇이 될 수 있다. 가난을 체험해야만 알게 되는 세상도 있다. 어둠을 모르면 빛의 아름다움에 눈뜰 수 없다. 넘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넘어졌다가도 힘을 내서 스스로 다시 일어서기를 바라고 기도해야 한다. 참고 견디며 기다려주어야 한다. 일어서려 할 때, 일어서는 것을 격려하고 응원해 주어야 한다.
엄마에게는 엄마의 길이 있듯이, 자녀에게는 자녀의 길이 있다. 부모는 부모고 자녀는 자녀다. 엄마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자녀를 쉽게 분리 독립시키지 못한다는 데 있다.
자녀를 분리 독립시키려는 엄마는 번지점프를 하듯이 용기를 내야 한다. 어두운 길목에서 서성이는 자녀의 손을 서둘러 붙드는 대신에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기도하며 기다려주어야 한다. 바깥세상은 자녀의 허물을 무조건적으로 받아주는 엄마의 품과 같은 곳이 아니다. 세상의 쓴 맛을 보면서 자랄 기회를 막아서면 안 된다.
부모는 자녀문제로 이런저런 걱정에 시달린다. 자녀의 삶에 대한 염려는 부모의 숙명이다. 자녀를 성장시키고 싶다면, 진실로 사랑한다면 용감하게 울타리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때가 되면 자녀를 가까운 남으로 여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짜 남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