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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머무는 다섯 오솔길

by 정성균

누구나 자기만의 속도로 삶의 길을 간다. 어떤 날은 발목까지 포근한 흙길 위를 걷고, 또 어떤 날은 세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거친 길을 터벅거리기도 한다. 때로는 낡은 책갈피 속 글귀 하나에 마음이 끌려 생각의 오솔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어디로 향하는지, 왜 이 길 위에 섰는지 몰라 가슴 먹먹한 날들도 있었다. 짙은 안개에 갇힌 듯, 한 걸음 앞도 잘 보이지 않아 그 자리에 그냥 머물고 싶던 때도 있었지.


그러다 어느 날, 정말 문득, 아니 어쩌면 다가올 일이었던 것처럼, 내 안으로 이어지는 다섯 갈래 오솔길을 알아차렸다. 그 시작은 바쁜 날들 속에 잠시 틈을 내던 어느 오후, 창가에 앉아 책장을 넘기다 다가온 작은 생각이었다. 길들은 저마다 다른 빛깔을 보여주었고, 저마다 다른 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참 묘하게도, 그 길들은 결국 하나의 닿는 곳, 바로 ‘나’라는 존재를 향해 나를 이끌어 주었다.


오늘, 그렇게 내 마음을 다독이며 걸었던 여정, 때로는 눈가가 뜨거워지고 때로는 입가에 엷은 미소가 어렸던 그 오솔길로 당신을 가만히 안내하고 싶다. 어쩌면 이 길 어디쯤에서, 당신도 이미 알았지만 미처 보지 못했던 당신만의 이야기를 만날지도 모르니까.


첫 번째 오솔길: 책장을 열자, 마음속 숨겨진 풍경이 말을 걸어왔다.


서재 한쪽, 햇살이 머무는 창가에서 이 길은 시작되곤 했다. 조금은 묵직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첫 장을 열면, 나는 어느새 낯선 동네의 구불한 골목을 거니는 아이가 되곤 했다. 손끝에 전해지는 종이의 감촉, 코끝을 스치는 빛바랜 책의 향기는 잘 익은 과일 내음 같기도, 오래된 앨범 같기도 하며 아련한 시간을 데려왔다. 기억 저편에 있던 소중한 마음들이 하나둘 깨어났다. 글자 하나하나에는 지은이의 깊은 생각과 따스한 온기가 어려 있었고, 그 온기를 따라 이야기 속을 헤엄치다 보면, 어느덧 나는 주인공의 슬픔에 같이 마음 아파하고, 그의 작은 기쁨에 내 일처럼 가슴이 뛰었다. 어떤 때는 등장인물이 처한 힘겨운 현실에 함께 한숨짓다가도, 그가 보여준 곧은 마음에 깊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안의 무언가가 잔잔히 움직이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이거, 혹시 다른 시간, 다른 곳의 또 다른 내 모습은 아닐까.’ 책장을 넘기던 손을 잠시 멈추고 먼 창밖을 보며 그런 상념에 젖곤 했다. 다른 사람의 삶과 경험에 나를 비춰보는 일. 읽는다는 것은 그저 글자를 따르는 일이 아니었다. 너른 생각의 마당을 거니는 일이었고, 내면의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그 길에서 나는 여러 사람의 생을 통해 때로는 다독임을 받고, 때로는 나를 돌아보며, 결국에는 조금은 복잡한 ‘나’라는 존재를 조금씩 알아가는 법을 배웠다. 책갈피 사이의 오솔길은 현실에선 가볼 수 없는 곳으로, 먼저 세상을 산 이들의 지혜 속으로 나를 이끄는 가장 포근하고도 놀라운 산책길이었다. ·


두 번째 오솔길: 발걸음은 안으로 향했고, 숨겨진 이야기가 말을 걸었다.


