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속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푸른빛이 희미하게 남은 새벽, 세상은 아직 깊은 숨을 내쉬는 듯 고요하기만 하네요. 창밖은 아직 어둠에 잠겨 있고, 세상의 모든 소리가 잠든 듯한 그런 시간. 언젠가부터 시계 소리보다 먼저 눈이 떠지는 날들이 익숙해졌어요. 예전이라면 정해진 시간에 울리는 알람 소리에 맞춰, 마음 한구석 보이지 않는 무게를 느끼며 하루를 열었을 텐데 말이죠. 늘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는,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안 된다는 그런 압박감 같은 것이었을까요.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게 참 다행이다 싶어요. 시끄러운 소리 대신, 이 조용한 어둠 속에서 오늘 하루는 또 어떤 모습일까 가만히 그려보는 시간이 먼저 찾아오곤 해요.
조금이라도 뒤처질까 봐, 뭔가 놓칠까 봐 마음 졸이며 시간에게 등 떠밀려 달려가던 날들도 분명 있었죠.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던 그 시간들. 하지만 그 기억은 이제 오래된 앨범 속 풍경처럼 아련하게 남아 있을 뿐이네요. 그 빈자리에는 천천히, 그리고 깊게 여유라는 감각이 스며든 것 같아요. 처음에는 이 느려진 속도가 조금 낯설기도 했지만, 이제는 제법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오늘은 또 어떤 작은 기쁨들이 내 하루를 채워줄까요? 무얼 하며 이 시간을 내 마음에 들게 보낼 수 있을까. 그런 기분 좋은 생각들이 동트기 전 어스름 속에서 저를 감싸는 것 같아요.
중년이라는 시간의 강물은 정말 예고 없이 방향을 틀어, 저를 다른 속도와 다른 깊이의 세상으로 데려다 놓는군요. 이건 나이가 들어가는 것과는 다른, 어떤 감각의 변화 같아요. 삶을 마주하는 태도나 세상을 느끼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는 것에 가깝다고 할까요?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조금은 가볍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이런 변화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주말 아침엔 분주하게 무언가를 하기보다, 찻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내와 마주 앉는 시간으로 시작하는 날이 많아졌어요. 햇살이 잘 드는 창가 자리에 앉아 그날의 기분에 맞는 차를 고릅니다. 오늘은 부드러운 녹차, 내일은 향긋한 홍차. 때로는 이름도 생소한 허브차를 시도해보기도 하죠. 정성스레 고른 찻잔에 차를 천천히 우리는 시간. 그 자체로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이 되죠. 찻잔을 감싼 손으로 온기가 스며들고, 코끝에 감도는 차분한 향기에 마음이 가라앉는 기분이 참 좋아요. 창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동네 풍경을 바라보며 눈을 맞추고 나누는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들이 따뜻한 차 한 잔처럼 편안하게 오고 가죠. 어쩌면 대화 내용보다 그 함께하는 시간 자체가 더 중요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차 한 잔에 담긴 온기를 나누고 나면, 우리는 편안한 옷차림으로 집을 나서죠.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늘 집에서 멀지 않은 공원이에요. 나란히 걷는 그 길 위에서 우리의 발걸음은 느긋하고 편안해요. 계절이 바뀔 때마다 공원은 다른 얼굴을 보여주죠. 봄이면 연둣빛 새순이 돋아나고, 여름이면 짙푸른 녹음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고, 겨울이면 앙상한 가지 위로 차가운 바람이 지나가요. 그 변화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고, 길가의 작은 꽃이나 발밑의 낙엽에 잠시 시선을 주기도 하죠. 공원을 오가는 사람들의 생기 있는 모습, 아이들의 웃음소리,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 속에서 나도 이 세상의 한 부분이라는 걸 새삼 느끼기도 하고요. 때로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아무 말 없이 파란 하늘만 올려다볼 때도 있어요.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생각들이 하얀 구름처럼 흘러가는 걸 지켜보면서요. 정말 별것 아닌 산책인데, 이 시간이 주는 일상적인 기쁨은 생각보다 크답니다. 꼭 손을 잡지 않아도 서로에게 전해지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그런 주말을 보내고 있어요. 몸을 움직이며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가벼워지고요.
저녁이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과 함께하는 시간이 좋아요. 요즘은 유튜브에서 추천해주는 플레이리스트를 따라가며 새로운 음악의 세계를 접하는 재미가 꽤 괜찮네요. 예전엔 미처 몰랐던 장르의 음악들을 만나기도 하고, 젊은 시절 즐겨 듣던 노래를 다시 발견하고 반가워하기도 하죠. 무심히 듣다가도 마음에 깊이 와닿는 곡을 만나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가만히 그 소리에 귀 기울여 봐요. 그 선율이 주는 감정에 집중해보는 거죠.
