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동안 내 삶을 증명하듯이 살았습니다. 무엇을 먹었는지, 어디에 갔는지뿐만 아니라 어떤 저작을 접했는지까지 남에게 보이도록 정리하며, 그것이 곧 성실함이라고 믿었습니다. 매년 연말이면 여러 매체에 '완독 목록'을 훈장처럼 올리는 광경 속에 나 또한 있었습니다. 쉰 권, 백 권이라는 수치가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성적표라 여겼지만, 이상하게도 그 권수가 늘어갈수록 마음은 더 비어 갔습니다. 나만 그런 줄 알았습니다.
글을 읽는 행위가 권수나 속도로 가치를 매기는 일이 되는 순간, 그것은 고된 노동이나 갚아야 할 빚으로 바뀝니다. 꼭 보아야 한다고 정해둔 명단은 쌓여가는데, 정작 내 영혼을 일깨우는 '한 줄의 기록'을 마주할 여백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지식을 수용하는 과정이 아니라 기호를 한꺼번에 들이붓는 욕심에 매몰되었던 셈입니다. 급하게 취한 배움은 반드시 탈을 일으킵니다. 머릿속에 조각난 정보만 떠돌 뿐, 삶의 자리를 바꾸는 지혜로 이어지지 못함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증명 문장 I] 독서는 정보를 얻는 재주가 아니라, 흩어진 존재를 바르게 세우는 행위다.
이 선언을 가슴에 품고 나서 나의 아침은 달라졌습니다. 쏟아지는 소식과 광고들을 뒤로한 채, 고전의 언어를 살피고 삐딱해진 마음의 축을 수직으로 바로잡는 5분. 그 짧은 정돈만으로도 이리저리 흔들리던 하루의 질서가 잡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구절 하나를 살피는 데 왜 이토록 공을 들여야 할까요? 혼자 가만히 물어봅니다. 그것은 기록이 태어나기까지 겹겹이 쌓인 세월을 존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술가가 적은 한 줄은 낱말들을 조합한 것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누군가가 생의 한복판에서 겪은 아픔, 기쁨, 그리고 수만 번 고쳐 쓴 고뇌의 결과물이 거기에 고여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문장 체화(글이 몸의 일부가 됨)라는 상태를 꿈꿉니다. 기호를 눈으로 훑는 단계를 지나, 활자가 내면화되어 내 일부로 녹아드는 순간을 기다립니다. 잠시 책장을 덮고 가슴 위에 손을 얹어 봅니다. 지금 읽은 언어가 나의 체온과 섞여 깊은 곳으로 내려가기를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철학자 니체는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모든 기록된 것들 가운데 나는 오직 누군가가 자신의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정신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는 뜻을 전달하는 글이 아니라, 생의 고통을 통과해 나온 진실한 언어를 강조했습니다. 저자가 평생을 바쳐 길어 올린 시간의 진액을 나는 왜 그토록 순간에 지나쳐 버리려 했을까요. 나는 솔직히, 그 문장을 읽고도 늘 도망치듯 다음 쪽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손을 붙잡습니다. 책등을 쓰다듬듯 한 번 눌러 놓으며 마음의 축이 바로 서는 기적을 기다립니다.
사실 나 역시 이 생각을 완성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왔습니다. 어느 가을밤이었습니다. 나는 유독 지적인 갈증에 허덕이며 두꺼운 책들을 쌓아두고 있었습니다. 새벽 세 시, 책상 위 형광등 아래에서 내 눈은 이미 종이가 아니라 천장을 보고 있었습니다. 눈은 벌겋게 충혈되었고 머리는 무거웠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내 기억 속에 남은 언어는 단 한 줄도 없었습니다.
아마 당신도 비슷한 밤을 보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마음은 조급하고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아 이해되지 않는 구절을 억지로 삼키며 종이를 넘기던 밤 말입니다. 시선은 글자를 쫓아가지만 마음은 이미 딴 곳에 가 있습니다. 보았던 줄을 다시 보고 또다시 보며 스스로를 탓하던 그 허망한 시간 속에서 나는 영혼의 허기를 느꼈습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 읽어 내려가는 행위는 치밀하게 짜인 도망치기에 불과했던 셈입니다.