활자들이 만든 숲을 나와 진짜 흙과 바람이 있는 길 위에 서기도 했다. 이른 새벽, 아직 세상이 고요한 시간, 발소리 하나하나가 또렷한 숲길이나, 저녁놀이 곱게 물드는 강가를 따라 이 길은 이어지곤 했다. 처음에는 그저 몸을 움직여 기운을 차리는 일 정도로만 여겼다. 하지만 한 걸음, 또 한 걸음 땅을 딛고 나아갈수록, 내 안 깊은 곳에서부터 작은 소리들이 물방울처럼 떠올랐다. 오랫동안 풀지 못한 매듭처럼 마음 한편에 남아 있던 무거운 감정들, 빛바랜 그림처럼 덮어두었던 희미하지만 선명한 기억들, 바쁘다는 이유로 일부러 눈 돌렸던 나에 대한 솔직한 생각들이었다. 그것들은 오랜 벗 같기도, 그림자 같기도 하며 조용히 나를 따랐다.


다른 이들은 물론, 나조차도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 외면했던 마음 깊은 곳의 아픔과 응어리들을, 규칙적인 걸음 속에서 찬찬히 바라보았다. 다친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순간이었다. 몸의 움직임이 마음의 흐름을 불렀고, 깊고 편안한 숨결은 엉킨 생각들을 차분하게 해주었다. 그 길의 끝에서 나는, 밀어내고 외면했던 내 안의 여러 모습과 비로소 눈을 맞추고, 조용히 손잡는 법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걷는다는 것은 그저 공간을 지나는 일이 아니었다. 내 마음의 풍경을 펼쳐 그 안을 느끼는 진솔한 대화와 같았다. 어떨 땐, 길 끝에 서서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엉뚱한 질문을 던지기도 하면서.


세 번째 오솔길: 목적지를 두지 않은 걸음마다,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이 오솔길에는 정해진 곳도, 미리 세워둔 계획도 없었다. 그저 ‘걷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문을 나섰고, 어디든 꼭 닿아야 한다는 생각 없이, 그저 발길 가는 대로 몸을 맡겨도 좋다는 커다란 편안함이 함께했다. 늘 시간에 쫓기며 무언가를 해내고 결과를 봐야 했던 빠듯한 날들에서 한 걸음 떨어져, 어떤 의미를 굳이 찾지 않는 걸음은 그 자체로 신선하고 마음 가득한 경험이었다. ·


그러자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아주 작은 것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발부리에 스치는 작은 돌멩이의 동그란 모양과 손안에 느껴지는 부드러움, 길가 시멘트 틈을 비집고 나온 이름 모를 풀잎의 연둣빛 생기, 어디선가 바람결에 실려 오는 은은한 꽃 내음, 낡은 담장 너머로 고개 내민 푸른 나뭇잎 같은 것들이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와 빛깔, 향기가 오직 나만을 위해 차려진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유 없음’ 속에, ‘목표 없음’이라는 빈자리에 마음이 구름처럼 가벼워지는 진짜 이유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로는 다 그릴 수 없는 깊은 평온함, 그 목적 없는 산책이 주는 다독임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깊었다. 비어 있는 그릇이 무엇이든 담을 수 있듯이, 아무런 의도 없이 비워진 마음에 세상의 아름다움과 삶의 작은 기쁨들이 가만히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이 길은 나에게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속삭여주었다. 때로는 이런 ‘멍 때리기’가 필요하다는 걸, 누가 뭐래도.


네 번째 오솔길: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니, 그 안에 다정함이 숨 쉬고 있었다.


앞서 걸었던 여러 갈래의 여정들이 자연스레 나를 이 길로 이끌어준 것 같다. 바로 ‘나’라는 존재의 속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는 과정이었다. 매일 지나는 익숙한 동네 골목에서도, 어느 날 문득 처음 본 듯 낡은 대문의 빛바랜 나무색이나 담장 아래 그늘에 소담히 핀 작은 꽃의 다른 얼굴을 발견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알게 된다. 늘 나와 함께 있지만 정작 그 속을 다 알지 못했던 ‘나’라는 존재 안에도, 아직 내가 보지 못한 수많은 풍경과 여러 이야기,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가능성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지나온 시간 속에서 했던 수많은 결정과 그로 인한 아쉬움과 감사함, 지금 이 순간의 나를 꾸밈없이 바라보는 솔직한 눈길,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나를 어렴풋이 그려보는 기대와 작은 떨림. 이 모든 것이 조용히 흐르는 물처럼, 특별한 애씀 없이도 나를 조금 더 깊이 받아들이고 알아가는 소중한 방법임을 배워갔다. 어떤 날은 지난날 아팠던 나를 가만히 안아주고, 어떤 날은 지금의 흔들리는 나를 말없이 다독이며, 또 어떤 날은 앞으로 나아갈 나에게 응원의 눈짓을 보내는 시간. 그렇게 새로운 나를 알아가는 두근거림과 익숙한 나를 보듬는 평화로움이 조용히 함께하는 길이었다. 이 길 위에서 나는 비로소 나 자신과 가장 가까운 벗이 되는 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내 안의 그늘진 곳까지도 찬찬히 들여다보려 할 때, 참된 나를 만날 수 있음을 희미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숙제가 나를 아는 일일지도.


