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편 - 손끝에서 다시 배우는 삶
아직도 생생하다, 처음 스마트폰을 손에 쥐었던 날이. 손바닥에 닿은 감촉은 유난히 차갑고 매끄러웠다. 작은 거울처럼 빛을 반사하는 화면은 눈앞을 환히 밝혔다. 그러나 내 마음은 그 빛에 닿지 못한 채 무겁게 가라앉았다.
버튼 하나를 찾지 못해 이마에 땀이 맺혔다. 아이콘들은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으나 내 눈에는 낯선 지도처럼 얽혀 있었다. 옆에 앉은 아이의 손끝은 바람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사진이 찍히고, 메시지가 날아가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어졌지만, 내겐 아득히 먼 일이었다. 나는 전원 버튼조차 서툴게 누르다 결국 기계를 내려놓았다.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다.
그때 깨달았다. 배움은 나이가 들수록 더뎌질 뿐 아니라, 익숙함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그러나 작은 땀방울과 한숨 속에서 삶의 진실이 드러났다. 배움은 머리에서 싹트지만, 손끝의 반복 속에서만 몸에 스며들어 삶의 박자가 된다.
처음에는 화면 속 글자와 그림만 보아도 다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눈으로만 아는 지식은 쉽게 흩어졌다. 손끝에 닿지 않은 깨달음은 공허했다.
"또 엉뚱한 걸 눌렀잖아!"
앱을 잘못 눌러 꺼버리기 일쑤였고, 메시지를 보내려다 다른 화면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지도를 켰지만 화살표가 어디를 가리키는지 몰라 길모퉁이에서 서성였다. 알림음은 연이어 울리고 화면은 쉴 새 없이 반짝였지만, 내 손끝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쇼핑 앱도 마찬가지였다.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는 방법조차 몰라 같은 화면만 들여다봤고, 겨우 담아놓고도 결제 버튼을 찾지 못해 한참을 맴돌았다.
"괜찮아, 될 때까지 하는 거야."
나는 멈추지 않았다. 손끝이 길을 기억할 때까지, 몸이 익힐 때까지 다시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오래된 기억이 겹쳐졌다. 어린 시절, 처음 자전거 페달을 밟던 날. 수십 번 쓰러지고 무릎이 까져도 두 손은 핸들을 붙잡고 발은 페달을 굴렸다. 머리로는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알았지만, 몸은 실패 속에서만 그 감각을 배웠다. 스마트폰을 배우는 일은 그때와 닮아 있었다. 그 간극은 눈으로는 건널 수 없는 협곡이었고, 손끝이 흘린 수많은 흔적이 모여야만 다리가 되어주었다.
스마트폰에 조금 익숙해질 무렵, 또 다른 배움이 다가왔다. 커피였다. 늘 마시던 음료였지만 이번에는 내 손으로 한 잔을 완성해 보고 싶었다. 학원에서 처음 수업을 받던 날, 손에 쥔 스팀 피처는 낯설게 차가웠다. 노즐이 우유 속에 잠기자 금속이 떨렸다. 공기 속에는 날카로운 소리와 고소한 향이 섞여 들었다. 손끝이 흔들리자 거품은 거칠어졌다. 우유는 금세 달아올라 뜨겁게 부풀었다. 따뜻한 잔을 들었지만, 입술에 닿은 첫 모금은 내가 알던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 왜 이렇게 안 되는 거지?"
며칠 뒤 다시 연습에 나섰다. 스팀을 깊이 넣으면 거품이 일지 않았다. 겉만 스치면 공기만 과하게 들어가 요란한 소리만 남았다. 적당한 각도를 잡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귀를 기울이면 일정한 “치익” 소리 속에 숨어 있는 미묘한 차이가 들렸다. 균형을 놓치면 우유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라테 아트는 더욱 느리게 다가왔다. 피처를 기울여 우유를 따를 때 잔 위에는 얼룩만 번졌다. 하트를 그리려 했지만 모양은 번져 흩어졌다. 잔 속 그림은 매번 무너졌다.
"포기하지 마. 한 번 더!"
