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아주 가끔 몸보다 마음이 먼저 눈을 뜨는 순간이 찾아오곤 한다. 아직 어둠의 채도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세상의 모든 소리가 제 숨결마저 죽인 듯한 바로 그 시각. 잠의 가장 깊은 심연에서 길어 올린 생각의 실마리는 꿈과 현실 사이, 그 아스라한 경계에서 잠시 머무는 듯하네. 세상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증발해버린 듯, 밀도 높은 정적만이 방 안을 감도는 순간이지. 그때,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의 물결이 안개처럼 스르르 피어오른다. 어떤 날은 까닭 모를 아련한 그리움이 심장 한구석을 가만히 쓸어내리고, 또 다른 날은 텅 빈 듯하면서도 무언가로 가득 찬 느낌, 혹은 실체 없는 기대감이 마음을 온통 휘감기도 하니. 이처럼 언어로 명확히 규정되지 않는 섬세한 기분들, 그것들이 보이지 않는 손길처럼 나를 이끌어 조용히 책상 앞으로 데려다 놓는 것이다. 누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닌데, 곤히 잠든 몸을 뒤로하고 무언가를 써야만 할 것 같은, 어쩌면 써야만 풀릴 것 같은 이끌림. 이른 새벽은 그렇게 예고 없이, 그러나 어김없이 나에게로 스며든다.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잠시 멈춤 표를 누른 듯한 시간. 밤의 장막이 아직 그 묵직한 기운을 드리운 풍경 속으로, 나는 깊이 잠든 아내의 온기를 침실에 고이 남겨두고 비밀스러운 의식에 참여하듯 홀로 서재로 향한다. 가벼운 겉옷 하나를 어깨에 걸치고 짧은 복도를 지나는 동안, 맨발에 와닿는 바닥의 기분 좋은 서늘함이 오히려 밤새 뒤엉켰던 상념들을 명료하게 흔들어 깨우는 듯싶다. 습관처럼 커피물을 올리고, 원두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방 안에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향긋한 내음은 이 새벽 의식의 시작을 알리는 작은 신호일지도 모르겠다. 펜을 쥐기 전, 잠시 창가에 기대어 아직은 먹빛에 가까운 바깥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저 멀리, 아주 멀리 동쪽 하늘 끝자락만이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히 다른 빛깔을 잉태할 채비를 하고 있을 뿐.
어제 하루, 소란과 분주함 속에서 미처 충분히 귀 기울이지 못했던 내 안의 수많은 목소리들이 이 깊은 고요를 배경 삼아 비로소 하나둘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하네. 그건 때로 놓쳐버린 기회에 대한 미련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건네지 못한 따뜻한 말 한마디에 대한 아쉬움일 테지. 슬며시 고개 드는 정체 모를 외로움, 이미 지나가 버린 어제의 사소한 일들을 조용히 되짚어보는 마음, 그럼에도 희미하게 빛나는 내일을 향한 아주 작지만 단단한 다짐까지. 이 새벽은 뒤섞인 감정들이 아무런 제지 없이 흘러넘치도록 너른 품을 내어주는 광활한 무대와 같아.
글쓰기는 내면의 지도를 그리는 작업이며, 마음 가장 깊은 곳을 향한 탐험과도 같지. 잊고 지냈거나 알면서도 애써 외면했던 내 안의 또 다른 그림자, 혹은 숨겨진 빛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이기도 하니까. 하얀 종이 위, 혹은 모니터의 빈 화면 위에 단어들이 하나씩 제 모습을 드러낼 때, 그것은 흩뿌려진 마음의 조각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제자리를 찾아가는 신비로운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 미세한 조각들을 조심스럽게 이어 붙여 문장을 짓다 보면, 어느새 꾸밈없고 가감 없는 가장 솔직한 나와 만나게 된다. 세상의 어떤 시선이나 평가로부터도 자유로워, 나 자신에게 깊이 마음을 쏟는 시간. 이것이야말로 하루 중 가장 순수하고 진실된, 나에게만 허락된 작은 축제이지 않을까. 무엇을 써야 한다는 의무감보다는, 무엇이든 써도 좋다는 해방감이 이 시간을 더욱 특별하게 매만진다.
한참을 그렇게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다 문득 고개를 들면, 어느새 주변의 풍경이 새로운 빛깔로 시야에 스며든다. 살짝 열어둔 창틈으로 새벽의 청량하고 싸늘한 공기가 미끄러져 들어와 뺨을 간지럽히며 정신을 더욱 또렷하게 일깨운다. 아직 대부분의 창문이 어둠에 잠겨 있는 거리, 그 너머로 어둠 속에서 아주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제 빛을 찾아가는 하늘의 미세한 변화는 매일 마주해도 늘 경이롭다. 동쪽부터 엷은 푸른빛이 번지기 시작하면, 곧이어 연한 주황과 분홍의 물감이 조심스럽게 섞이며 새벽 하늘의 섬세한 그라데이션을 그려낸다. 커튼을 스치며 방 안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새벽빛은 부드러운 수채 물감처럼 방 안 구석구석을 은은하게 물들인다.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했던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들려오고, 그 규칙적인 리듬은 이 정적을 깨뜨리기보다 오히려 그 깊이를 더하며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곤 한다. 곁에 놓인 차가운 물 한 잔의 청량함은 이 사색의 시간을 더욱 또렷하게 벼려주는 듯하다. 그 서늘한 기운이 밤새 가라앉았던 정신의 심연을 부드럽게 흔들어 깨우며, 글쓰기를 위한 모든 감각이 섬세하게 조율되었음을 느끼게 한다.