다섯 번째 오솔길: 오늘의 한 걸음이, 먼 훗날의 나에게 보내는 작은 위로였다.


마지막 이 오솔길은 아직 오지 않은 알 수 없는 날들을 향해 한 걸음씩 차분히 내딛는 희망의 발걸음이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앞날은 때로 멀게만 보이고, 때로는 알 수 없는 걱정과 막막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 내가 걷는 이 길 위의 작은 발걸음 하나하나가, 결국 그 불확실하지만 새로운 가능성으로 채워질 앞날을 향해 나아가는 소중한 준비임을 깨달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잔잔한 평화와 작은 용기가 솟아나는 것을 본다.


오늘의 작은 행동 하나가 그런 믿음의 표현일지 모른다. 지금 내가 남기는 이 작고 소소한 생각의 흔적들, 작은 실천들이 먼 훗날, 예상치 못한 힘겨움에 지치고 어려운 날을 만난 나에게, ‘괜찮아, 너는 이미 수많은 길을 잘 지나왔고, 이 길 또한 잘 건널 수 있을 거야’라고 따뜻하게 말해주는 작은 위로의 목소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대. 혹은 어두운 밤바다의 불빛처럼 나아갈 쪽을 비춰주는 희미하지만 분명한 표지가 되어줄 수도 있을 테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직 오지 않은 그 빛나는 날들을 위해, 지금 이곳, 이 순간에 한 걸음의 의미를 가만히 새긴다. 그것은 마른 땅에 소망이라는 이름의 작은 씨앗을 심고, 언젠가 푸른 싹이 돋아날 그날을 기다리며 정성껏 물을 주는 농부의 마음과 비슷했다. 오늘의 걸음이 내일의 나를 만들어가는 가장 꾸밈없는 바탕임을 믿는다. 그 믿음 하나로 또 하루를 살아가는 거겠지.


마음과 마음을 잇는 길 위에서


두꺼운 책장을 넘기며 시작된 생각 속의 거닐기든, 발바닥으로 흙의 기운을 느끼며 걷는 실제의 길이든, 목적 없이 발길 닿는 대로 흘러갔던 자유로운 길이든, 그 모든 것은 결국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모습의 길이었다. 때로는 다른 이의 지혜로운 글에서 길을 배우고, 때로는 숨 막히게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답을 찾으며, 또 때로는 아무런 생각 없는 고요한 걸음 속에서 길을 알아차렸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잊고 지냈던 소중한 자신과 따스하게 만나고, 오래된 상처를 부드럽게 매만지며, 다가올 더 깊어진 내일을 위한 준비를 한다. 이 다섯 갈래의 길은 처음에는 서로 다른 곳을 향하는 듯 보여도, 결국은 ‘참된 나’를 찾아 떠나는 하나의 커다란 삶의 지도 위에 그려진, 서로 따뜻하게 연결된 소중한 길이었다.


어쩌면 당신의 마음속에도 분명, 아직 당신조차 알아채지 못한 수없이 많은 아름다운 오솔길이 조용히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오늘, 아주 작은 용기를 내어 그 길 위로 당신의 첫걸음을 가만히 옮겨보는 것은 어떨까. 그 길 위에서 당신이 만나는 모든 풍경과 모든 속삭임, 모든 순간이 당신에게 예상치 못한 작은 평온과 삶을 가만히 보듬는 깊은 발견을 선물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당신의 모든 걸음을 조용히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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