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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눈, 듣는 마음》

26편 - 경청은 나를 비우고 너를 담는 일

by 정성균

– 경청이라는 조용한 기술에 대하여


말을 멈출 때, 비로소 마음이 들린다


말은 생각보다 빠르고 생각은 감정보다 앞선다. 우리는 대화의 자리에 앉는 순간, 이미 머릿속으로 다음 말을 준비한다. 상대방의 입이 움직이는 동안에도 우리의 뇌는 바쁘게 돌아간다. 어떻게 반박할지, 어떤 조언을 할지, 나의 경험을 어떻게 덧붙일지 끊임없이 계산한다. 눈은 상대를 향하지만, 마음은 이미 나의 차례를 기다리는 무대에 서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듣는 척’하는 순간의 모습이다. 대화가 오해로 흐르는 지점은 경청이라는 행위가 형식적인 행동으로 시작된 자리에서 비롯된다.


진정한 경청은 고개를 끄덕이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말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태도다. 자신의 목소리를 잠시 멈추고, 마음속의 소란을 잠재우는 침묵. 그 침묵 속에 비로소 타인의 말이 들어올 틈이 생긴다. 그 틈을 지키는 일은 무척 어렵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말로 표현하고 싶은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듣는 척 잘하는 순간은, 어쩌면 가장 듣고 있지 않을 때일 수 있다.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갇혀, 정작 눈앞의 사람 목소리는 흘려보내고 있을 때.


선인들의 경청, 그리고 침묵의 지혜


선인들은 경청을 단순한 듣기 행위가 아니라, 인간관계와 자기 수양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겼다. 그들은 듣는 것을 마음을 비우고 상대를 받아들이는 행위로 보았다.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참된 앎이다”라고 했다. 이는 상대의 말을 들을 때 성급하게 아는 체하지 않고,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두는 겸허한 마음에서 경청이 시작됨을 보여준다.


맹자는 “사람의 마음을 들으려면, 그 말의 기운을 보아야 한다”라고 가르쳤다. 이는 말의 표면적인 뜻을 넘어, 그 말에 담긴 감정과 의도까지 읽어내는 깊은 경청을 강조한다. 흙 속에서 물길을 찾아내듯, 상대의 이야기 속에서 그의 진정한 마음을 찾아내는 기술이다.


불교에서도 경청은 중요한 수행이다. 무심의 상태는 마음의 소란을 내려놓고, 세상의 소리를 있는 그대로 듣는 경지다. 이는 자신의 선입견이나 판단을 내려놓고 상대의 이야기를 온전히 수용하는 경청의 태도와 이어진다. 선인들에게 경청은 관계를 맺는 기술을 넘어, 자신을 다스리고 지혜를 얻는 수단이었다. 그들은 침묵의 시간을 통해 더 깊은 소리를 들었고, 그 침묵 속에서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다.


반응 없는 순간에, 감정은 전해진다


누군가 용기를 내어 마음 깊은 이야기를 꺼냈을 때, 우리는 종종 서둘러 반응하려 든다. ‘내가 널 이해해’라는 생각에 빠져, 바로 조언하거나 나의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반응은 상대의 이야기가 마음속에 자리 잡기도 전에 덮어버린다. 경청은 알겠다는 성급한 판단이 아니라, 알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 마음은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눈빛과 숨결로 더 분명하게 전달된다. ‘내가 혹시 듣는 대신 해결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나의 조언으로 그 사람의 이야기가 가려진 건 아닐까?’


때때로 아무 말 없는 고요한 표정이 가장 깊은 공감을 전한다. 말의 장벽을 넘어선 그 침묵의 공감은, ‘네 마음이 잘 전해졌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상대의 이야기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그가 꺼내놓은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교감을 경험하게 된다.


관계의 거리는, 말의 간격에서 결정된다


관계의 깊이는 말의 양이 아니라 말의 간격에서 결정된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말의 간격을 조절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면, 마음은 멀어진다. 모든 틈을 자신의 목소리로 채우려는 마음은 상대의 존재를 지우는 것과 같다. 적당한 침묵과 마음의 여백이 있는 관계는 서로를 억누르지 않고 더 오래 지속된다. 말하지 않고도 함께 있을 수 있는 고요한 거리가 신뢰와 안정의 바탕이 된다.


우리는 묻게 된다. 나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들었는가, 그의 말을 멈추게 한 건 아닐까? 말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이 그때 나의 표정과 눈빛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가? 소통은 말이 오가는 행위가 아니다. 말이 멈춘 자리에서 발생한 감정의 흔적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 흔적은, 내가 그에게 얼마나 집중했는지에 따라 선명해진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들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나의 존재가 상대에게 위로가 되는, 그런 조용한 울림을 가진 사람.’