눈으로만 살피는 것이 모자랄 때면 나는 펜을 듭니다. 손으로 옮겨 적는 동안 일어나는 받아 적으며 닮아가는 시간은 나를 바꾸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시각은 빛의 속도로 활자를 훑지만, 손의 노동은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합니다. 바로 그 늦어지는 틈 사이로 생각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베껴 쓰기용 공책을 펼치면 고요함이 찾아옵니다. 먹물이 종이에 스며드는 소리. 펜촉이 사각거리는 촉감. 이 동작을 반복하는 동안 나의 뇌는 새로운 지도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굳이 이론을 빌리지 않아도 좋습니다. 손끝이 움직이는 대로 내면의 경로가 바뀌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른 길을 걷게 된다는 사실을 내 몸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내 손가락 끝에 밴 굳은살이야말로, 어떤 철학적 논증보다 단단한 지혜의 흔적일지도 모릅니다.
저자가 애써 고른 낱말의 떨림을 손끝으로 만져보는 것입니다. 글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겸손한 훈련입니다.
[증명 문장 II] 필사는 문장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버리고, 문장에 나를 맡기는 겸손한 항복이다.
글을 적다 손이 멈춥니다. 한 줄의 기록이 주는 무게가 너무 커서 다음 글자를 잇지 못합니다. 종이 위에는 삐뚤어진 흔적이 남았습니다. 그 어긋난 선이야말로 내 생각이 기록과 거세게 부딪치며 내면의 질서가 세워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글을 살필 때 가장 소중한 순간은 거꾸로 '행위를 멈출 때'라고 믿습니다. 몇 쪽을 살핀 뒤 책을 덮고 눈을 감아봅니다. 방금 만난 내용이 내 안의 어떤 마음을 건드렸는지 스스로 물어보는 과정이 절실합니다. "이 구절이 왜 지금 나에게 왔을까?" 이 질문 하나가 내 삶을 흔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늘 남이 설명해 주는 것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것은 빌려온 생각일 뿐입니다. 서툴더라도 스스로 묻고 답하는 과정이 있어야 진짜 내 것이 됩니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 때, 죽어 있던 언어들은 살아나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지식의 양에 눌리지 않고 주인이 되는 것, 기록이 내장되는 길임을 잊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이런 수용과 베껴 쓰기의 박자 속에서 정신은 비로소 맑아집니다. 생각은 종이 위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삶의 자리로 당당히 걸어 나옵니다. 오늘 마주한 한 줄이 갈등을 푸는 열쇠가 되고, 누군가를 용서할 용기가 되어줍니다. 책을 대하는 이 시간은 종이를 넘기는 일을 떠나 자기 자신을 보살피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책을 대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더 똑똑해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더 인간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증명 문장 III] 읽기가 나를 흔드는 바람이라면, 쓰기는 나를 버티게 하는 뿌리다.
남에게 좋지 않은 말을 듣고 온몸의 맥박이 요동치던 오후를 기억합니다. 나는 공책을 찾았습니다. 언어를 다시 시선에 담는 순간, 요동치던 신경이 차분하게 가라앉습니다. 무너지던 마음의 축이 다시 바르게 정렬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 평온함이 손을 지나 가슴으로 올라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 순간이 오면, 오늘 하루는 이미 다 괜찮아졌다는 뜻이니까요.
이제 이 글을 접한 당신의 차례가 왔습니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아도 좋습니다.
지금 당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오직 삼 초만, 이 글의 마지막을 닫기 전 정지된 시간 속에 머물러 보십시오.
그 3초의 틈 사이로 당신의 숨소리가 들립니까? 당신의 맥박이 느껴집니까? 문장 체화라는 변화는 바로 그 고요한 인지의 순간에 시작되는 법입니다. 이제 고개를 들어 주변에 놓인 책 중 가장 마음이 가는 한 권을 집어 드십시오. 처음부터 다 보려 애쓰지 않아도 좋습니다. 무작위로 펼친 쪽에서 당신의 시선을 멈추게 하는 단 한 줄의 기록을 찾아내십시오.
그 구절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책을 덮고 공책을 펼치십시오. 서두르지 말고 펜을 잡아 문장을 옮겨 적으십시오. 펜 끝이 종이를 긁는 떨림이 당신의 손등을 타고 어깨로, 다시 가슴으로 전달되는 것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 떨림이 온몸으로 번져나갈 때 비로소 내가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당신의 손은 이제 종이만 넘기는 기계적인 도구가 아닙니다. 당신의 존재를 바르게 정렬하는 숭고한 도구를 당신은 이미 굳게 쥐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