그럼에도 손은 피처를 놓지 않았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거품을 만들고 잔 위에 선을 그었다. 손끝은 점차 무게와 흐름을 기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거품이 잔을 고요히 채우고, 마지막 순간 하얀 무늬가 번졌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하트였다. 그 작은 무늬 하나가 마음을 가득 채웠다. 반복이 쌓이자 이제는 로제타의 잎맥을 그리고, 스완의 곡선을 따라 그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 후 커피는 아침의 의식이 되었다. 스팀의 숨소리는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되었고, 잔 위에 피어나는 무늬는 나에게 보내는 짧은 편지가 되었다. 배움은 우유 거품처럼 가볍게 피어올랐고, 잔 위에 남은 무늬처럼 소박했으나, 그 미세한 흔적 속에서 삶의 리듬은 다시 깨어났다.
새로운 기술을 익히면 언제나 부족함이 드러난다. 사진을 찍고도 저장된 곳을 몰라 당황했고, 메시지를 잘못 보내 머쓱해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부족함은 다시 배우게 하는 힘이 되었다.
"이건 어디서 찾아야 하지?"
젊은 세대에게 묻고, 검색하며, 하나하나 익히는 과정에서 이전에 몰랐던 기능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모른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다른 세대와 연결되는 다리였다. 나는 디지털을 배우고, 그들은 아날로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순간, 소통은 자연스레 이어졌다. 부족함은 우리 손에 쥐어진 작은 열쇠였고, 그 열쇠를 돌릴 때마다 배움의 문은 조금씩 넓어졌다.
스마트폰을 배우며 몸을 움직이고 기술을 익히는 과정은 결국 내면과 관계를 다시 배우는 길로 이어졌다. 서투른 손가락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냈던 날, 오랫동안 멀어진 친구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
“네게서 이런 이모티콘을 넣은 문자를 받다니 놀랍고 반갑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내겐 큰 감동이었다. 기술이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가깝게 이어 줄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 깊이 알았다. 작은 이모티콘 하나가 오래된 벽을 허물었다. 또한 고요한 시간 속에서 낯선 나를 배우기 시작했다. 창밖 풍경을 바라보거나, 마음이 가는 대로 붓을 움직이는 순간. 그동안 외면했던 내면의 작은 목소리들이 다시 들려왔다. "괜찮아. 너는 잘하고 있어." 두려움, 불안, 그리고 희미한 기쁨. 외부를 향한 배움은 결국 나를 향한 배움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잔잔한 호흡처럼 스며들어, 나와 타인을 이어 주는 다리 위에서 천천히 완성되었다.
배움은 즐겁지만, 그 과정에는 고통이 따른다. "아, 또 실패했네." 스마트폰 앞에서의 좌절, 뻣뻣한 손끝의 긴장, 잔 위 무너진 그림의 실망. 모두 배움의 일부였다. 자전거를 배우며 무릎이 까지는 고통이 없었다면 균형의 기쁨도 몰랐을 것이다. 스마트폰의 복잡함에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면 멀리 있는 이와 얼굴을 마주하는 따뜻함도 몰랐을 것이다. 고통은 성장을 위한 예고편이었다. 실패 앞에서 멈추는 대신, 그 고통을 받아들이며 다시 시도하는 용기. 그 고통은 돌에 새겨진 흔적처럼 남아, 결국 삶을 더욱 단단하게 빚어냈다.
돌아보면 삶은 끊임없는 배움의 연속이었다. 글자를 깨우치던 순간부터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려 애쓰던 시절, 그리고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하는 순간까지. 배움은 시간의 끈으로 이어져 있었다. 과거의 배움은 오늘을 만들었고, 오늘의 배움은 내일을 짓는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행위는 현재를 바꾸는 것을 넘어 과거와 미래를 잇는 다리를 놓는 일이었다. 나는 이제 낯선 기술과 새로운 감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배움이 다가와 나를 또 다른 사람으로 빚어낼지 설레며 기다린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흔히 말한다. “이 나이에 뭘 새삼 배우겠나.”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 배움이 필요한 시간이다. 삶은 고요히 멈춘 호수가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이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너는 최근 어떤 배움을 머리로만 알고 흘려보내지 않았나? 작은 실천 하나라도 몸으로 옮겨 본 적이 있나? 삶은 여전히 손끝에서 시작된다. 그 작은 떨림 하나가 오늘의 리듬을 흔들고, 내일의 풍경을 새롭게 채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