듣는다는 건, 그 사람의 시간에 머무는 일이다


말이 길어진다는 건, 그 사람이 누군가 진정으로 들어주기를 오래 기다려왔다는 증거다. 경청은 그 이야기가 옳은지를 판단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감정과 시간이 담긴 이야기에 온전히 머무는 일이다. 쉽게 판단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으며, 상대방의 감정이 다 나올 때까지 입을 닫고 마음을 여는 일.


우리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합리적인지를 재단하려 든다. 그러나 경청의 핵심은 판단에 있지 않다. 그 사람의 감정을 온전히 느끼고, 그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에 있다. 그저 끝까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한 사람의 마음이 다시 힘을 얻는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상대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되찾게 된다.


내 말을 줄일수록, 그 사람은 자신의 언어로 돌아간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언어가 자신의 길을 찾도록 돕는 일이다. 서두르지 않고, 문장을 끊지 않으며, 서툰 말들조차도 받아들이는 안전한 공간을 마련해 주는 일.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상대가 말을 마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던가? 나의 말로 상대의 감정을 정리해 버린 건 아닐까?’


우리는 흔히 듣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판단을 계속 넣고 있었다. “그건 이렇게 생각하면 되지 않아?”, “그때 나 같으면 이렇게 했을 거야” 같은 판단은 상대방의 감정을 막는 차가운 벽이다. 잘 듣는 사람은 말의 내용보다 그 속에 담긴 마음을 먼저 받는다. 그 마음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상대는 자신의 진짜 감정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말 없는 순간에도, 마음은 이어진다


오랫동안 말없이 있어도 어색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것은 그가 끊임없이 말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귀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해야만 가까운 관계가 유지된다는 것은 오해다. 때로는 침묵이 가장 깊은 대화가 된다.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느끼고,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상대방이 어떤 말을 하든, 어떤 감정에 있든, 있는 그대로 그 옆에 있어주는 것. 그것이 진짜 듣는 일이다. 관계는 말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머문 시간으로 연결된다.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보이지 않는 끈으로 단단히 이어진다.


현대인들에게 경청이 필요한 이유


현대 사회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끊임없이 말을 하고,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고, SNS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이런 환경은 우리를 말하기에 능숙하게 만들지만, 듣기에는 서툴게 한다. 빠르고 효율적인 소통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우리는 상대의 감정이나 깊은 이야기를 놓치기 쉽다.


디지털 기기를 통해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 관계에서는 단절감을 느끼는 현대인이 많다. 이는 스크린 뒤에서 자신의 말만 쏟아내고, 상대의 목소리를 듣는 훈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경청은 개인의 대화 기술을 넘어, 사회 전체의 소통 능력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타인의 이야기를 존중하고, 공감하는 태도는 갈등을 줄이고,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는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기초가 된다.


작지만 강한 반전 – 진심은 듣는 자리에 꽃핀다


예전에는 어머니와의 대화가 자주 어긋났다. ‘왜 이렇게 생각이 다를까’라며 속상했던 날이 많았다. 나의 논리를 내세우고, 어머니의 생각을 반박하며, 그럴 때마다 서로의 마음은 멀어졌다. 어느 날, 반박도 질문도 하지 않고 듣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어머니의 말이 길어지자, 그 속에 있던 외로움과 서운함, 깊은 사랑의 감정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전에는 듣지 못했던 어머니의 마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서로를 향한 오해는 조금씩 사라졌다. 대화는 오히려 적어졌지만, 마음은 더 자주 닿았다. 들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은 견뎌낼 수 있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에게 ‘너의 존재 자체가 소중해’라고 말해주는 것과 같다.


나는 대화할 때 정말 ‘듣고’ 있었는가


오늘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듣고 있었을까? 혹시 속으로는 내 생각을 정리하고, 다음 말을 준비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말 자체를 듣기보다 말의 틈을 헤아리고, 그 안에 숨겨진 나의 생각을 찾으려 했던 건 아닐까? 마음을 다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것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는가?


말보다 오래 남는 것은, 그 사람이 나와 대화할 때 느꼈던 감정이다. ‘말을 들으니 좋았다’가 아니라, ‘들어주는 줄 알아서 위로가 되었다’는 그 흔적. 그것이 바로 소통의 진짜 모습이다. 나의 존재가 상대에게 깊은 안도감을 주었던 그 순간이, 관계가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조용한 마무리 – 말은 멈추어야, 마음은 열린다


경청은 듣는 행위가 아니라, 삶의 태도다. 그 태도를 가진 사람만이 따뜻한 대화를 만들고, 말 없는 자리에도 진심을 머물게 한다. 그 사람의 말속에서 나를 찾지 않고, 그 사람의 말속에 그 사람을 남겨주도록 돕는 일. 그것이 경청의 본질이다.


오늘 나는 과연, 듣고 있었을까? 나의 침묵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그런 조용한 경청을 해본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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