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 나를 위해 쓰는 시간들
도심의 아파트 창밖으로, 아직 식지 않은 한여름 밤의 열기 속에서 매미들이 간간이 울고 있다. 낮 동안 맹렬했던 울음은 잦아들었지만, 그 여운은 끈질기게 밤하늘을 붙들고 있다. 고층 아파트 숲 사이로 스며든 매미의 울음은 지친 도시의 숨결과 뒤섞이며 이 밤의 정적을 천천히 밀어낸다. 하루가 저물고도, 여전히 무엇인가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알리는 소리. 그 울음 끝에 남은 건, 지치면서도 놓지 않는 생의 감각이다.
문득, 나는 멈춰 선다. 이 조용한 밤의 끝자락, 모두가 잠든 듯 고요한 순간에도 삶은 쉬지 않는다. 매미의 울음은 어쩌면, 그렇게 매달려 있는 우리의 뒷모습을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뜨거웠던 낮의 시간을 버티고 견디며,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안고 선 채 다시 내일로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처럼.
매일 아침, 나는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리는 나만의 의식을 치른다. 투박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그라인더와 서서히 퍼지는 고소한 향은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다. 주전자 안의 물이 데워질 때면, 창밖에서 스며든 새벽빛이 조용히 방 안을 채운다. 그 순간부터, 하루는 비로소 시작된다.
손끝으로 물방울을 천천히 떨어뜨린다. 필터 위로 스며드는 물줄기, 그 위로 피어오르는 따뜻한 증기, 그리고 여운처럼 남는 커피 향기. 한 잔의 커피가 완성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나에게 작고도 깊은 의미를 지닌다. 양손으로 감싼 따뜻한 잔이 전하는 온기는 손끝에서 어깨로, 그리고 가슴으로 천천히 번져간다.
그 온기 속에서 무언가 적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책상 위 노트를 펼친다. 예전에 써두었던 원고를 펼치면 그날의 마음이, 그때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많이 쓰지 않아도 괜찮다. '햇살이 좋았다', '불안이 조금 줄었다' 같은 짧은 문장에도 하루가 오롯이 담긴다.
코로나 시절, 외출이 어려웠던 날들 속에서 나는 집 안의 새로운 루틴을 발견했다. 바로 이 고요하고 반복적인 시간이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나에게는 분명한 표식이 되는 시간. 습관처럼 이어지는 이 순간은 내가 나에게 보내는 하나의 신호이자, 어제의 나를 오늘로 이끌어주는 통로이기도 하다. 지키지 못한 날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면 그런대로,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기회가 된다. 그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고, 오직 나만 알고 있는 시간. 그것은 바로 내가 나와 맺은 조용한 약속이다.
괜찮지 않은 날이 있다. 말이 막히고, 감정이 한 방향으로만 쏠리는 날. 그럴 때 나는 억지로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그저 멈춰 서 있다. 무언가를 해결하려 애쓰기보다, 그대로 두는 법을 배워간다. 돌봄은 손을 내미는 일인 줄만 알았는데, 어쩌면 가장 필요한 건 가만히 기다려주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급하게 해결하려고 하면 오히려 더 꼬여버리는 실타래처럼, 마음도 마찬가지다. 그 기다림 안에서 마음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느낀다. 지금의 나를 다그치지 않고, 다만 옆에 있어주는 그 태도. 그것이 나를 지탱한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조용히 거리를 두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예전에 한 친구가 답 없는 내 메시지를 하루가 지나도록 말없이 기다려주었던 것처럼, 나를 향한 배려가 존중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나의 고요를 존중해 주는 그 간격. 그 틈에서 관계는 다시 숨을 쉰다.
요즘은 속도를 잴 수 있는 도구가 많아졌다. 걸음 수, 일의 양, 반응 속도 등 다양한 수치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수치가 마음을 대신할 수는 없다. 나는 느리게 걷는다. 사람들의 기대보다 나의 호흡에 맞춘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기로 한다. 앞선 걸음에 조급해하지 않고, 내 걸음을 믿기로 한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가 아니라, 지금 어떻게 걷고 있는지가 나에게 더 중요하다. 급한 메시지에 바로 답하지 않고 하루를 미루거나, 타인의 피드백을 조금 늦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한다. 자신만의 속도를 찾는 것, 그것이 곧 진정한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이라고 믿는다.
일을 멈추면 허전하고, 뭔가 놓친 것 같은 느낌이 따라오곤 한다. 하지만 멈춤이야말로 제 방향을 찾는 중요한 움직임일 수 있다. 마치 배가 항해 중에 잠시 닻을 내리는 것처럼, 나 또한 멈춰 서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다시 확인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누군가 정해준 규칙이 아닌, 내 몸이 느끼는 리듬에 귀를 기울인다. 걷던 길을 멈추고 벤치에 앉는 일. 핸드폰을 내려놓고 조용히 숨을 들이쉬는 일. 그렇게 쉬는 연습을 하고 있다. 멈추는 것에 굳이 이유를 붙이지 않아도 괜찮다. 지쳤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머물고 싶어서 쉬는 것이다. 가만히 멈춰 선 자리에 앉아 있으면, 마음속 먼지들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밤이 깊어지면 불빛도 말수가 줄어든다. 그 조용함 속에 나는 앉아 있다. 책장을 넘기기도 하고,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기도 한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충분한 시간. 그 안에 내가 있다. 바깥세상이 나를 부르지 않는 이 시간에, 나는 조용히 나를 부르고 묻는다.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 '무엇이 나를 무겁게 하는지'. 가끔은 대답이 없지만, 그 침묵조차 나를 향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침묵은 곧 나를 향한 깊은 경청이자,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시간이다.
오늘 하루도 바빴다. 하지만 그 안에 내 시간이 분명히 있었다. 창가에 앉아 바라본 노을, 조용히 들었던 음악, 잠시 쉬어간 산책길. 그 순간들은 누가 보지 않아도 의미가 있었다. 나 자신을 놓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거기 있었다. 크게 바뀐 건 없지만, 나에게 시간을 내주었다는 사실 하나로 오늘은 충분하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스스로에게 건넨 이 작은 선물들이 모여, 나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채워줄 것이다. 오늘 나는 어떤 태도로 나를 기다려주었는가. 바쁘다는 이유로 나를 놓아버리진 않았는가. 조용히 묻고 싶어진다.
시간은 물처럼 흐르지만, 그릇을 놓는 방식에 따라 머무는 결이 달라진다. 그 시간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나만의 정원 같다. 그 안에선 나는 나를 알아본다. 나를 위한 시간을 만든다는 건, 그 물의 흐름을 내 마음의 중심으로 돌리는 일이다. 나를 위해 쓰는 시간은, 내가 나를 잊지 않기 위해 남겨두는 소중한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