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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게, 나는 이 새벽에 몰두한다

by 정성균

새벽 네 시, 아내의 숨소리와 케냐 AA 향이 섞이는 시간


새벽 네 시. 바깥은 아직 한밤중이나 다름없다. 창문 너머는 짙은 어둠뿐, 가로등 불빛만이 희미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세상은 숨죽인 듯 고요한데, 곁에서 아내는 아직 깊은 잠에 빠져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다. 그 평온한 모습이 고맙기도 하고, 이 시간에 혼자 깨어 사부작거리는 내 모습이 조금은 유별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든, 내 머릿속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잠결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몸을 일으키는 건, 매번 작은 전쟁 같다. 조금만 더, 딱 5분만 더 이불속에 파묻혀 있고 싶은 유혹이 끈질기게 발목을 잡는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를 기다리는 그것.


몸을 일으켜 거실을 가로지른다. 저쪽 코너가 바로 내 작은 커피를 내리는 작은 주방 공간. 곤히 잠든 아내를 깨우고 싶지 않아, 발걸음 소리마저 조심스럽다. 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더듬거려 찾아낸 건, 오늘의 선택, 케냐 AA. 동아프리카 고지대의 강렬한 태양과 비옥한 화산토가 길러낸,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단단한 최상급(AA) 생두만이 허락된 이름이다. 봉투를 열자, 역시. 잘 익은 블랙커런트 같기도 하고, 쌉싸름한 자몽 껍질 같기도 한, 그 복합적이면서도 선명한 향이 먼저 코를 간질인다. 그래, 이 맛에 케냐 AA를 찾지. 잠든 후각을 단번에 깨우는 강렬한 신호다.


이 단단한 녀석들을 그라인더에 넣고 버튼을 누른다. 날카로운 소리가 잠시 정적을 가르지만, 혹시나 이 소리가 너무 크지 않을까, 잠시 아내가 있는 쪽을 돌아본다. 다행히 미동도 없다. 오늘은 조금 더 곱게 갈아볼까. 이 원두가 가진 특유의 묵직하면서도 깨끗한 바디감을 제대로 끌어내려면 분쇄도부터 신경 써야 하니까. 어제는 추출이 살짝 빠른 감이 있었다. 포터필터에 담아 탬핑할 때의 압력은 여전히 어렵다. 과하면 거친 맛만 남고, 부족하면 밍밍해지니… 매번 긴장되는 순간이다. 이 섬세한 조절이 결과물의 차이를 만든다는 걸 알기에, 허투루 할 수가 없다.


머신이 낮은 진동과 함께 추출을 시작한다. 붉은 갈색의 두터운 크레마가 잔 위로 봉긋하게 차오르는 걸 보면, 잠시 숨을 고른다. 저 아래 숨겨진 맛의 층들을 상상하며. 처음엔 레몬처럼 짜릿하게 터져 나올 상큼한 산미, 뒤이어 입안을 꽉 채우면서도 결코 부담스럽지 않은, 묵직하지만 걸림 없는 바디감, 그리고 마지막엔 마치 잘 익은 베리나 사탕수수처럼 은은하게 감돌다 사라질 달콤한 여운까지… 이 복잡하면서도 맑게 정제된 맛의 여정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 그래, 이 한 잔을 위해 이 새벽의 번거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는 거다. 카페인을 섭취한다는 느낌보다, 한 잔의 흐름 속에 담긴 정성과 온기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향이 퍼지고 맛이 스며들면서 마음이 차분해진다. 사람들이 이 맛을 찾는 이유를, 마실 때마다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따 뜻한 잔을 들고 다시 거실의 내 자리로 돌아온다. 책상이 놓인 창가. 첫 모금. 음미한다. 방금 상상했던 그 맛의 파노라마가 혀 위에서 펼쳐진다. 복합적인 향미가 정신을 번쩍 뜨이게 하는 선명함. 이 맛 때문에 새벽을 기다리는 걸지도. 창문을 살짝 연다. 아직 싸늘한 새벽 공기가 훅 끼쳐 들어온다. 나쁘지 않다. 밤새 방 안에 고여 있던 내 생각의 잔해들을 쓸어가는 느낌이랄까. 지금 이 글을 쓰는 손끝도 살짝 시리다. 더 두꺼운 양말을 신을 걸 그랬나. (글을 쓰는 지금 시각, 금요일 새벽 5시 05분. 밖은 여전히 어둠이 짙지만, 칠흑 같던 네 시와는 아주 미세하게 다른 느낌이다.)


