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편 - 내일의 약속보다, 지금의 연필 한 자국
해야 할 일은 머릿속에 분명히 떠오른다. 오늘 안에 마쳐야 할 업무가 있고, 오래도록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계획도 여전히 목록 속에 남아 있다. 머릿속은 분주하게 돌아가지만, 몸은 어느새 소파를 향해 있다. 아침이 지나고, 점심이 흐르고, 저녁 무렵이 되면 다시 다짐한다.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는 시작하자." 그리고 하루는 저물고, 마음 어딘가엔 또 하나의 자책이 은근히 스며든다. 왜 매번 같은 흐름을 반복하는지,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렵다.
무언가를 뒤로 미루고 있다는 느낌은 생각보다 깊게 마음을 누른다. 일은 손도 대지 못한 채, 멈췄다는 사실만이 마음속에 고인다. 점점 그 일이 두려워지기 시작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면서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 자신에게 실망이 밀려든다. 뚜렷한 이유 없는 무력감과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의심까지 마음속에 자리를 잡는다. 시간이 흐른 것이 아니라 마음의 질서가 흩어진 것이라는 걸, 어느 순간 직감하게 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데 능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좀 더 괜찮은 상태에서 시작하자", "지금 이 컨디션으로는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거야." 이 말들은 스스로를 보호하는 언어처럼 들린다. 진지한 태도에서 비롯된 판단이라 믿기도 한다. 하지만 속마음은 안다. 이것이 시작을 미루기 위한 핑계에 가깝다는 것을.
게으름은 요란하지 않다. 잠깐의 피곤함, 미세한 무관심으로 스며든다. ‘조금만 더 있다가’ 하며 시간을 밀어두고, 어느 순간 ‘굳이 이걸 해야 하나’는 생각이 자리를 잡는다. 그렇게 유예의 시간이 반복되면, 어느새 그것이 습관이 되어 일상의 중심을 차지한다.
이 습관 안에는 의외의 감정이 숨어 있다. 미루는 행동은 두려움이 만들어낸 또 다른 형태일 수 있다. 시작하더라도 원하는 만큼 해내지 못할까 봐, 누군가보다 뒤처질까 봐, 충분히 노력했음에도 결과가 따르지 않을까 봐 우리는 발을 멈춘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엄격한 이들이 종종 가장 많이 미룬다.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뒤로 미루고 있는 현실을 마주할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실망이 일어난다. 원하는 만큼 잘 해내고 싶다는 바람이 크면 클수록, 그 앞에 서는 일이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이미 피로감은 쌓여 있고, 진전은 없는데도 마음은 번잡하다. 노력의 방향이 시작이 아닌 회피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준이 높을수록, 그 기준에 닿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게 느껴진다. 결국 스스로 만든 기대의 틀에 갇혀, 자유롭게 움직이기조차 어려워진다.
이쯤에서 마음속에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지금 정말 하기 싫어서 멈춘 걸까?” “아니면 해냈을 때를 상상하지 못해서 주저하고 있는 걸까?”
이 질문에 진심으로 답하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감정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애써 외면하지 않고, 그 감정을 조용히 마주하는 순간부터 변화는 서서히 시작된다.
변화는 큰 결심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고 소소한 실천에서 시작된다. 모든 걸 완벽히 해내야 한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눈앞의 일 앞에 가만히 앉는 연습을 해보는 것. 하루에 단 10분, 책상 앞에 앉아 있기. 오늘은 한 문장만 적어보기. 그렇게 한 번의 시도, 아주 작은 행동을 넣어보는 것이다.
이 작은 움직임들이 쌓이면, 한때 무너졌던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천천히 회복된다. ‘나는 할 수 있다’는 감각이 내면에 다시 자리 잡는다.
이런 실천은 스스로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어떤 성과를 냈다는 이유가 아니라, 움직였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을 붙잡아 준다. 삶이란 결국,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사소한 선택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알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보다, 하나라도 시도해보려 한 날이 더 깊이 피곤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기대한 만큼 해내지 못했다는 실망, 의욕과 어긋난 행동, 그리고 그런 나 자신을 바라보는 묵직한 아쉬움. 하루가 끝날 무렵,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간다. ‘왜 이렇게 마음처럼 되지 않을까.’ ‘나는 왜 늘 제자리일까.’
하지만 그런 감정들조차 더 나아지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이대로 괜찮은 걸까’라는 낮은 속삭임, 멈춘 자신에게 던지는 간절한 질문. 그 조용한 안간힘이 지금의 당신을 여기까지 이끌어온 건 아닐까.
지금 어떤 일이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가. 손도 대지 못한 채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는 그 일. 혹시 자꾸 미뤄온 그것이 떠오른다면, 지금 이 순간, 조용히 마주해보자. 목록 옆에 연필로 작은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은 '시작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움직이려는 사람'이 되는 첫 동작이 될 수 있다.
게으름이라는 말은, 너무도 쉽게 낙인이 되어 사람을 규정한다. 하지만 그 말 안을 들여다보면, 아직 준비되지 않은 마음의 무게, 작아진 자신에 대한 신뢰, 스스로를 밀어낸 기대가 숨어 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에 대한 믿음은 옅어지고, 움직이지 못하는 날들이 쌓이면서 의심은 천천히 자신을 삼킨다.
그러나 멈춘다는 것은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잠시의 숨 고르기일 수 있다. 더는 버틸 수 없을 때 잠시 내려놓는 것도, 삶의 한 방식이다.
중요한 건, 그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겠다는 내면의 약속이다. 자신을 질책하지 않고, 조용히 다시 걸음을 내딛는 일. 오늘 그 일이 무엇이든, 잠시 그 앞에 앉아보자. 무언가를 해내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가만히 손 하나를 얹는 마음으로. 그 작은 움직임이 다시 삶을 흔들기 시작한다.
창밖의 바람이 커튼을 살짝 밀어내듯, 우리의 마음도 아주 조용하게 방향을 바꾼다. 그건 특별한 각오가 아니라, 하루의 고요한 균형 속에서 태어나는 흐름이다.
내일의 계획을 세우기보다, 지금 책상 위에 메모지 한 장을 올려두는 것부터.
펜을 들어 할 일 하나를 적는 순간, 우리는 다시 삶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지금 이 순간의 조용한 시작. 그것이 당신을 다시 삶으로 데려갈 수 있다면, 그 한 걸음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는 여전히, 걷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