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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눈, 듣는 마음》

25편 - 감정 트리거는 내 안에 묻어둔 감정을 다시 말하게 한다

by 정성균

오래된 감정의 흔적이 현재의 자극에 몸으로 반응하며 되살아난다


말하지 못한 감정이 몸 안에서 갑작스럽게 반응할 때가 있다.


"왜 저런 말에 울컥하지?"

"별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예민해졌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순간들. 아무렇지 않게 스쳐 지나가던 말 한마디, 익숙한 거리의 풍경, 오래된 냄새 하나에도 마음이 쿵 내려앉고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감정은 오래된 나뭇가지처럼, 겉은 마른 줄 알았던 가지에서 갑자기 물방울처럼 고여 흐르는 느낌이다. 이러한 경험은 종종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만들기도 한다.


오랫동안 나는 그런 감정을 설명하지 못했다. 누군가 이유를 물으면 "예전 생각이 나서"라고 얼버무리곤 했지만, 그것이 기억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 감정은 설명에 앞서 몸의 긴장으로 다가왔고, 내 안의 어떤 방어 기제가 작동했다는 신호였다. 이 감정들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고, 때로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사람들 앞에서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지만, 속으로는 갑작스러운 불편함과 혼란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것이 화인지, 두려움인지, 슬픔인지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그런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나는 괜히 민감하게 굴었다고, 너무 유난스럽다고 스스로를 탓하기 바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감정은 현재의 자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오래된 기억이, 현재의 자극과 연결되면서 반응한 감정의 흔적이었다. 이 흔적들은 나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무의식적인 반응의 결과였다. 우리 모두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반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심리학 속 '트리거'의 의미와 종류


심리학에서 트리거(Trigger)는 특정 생각, 감정, 행동을 유발하는 심리적 자극을 의미한다. 마치 총의 방아쇠처럼 어떤 반응을 촉발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트리거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며, 개인에 따라 작동 방식이 다르다.


트리거는 외부적인 자극(소리, 시각, 냄새, 특정 장소, 사람, 사건 등) 일 수도 있고, 내부적인 자극(특정 생각, 감정, 신체적 감각 등) 일 수도 있다. 이러한 트리거에 대한 반응은 감정적(불안, 공포, 분노 등), 인지적(특정 생각 패턴, 기억 회상 등), 행동적(특정 행동 반복, 회피 등) 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트리거가 단순히 자극에 그치지 않고, 그에 대한 특정 반응을 유발한다는 점이다. 어떤 것이 트리거로 작용하는지는 사람마다 매우 다르며, 과거의 경험, 특히 트라우마 경험이 트리거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유 없이 올라온 감정의 정체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현재의 상황에 대한 순수한 반응일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감정 트리거(emotional trigger)에 의해 유발된다. 감정 트리거는 특정 감정이나 정서적 반응을 유발하는 자극의 지점이다. 감정은 현재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과 연결된 패턴에서 나타나는 경우가 훨씬 많다. 특히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감정 반응들은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연인의 무심한 말 한마디에 눈물이 쏟아지거나, 직장 상사의 특정 말투에 몸이 굳어버리는 것. 어쩌면 그 말투가 어릴 적 나를 질책하던 부모님의 목소리를 떠올리게 했을 수도 있다. 과거에 타인에게 지적받았던 경험, 중요한 사람에게 버려졌던 순간, 혹은 어떤 상황에서 무력함을 느꼈던 그때의 말 못 한 감정들이 지금과 비슷한 분위기, 말투, 눈빛과 맞닿을 때, 우리 몸은 그 당시처럼 긴장하고 반응한다.


카페에서 들려온 말투 하나에 누군가의 표정이 굳는다.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그거 왜 아직 안 했어요?"라고 말하는 순간, 한 여성이 고개를 돌리고 숨을 깊게 들이쉰다. 그 말투는 몇 해 전 자신을 지속적으로 지적하던 상사의 말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아무 관련 없는 상황이지만, 목소리의 억양 하나가 오래된 기억과 맞닿자 그 자리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감정은 눈앞의 상황이 아닌, 그 너머에 연결된 감정의 선로를 따라 되살아난다.