책상 위에는 어제 읽다 만 책과, 쓰다 만 노트, 그리고 노트북. 오늘은 뭘 써야 할까. 어제는 문장이 꽤 잘 나왔는데 , 오늘은 영… 감이 안 온다. 머릿속은 텅 빈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너무 많은 생각이 뒤엉켜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 같기도 하고. 그냥… 백지 앞에서 한참을 앉아 있을 때도 많다. 커서만 외롭게 깜빡이는 걸 보고 있으면, 꼭 나한테 ‘그래서, 할 말은 있고?’ 하고 묻는 것 같다. 그럴 땐 그냥, 아무거나 적기 시작한다. 방금 마신 케냐 AA의 여운이 어떻다는 얘기든, 창밖의 어둠이 어떻다는 얘기든. 뭐라도 시작하면, 길이 보일 때도 있으니까. 아니면 말고. 꼭 매일 무언가를 써야 하는 건 아니니까,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어딘가 조급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요즘은 글쓰기보다 다른 것에 더 마음이 간다. 짧은 영상 만들기. 이거, 정말 요물이다. 처음엔 그냥, 정말 그냥, 핸드폰에 쌓인 영상들 정리나 할까 싶어서 시작했는데… 정신 차려보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나 있다. 프리미어 프로 타임라인 위에 클립들을 올려놓고 자르고 붙이고… 애프터 이펙트로 뭔가 그럴싸한 효과를 넣어보려고 끙끙거리고.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는 기능이 태반이다. 어제는 작업하던 거 저장 안 하고 잠깐 딴짓하다 프로그램이 멎어버렸다. 아… 그 허탈함이란. 괜히 애꿎은 마우스만 노려봤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든다. 오히려 오기가 생긴달까. 내가 원하는 대로 딱 맞아떨어지 는 장면 전환을 발견했을 때, 밋밋했던 영상에 색 보정 필터를 입혔더니 전혀 다른 느낌이 날 때, 그럴 때 느껴지는… 뭐랄까, 짜릿함? 그래, 그런 게 있다. 꼭 내가 무슨 대단한 창조주라도 된 것 같은 착각. 물론 결과물은… 아직 멀었다. 친구들한테 보여주기도 민망한 수준일지도. 그래도, 이 과정 자체가 재밌다. 힘들고, 답답하고, 때로는 내 재능 없음을 확인하는 순간 같기도 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몰입감을 준다. ‘즐거움이란 이런 걸까?’ 스스로에게 물어봤던 그 질문. 답은 아직 모르겠다. 즐거움인지, 아니면 그냥 현실 도피인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복잡하다, 감정이란 건.


가끔은 영상 편집 창을 내려놓고 책을 집어 든다. 글자들이 눈에 잘 안 들어오는 날도 있지만, 어떤 날은 문장 하 나하나가 가슴에 콕콕 박힌다. 다른 사람의 생각 속을 잠시 여행하는 기분. 그 여행이 끝나면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멍하니 창밖을 보거나 눈을 감는다. 그러면 또 어디선가 기억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얼굴, 목소리, 풍경들. 그때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도 있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도 있고. 이런 기억들이 쌓여서 지금의 내가 있는 거겠지. 때로는 이 기억들이 영상의 재료가 되기도 하고, 글의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 추억은… 달콤 씁쓸한 커피 같다고 해야 하나. 방금 마신 케냐 AA처럼, 짜릿한 산미 뒤에 길고 은은한 여운이 남는 것처럼.


어느새 창밖으로 아주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 같다. 아직 어둠이 훨씬 짙지만, 그래도 네 시의 칠흑 같던 어둠과는 미세하게 다른 느낌. 이제 곧 동이 트려나. 아내는 아직 깰 기미가 없다. 이 고요함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겠지.


이 새벽에 일어나 꾸역꾸역 무언가를 하고 있는 내 모습. 커피 분쇄도를 고민하고, 글을 쓰려 끙끙대고, 영상 편집 툴과 씨름하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가끔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때도 있다. 더 자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는 것도 매일 쉽지는 않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나. 스스로를 대견하다고 말하기엔 좀 쑥스럽고, 그냥… ‘애쓴다, 나 자신’ 정도?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 시간들이 쌓여서, 아주 조금이라도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된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아주 조금이라도.


이제 커피도 거의 다 식었다. 마지막 한 모금을 넘기니, 산미는 희미해지고 씁쓸한 뒷맛만 남는다. 자, 이제 진짜 하루를 시작할 시간이다. 새벽의 이 복잡 미묘했던 감정들과, 약간의 피로감과, 그래도 뭔가를 해냈다는 작은 만족감을 안고. 금요일이다. 오늘은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모르겠다. 그냥, 부딪혀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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