이 순간의 모든 환경 요소들은 글쓰기만을 위해 섬세하게 조율된 무대인 양 느껴진다. 어둠과 빛의 교차, 깊은 침묵과 아주 작은 소리의 공존, 차가움과 따뜻함의 조화. 나의 마음은 그 무대 위에서 홀로 독백하는 배우처럼, 혹은 조용히 자신만의 노래를 부르는 음유시인처럼 느릿느릿 움직이고, 그렇게 조심스럽게 탄생한 문장 하나하나가 그 무대 위에 소중히 내려앉는다. 비어 있는 하얀 종이는 때로는 너른 광야처럼, 때로는 깊은 우물처럼 다가와 말을 건네기 전 가만히 그 심연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처음에는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막막함에 펜 끝이, 혹은 손가락이 허공을 헤매다가도, 익숙한 도구의 감촉과 책상 위 작은 등불의 온화하고 집중된 불빛 속에서 글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조금씩 스스로 제 길을 찾아간다. 때로는 기억 저편에 희미하게 묻어두었던 오래된 풍경이 생생하게 떠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다짐이나 물음이 싹트기도 하는 것이다.
아주 사소해 보이는 단어 하나에도, 속삭이듯 스며드는 마음의 숨결이 담겨 있는 듯하다. 그 숨결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쓰는 나와 그것을 다시 읽는 나 사이에서 분명히 느껴지는 미묘한 떨림. 어쩌면 글은 때때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만 같다. 불쑥 튀어나온 문장 하나에, 쓰는 그 순간까지도 나조차 몰랐던 내 안의 진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발견할 때, 나는 작은 놀라움과 함께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아,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내가 이런 감정을 품고 있었지.’ 마치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의 마지막 조각을 찾은 듯한 기분. 나는 그 문장을 쓰기 전까지, 내가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지조차 몰랐으니까. 글 속에서 만나는 나는 때로 낯설지만, 이상하게도 가장 익숙한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은 마치 숨겨진 샘물을 발견하는 기쁨과도 비슷하달까.
새벽의 글쓰기는 때로 지독히 느리다. 단어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골몰하며 문장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기도 하고, 이미 써 내려간 한 문장을 완성하기까지 수없이 고치고 덜어내는 지난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느림이야말로 이 새벽이 내게 주는 가장 값진 선물이 아닐까.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잠시 멈춰 서서, 나를 깊이 들여다보는 귀한 틈. 그 느긋함 속에서 나는 비로소 세상의 속도가 아닌, 내 안의 본연의 속도에 발맞춰 걸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한 자 한 자 눌러쓰는 글자들이 나에게 진정으로 건네주려는 이야기는 대체 무엇일까?
어느덧 창밖이 제법 밝아지고, 짙푸르던 하늘은 연한 우윳빛으로 완전히 변해가면 새벽의 끝자락이 찾아왔음을 알 수 있다. 하나둘씩 불이 켜지는 이웃집 창문들,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 어렴풋이 들리는 사람들의 기척까지. 도시의 소음이 조금씩 깨어나고, 세상은 다시금 분주한 하루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하지만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내게는 이미 고요한 시간의 퇴적물이 마음 한편에 든든하게 쌓여 있다. 고작 몇 페이지 남짓의 글, 혹은 두서없이 적힌 몇 줄의 문장일지라도, 그 안엔 분명히 오늘 하루를 살아갈 작은 힘과 따스한 위로가 담겨 있는 법. 누구도 모르게, 오직 나만을 위해 적어 내려간 말들이, 세상 그 누구도 아닌 나에게만 들리는 가장 다정한 격려가 되어준다. 정돈된 마음으로 다가올 하루의 소란을 맞이할 채비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 새벽의 시간을 간절히 기다린다. 온 세상이 잠든 듯 고요하고, 침실엔 사랑하는 이의 평온한 숨결만이 머무는 새벽. 그 안에서 허락된 나만의 공간과 깊은 침묵 속에서, 녹슨 경첩처럼 삐걱이던 마음의 문을 조용히 열고 글을 써내려가는 그 순간을. 매일같이 반복되는 비슷한 시간, 비슷한 자리이지만, 그 속에서 만나는 나는 매번 조금씩 다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그 글 안에서 포개지고, 또 내일의 나를 희미하게 예감하곤 한다. 그렇게 나는 글을 통해 과거의 나를 다독이고, 현재의 나를 매만지며, 미래의 나를 조금씩 알아간다.
그리고 하루의 다짐처럼, 혹은 내일의 나에게 보내는 작은 약속처럼 문장을 마무리한다. 내일 새벽에도, 나는 틀림없이 이 조용한 시간 속에서 또 다른 나를 꺼내어 종이 위에, 혹은 화면 위에 펼쳐놓을 테지. 그렇게 하루하루 정성스레 쌓아 올린 기록들은, 먼 훗날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볼 때, 나를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가장 조용하고도 확실한 나만의 역사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새벽의 기록들은 나 자신이 나에게 부치는 가장 진솔한 편지이자, 오직 나만이 해독할 수 있는 삶의 비밀스러운 악보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