이러한 감정 트리거는 일상 곳곳에 숨어 있다. 특정 향수 냄새가 예전 헤어진 연인과의 기억을 불러와 갑자기 슬픔을 느끼게 하거나, 동료가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과거의 스트레스 가득한 상황을 상기시켜 극심한 짜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특정 장소에 가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도 비슷한 경우다. 이 모든 반응은 우리가 의식하기도 전에, 생각보다 먼저 몸이 굳고 감정이 나타나는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인 과정이다. 우리가 그 반응을 '이상하다'라고 느끼는 순간에도, 이미 감정의 파도는 휩쓸고 지나간 뒤다. 뇌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의 상황을 판단하는 예측 기계와 같다. 과거에 위험했던 상황과 비슷한 신호가 감지되면, 뇌는 즉각적으로 경보를 울려 우리를 방어 태세로 이끄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들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 기제였다.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 우리 뇌는 비슷한 상황에 대한 경보 시스템을 구축해 놓은 것이다. 감정 트리거는 그 경보음이 울리는 순간과 같다. 이 경보 시스템이 때로는 과도하게 작동하여 현재의 안전한 상황에서도 불필요한 경보를 울린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는 이 경보음의 정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혼란스러워하고, 스스로를 비난하게 된다.


트라우마 트리거란 무엇인가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감정 트리거보다 훨씬 더 강하고 압도적인 트라우마 트리거(trauma trigger)가 존재한다. 트라우마 트리거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사건을 상기시키는 모든 자극을 의미한다. 이는 불편함을 넘어, 그 사건이 지금 다시 일어나는 것처럼 신체와 정신이 반응하게 만든다.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은 뇌가 과거의 공포에 갇혀 있는 상태가 지속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현재의 안전한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과거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게 된다.


트라우마 트리거는 우리 오감을 통해 작동한다. 예를 들어, 특정 냄새, 소리, 빛, 심지어 특정 단어나 상황이 트라우마와 연결될 수 있다. 군복무 중 폭발 사고를 겪은 참전 용사가 길거리에서 폭죽 소리를 듣고 순간적으로 몸을 웅크리거나 패닉 상태에 빠지는 경우, 이는 트라우마 트리거가 작동한 명확한 예시다. 폭죽 소리는 현재의 안전한 상황과 무관하게, 뇌가 과거의 위험을 재현하도록 만든다. 뇌의 반응은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반응이므로, 이성적인 판단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 외에도 교통사고를 경험한 사람이 갑작스러운 자동차 경적 소리에 심장이 뛰고 공황 상태에 빠지거나, 화재 현장에서 탈출한 사람이 탄 냄새를 맡고 과거의 공포를 다시 느끼는 경우가 트라우마 트리거의 대표적인 예다.


어린 시절 발표 시간에 실수를 하고 교실 가득 웃음소리를 들었던 경험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사람들 앞에 서는 순간, 손끝에 땀이 차고 숨이 가빠지는 반응으로 되살아난다. 아무도 비웃지 않았고, 누구도 공격하지 않았지만, 발표라는 구조와 시선의 분위기만으로도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그 교실 한가운데 서 있는 듯 반응한다. 이는 단순한 긴장을 넘어서, 감각에 새겨진 과거의 두려움이 현재를 가로막는 방식이다.


트라우마 트리거가 작동하면, 뇌의 편도체가 활성화되어 위협을 감지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담당하는 전두엽의 기능이 일시적으로 약해진다. 이로 인해 과거의 공포와 무력감이 현재의 감정으로 그대로 재현된다. 이러한 반응은 '민감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뇌의 방어 시스템이 과도하게 작동하는 현상이다.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은 트라우마 트리거 앞에서 감정을 통제하기 매우 어렵고, 해리 현상을 겪으며 현실과 분리되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현재의 안전함이 과거의 공포를 이겨낼 만큼 충분한 확신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말로 바꾸기 전에, 감정을 잠시 놓아주는 호흡


감정을 억누른다고 해서 이러한 반응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억압된 감정은 더 큰 힘으로 폭발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반응이 나타나는 그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한 걸음만 느리게 움직이는 것, 그것이 감정을 다루는 첫걸음이 된다.


