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년의 몸과 마음에 관한 에세이 -
“철컥.”
금속성 파열음이 복도의 소란을 단번에 베어냈다. 문이 닫히는 그 짧은 순간, 안과 밖은 물리적으로 완벽히 분리된다. 긴 테이블 위로는 형광등 불빛만 수직으로 창백하게 떨어져 내리고, 구석에 놓인 공기청정기는 탁한 공기를 삼키느라 낮게 웅웅거릴 뿐이다. 방금 전까지 날 선 의견을 부딪치며 소란스럽던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 그곳에는 주인 잃은 검은 가죽 의자가 덩그러니 남았다. 짓이겨진 엉덩이 자국과 축축한 팔걸이에 그들의 체온이 아직 비릿하게 묻어 있다. 부재는 늘, 이런 지질한 흔적으로 증명되기 마련이다.
주인 잃은 노트북은 검은 입을 굳게 다물고 고집스럽게 침묵을 지킨다. 꺼진 화면은 조금 전까지 맞은편에 앉아 서로의 눈을 애써 피하던 우리의 피로한 얼굴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돌아온다. 종이컵에 반쯤 고인 식은 물 위로 에어컨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면, 둥근 테두리에 박힌 깊은 잇자국에서는 건조한 공기 냄새와 섞인 비릿한 잔향이 풍겨온다.
테이블 중앙에는 종이 한 장이 무심하게 놓여 있다. ‘합의함’, ‘결정함’이라는 명조체 글자들이 오와 열을 맞춰 선명하다. 문장은 단정하게 닫혔으나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 보면 이면에 숨겨진 울퉁불퉁한 요철이 눈에 들어온다. 하얀 수정 테이프가 굳어 만든 얇은 막 아래, 적혔다가 황급히 지워진 말들이 납작하게 눌려 있는 탓이다. 손끝으로 조심스레 문지르자 우툴두툴한 그 질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합의에 이르기까지 과정에 있던 수많은 망설임은 그렇게 얇은 테이프 밑으로 영원히 숨어버렸다. 결국 기록에서 빠진 말들은 곧장 기억의 바깥으로 밀려나고 만 것이다.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댄다. 천장의 하얀 조명이 망막을 찌르자 감은 눈꺼풀 안쪽에서 잔상이 어른거린다. 아까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이 입안에서 모래알처럼 서걱이며 씹히는 기분이다.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그 말은 식도 어딘가에 딱딱하게 걸려 내려가지 않는다.
그때 누군가 의자를 밀며 일어선다. 바닥 긁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정적을 깨뜨린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커서가 멈춰버린 화면을 그대로 둔 채, 노트북을 조용히 닫을 뿐이다.
복도로 나서자 창문에 네모난 모양으로 멈춰 있는 오후의 햇살이 눈에 박힌다. 벽에 붙은 공고문이 미세한 바람에 팔랑거리고, 복도 끝 모니터에는 소리도 자막도 없는 영상이 무심하게 흐른다. 화면 속 입술은 부지런히 움직이지만, 그 말은 복도를 지나는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다. 손을 뻗어 빛을 잡아보려 하지만, 빛은 손바닥을 그대로 통과할 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주머니에서 습관처럼 구겨진 영수증을 꺼낸다. 편의점, 카페, 식당에서 받은 얇고 하찮은 종이 조각들이다. 감열지 위의 숫자는 이미 해독할 수 없을 만큼 흐릿해졌다. 종이에 발라진 약품은 커피 잔의 온기와 주머니 속 체온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 날아가 버린 후였다. 엄지손가락에 묻어나는 것은 거뭇한 얼룩뿐. 영수증은 반듯하게 접히지 못한 채 지갑 속에서 자리를 잃고 헤맨다.
돌이켜보면 과거의 기억은 잉크가 짙었다. 슬픔은 명확했고 기쁨은 선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화가 나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웃고 있는데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마음의 경계선이 마치 이 감열지 글씨처럼 번져버려, 어디서부터가 분노이고 어디까지가 체념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기억은 또렷해지는 대신 이렇게 번진 채로 남는다. 글씨가 사라진 자리에 얼룩만 남은 종이 조각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다. 구겨진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휴지통 뚜껑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를 듣고 나서야 주머니에서 빈손을 뺀다. 빈 손끝이 유난히 가볍게 느껴진다.
밤이 깊다. 책상 위에 붙은 메모지에는 붉은 줄이 죽 그어져 있다. 소임을 다한 메모 아래 서랍을 연다. 드르륵, 레일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잡동사니가 드러나고, 손끝에 닿는 빳빳한 종이는 누렇게 변색된 봉투 하나다. 그 안에는 몇 년 전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책상 앞에 앉아 비장하게 썼던 사직서가 들어 있다.
결국 내지는 못했다. 아이는 제 궤도를 찾아 떠났기에 핑계 댈 곳은 없었지만, 아내의 낡고 소매 닳은 코트가 눈에 밟혔던 탓이다. 무엇보다 매달 꼬박꼬박 날아드는 고지서와 이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는 무거운 관성이 작용했다. 종이는 서랍 안으로 되돌아갔다. 내 의지보다 생존을 기억하는 손이 먼저 움직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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