때로는 문득 떠오르는 짧은 글귀나 단어들이 있을 때, 그걸 얼른 메모장에 적어두었다가 서툰 가사로 엮어보기도 해요. 그리고 수노(Suno) 같은 인공지능 도구의 힘을 빌려 그 가사에 어울리는 멜로디를 입혀보는 거죠. 어떤 날은 제법 그럴듯한 곡이 만들어져 혼자 만족해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영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워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해요. 몇 번이고 다시 시도하며 조금씩 다듬어가는 과정 자체가 즐거워요. 완벽하지는 않아도 내 마음속의 어떤 조각이 소리로 표현되는 순간의 재미는 또 다른 느낌을 주네요. 그렇게 정리되지 않던 생각들이 글이 되고 노래가 되면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기분이 들어요. 디지털 세상이 주는 또 다른 시간 감각이랄까요. 그러다가도 어느 날 문득, 그날 느꼈던 감정들을 글로 남기고 싶어질 때면 서랍 속 오래된 일기장을 꺼내 들기도 하고요. ‘오늘은 하늘색이 참 예뻤다’, ‘아내가 끓여준 김치찌개가 정말 맛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덕분에 실컷 웃었다’… 뭐 이런 아주 평범한 순간들을 서툰 글씨로 담아두는 거죠. 예전에는 이런 사소한 기록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는데, 이제는 이런 작은 순간들이 모여 하루를, 그리고 삶을 채워간다는 걸 느껴요. 그렇게 하루를 돌아보며 ‘오늘도 참 괜찮은 하루였네, 이만하면 됐다’ 하고 마음으로 마침표를 찍는 날들이 자꾸 늘어가는 게 신기해요. 무언가를 더 채우려 하기보다, 지금 가진 것들에서 오는 일상의 만족을 찾아가는 중인가 봐요.
시간의 흐름은 어김없이 몸으로도 느껴지죠. 조금 무리했다 싶은 날이면 무릎이 신호를 보내오죠. 젊었을 때는 하룻밤 자고 나면 거뜬했는데, 이제는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리는 걸 느껴요. 그럴 때면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잠시 숨을 고르고요.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쉬어가는 법을 배우는 중이에요. 아내는 그런 저를 보고 말없이 따뜻한 물을 받아 족욕기를 내어주죠. 그건 이제 우리만의 익숙한 습관 같은 것이 되었어요. 나란히 앉아 발을 담그고 있으면, 발끝부터 시작된 온기가 몸으로 퍼져나가며 쌓였던 피로가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어요. 서로의 건강을 챙겨주는 방식이 꼭 대단한 무엇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걸 이제는 알아요. 그저 서로 불편한 곳은 없는지 살펴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고, 작은 온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와 힘이 되죠. 밤이 깊어갈수록 우리의 대화는 어떤 정해진 주제 없이 흘러가지만, 그 속에는 말로 다 표현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서로를 향한 마음이 담겨있어요. 함께 살아온 시간만큼 쌓인 이해와 편안함이랄까요. 때로는 창밖의 짙은 어둠을 보며 아무 말 없이 마주 앉아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 침묵이 전혀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아요. 오히려 조용한 가운데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마음을 더 깊이 나누는 하나의 방식이 되었죠. 말없이도 통하는 편안함, 그게 참 좋아요.
친구들과 만나는 모습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어요. 젊었을 때는 북적이는 술자리에서 밤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당연했는데, 이제는 그런 시끌벅적함보다는 조용한 편안함이 더 좋아졌네요. 동네 카페 창가에 둘러앉거나, 날씨 좋은 날엔 공원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걸 더 즐기게 되었죠. 각자의 삶에서 건져 올린 일상의 작은 이야기들, 때로는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못했던 마음속 고민들을 조심스레 나누기도 하고요. 그럴 때면 꼭 명쾌한 해결책이나 조언이 필요한 건 아니에요. 그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죠. 함께 웃고 떠들었던 젊은 날의 추억을 떠올리며 또 한바탕 웃기도 하고요.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나오며 서로의 삶의 이런저런 모습들을 지켜봐 온 친구들이기에, 많은 말을 늘어놓지 않아도, 잠시 흐르는 침묵 속에서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고 다독여줄 수 있어요. 좋을 때나 힘들 때나 변함없이 곁을 지켜줄 거라는 믿음, 그런 관계들이 지금의 저를 단단하게 붙잡아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죠. 화려하거나 뜨겁지는 않아도, 따뜻한 난로처럼 서로에게 꾸준한 온기를 전해주며 기댈 수 있는 어깨가 되어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죠.
어쩌면 중년의 시간이라는 건, 환한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보다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닮아가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 그늘 아래에서는 세상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여유가 생기고, 숨 가쁘게 달려오느라 미처 돌보지 못했던 나 자신을 들여다볼 시간도 주어지죠. 더 이상 무언가를 서둘러 이루거나 세상의 잣대에 나를 맞추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제는 조금 느긋하게 내 속도에 맞춰 걸어가도 좋다고, 인생의 이 계절이 제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아요. 물론 그 과정이 늘 순탄하지만은 않았죠. 때로는 뒤처지는 것 같은 불안감에, 때로는 변화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흔들림 속에서 조금씩 방향을 찾아가는 중이에요. 숨 가쁘게 달려왔던 시간과 아직 오지 않은 시간 사이에서, 저는 이제야 나만의 편안한 속도와 보폭을 찾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에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모습, 세상이 정해놓은 성공의 기준을 따르기보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하루하루 내 마음을 따라 살아가는 날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행복한 중년’의 모습이죠. 동트기 전 새벽의 고요 속에서, 따뜻한 찻잔의 온기 속에서,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음악 속에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주고받는 따스한 눈빛 속에서… 저는 오늘도 이 아름다운 느긋함을 조용히 누리며 제 시간 속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습니다. 당신의 시간은 지금 어떤 속도로 흐르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