이 '멈춤'의 기술은 감정이 솟구칠 때 말하거나 행동하기 전에 잠깐 숨을 고르고 기다리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숨 끝에 걸린 감정이 천천히 바람처럼 가라앉는 시간.


부부 사이의 대화 중, 남편이 "그 얘기 또 꺼낼 거야?"라고 말하는 순간, 상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짧은 말 한마디에 목소리를 높이기보다는, 눈을 감고 잠시 숨을 고르며 말없이 시간을 둔다. 충동적인 말 대신 "지금은 얘기하기 어려워"라는 말이 나온다. 그 짧은 멈춤이 감정의 물꼬를 바꾸고, 불필요한 갈등 대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작은 여지를 남긴다.


속으로 숫자를 세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 마음을 조여 오는 말 대신 "내가 지금 왜 이런 반응을 하고 있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것도 효과적이다. 이 짧은 멈춤의 시간은 무의식적인 반응의 고리를 끊고, 의식적으로 상황을 인지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이 여유 속에서 우리는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작은 틈을 만들게 된다.


다음으로는 그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 감정을 이름 붙일 수 있을 때, 그제야 비로소 감정이 말을 걸어온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불안이다."

"나는 무시당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름 붙여진 감정은 더 이상 무형의 파도처럼 우리를 휩쓸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마주하고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상이 된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우리 내면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준다. 이름표를 붙여 놓으면 우리는 그 감정의 실체를 인식하고,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추적할 수 있게 된다.


회식 자리에서 말을 끊고 농담을 던진 팀장의 행동에 겉으로는 웃었지만 내면은 차갑게 얼어붙은 누군가가 있다. 상황이 지나간 후, 그 감정의 실체를 곱씹어보며 떠오른 단어는 '무시당함'이었다. 처음에는 화인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존중받지 못했다는 서운함과 낙인감이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혼란은 하나의 구체적인 얼굴을 얻고 감정의 출처와 의미가 또렷하게 드러난다.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건강하게 표현하는 연습도 중요하다. 감정을 그대로 폭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공격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풀어내는 연습이다.


"그 말이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어."

"지금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보호하면서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렇게 내 감정을 지키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정은 더 이상 폭발하지 않고 흘러갈 수 있는 통로를 얻게 된다. 이 연습을 통해 우리는 감정에 휘둘리는 대신, 감정을 능동적으로 다룰 수 있는 힘을 기르게 된다. 이 과정은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관계를 회복하는 감정의 길


감정 트리거에 휩쓸린 사람은 현재 상황이 아니라 과거의 감정적 고통에 갇히게 된다. 이 때문에 대화는 오해로 흐르기 쉽고, 감정은 해결되기보다 더 깊이 고립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우리는 감정을 무조건 해석하려 하기보다, 조용히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상황과 감정을 분리해서 보고, "지금 이 자극이 정말 지금의 감정인지, 아니면 예전의 감정을 불러낸 것인지" 스스로에게 천천히 물어볼 수 있어야 한다. 이 물음이 내 안에서 시작될 때, 우리는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 감정을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이러한 자기 이해의 과정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상대방의 감정적 반응 역시 그 사람의 과거 경험과 연결된 것일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되면,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을 줄일 수 있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에게 더 큰 공감의 폭을 제공한다. 우리는 타인의 예측 불가능한 반응을 비난하기보다, 그 뒤에 숨겨진 그들의 역사를 보려고 노력하게 된다. 서로의 감정적 흔적을 존중하고 이해할 때, 진정한 연결이 시작된다.


A: "그 말, 내가 괜히 예민하게 들은 걸까?"

B: "아니야, 아마 전에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건 아닐까?"


이런 대화는 서로의 감정적 경험을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 나만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상대방의 반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은 관계를 더욱 건강하게 만든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감정이 불쑥 올라왔다면 그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잠시 멈춰서 그 감정의 정체를 물어보자. 그 감정은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오래된 당신의 방어이자 흔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그 흔적은 당신 스스로가 알아차릴 때, 비로소 당신의 편이 되어줄 것이다. 감정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자신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도 회복하고 성장시키는 방법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가장 진실한 방식이다. 이 길은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 끝에는 더 단단해진 내가 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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