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하지 못한 일상의 성실한 누적
방 안의 공기가 서서히 식어 간다. 온도가 조금씩 내려가면서 공기는 낮게 가라앉고, 몸은 굳이 시간을 재지 않아도 하루가 저물어 간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챈다. 낮 동안 떠돌던 소음이 하나둘 사라지고, 가구들이 냉기를 머금은 채 조용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하루는 비로소 끝을 향해 천천히 몸을 눕힌다. 특별한 소식도, 눈에 띄는 성취도 없었던 평범한 하루였지만 그 적막 속에서도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일만큼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이어진 숨결 사이로 시간은 아무 소리 없이 흐르고, 우리는 어느새 다음 날의 문턱에 조용히 옮겨 서 있다.
사람들은 대개 눈에 띄는 변화가 보일 때 삶이 움직였다고 판단하곤 한다. 하지만 지금의 상태는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 그것은 평소 거듭해 온 사소한 거동이 중첩되어 만들어진 결과다. 상당수는 일생의 결정적인 지점에만 의미를 두려 하지만, 객관적인 양상은 오래전부터 수행해 온 일정한 처신 속에서 이미 확정되어 있다. 정해진 시각에 몸을 일으키고 옷을 입는 행위. 가방을 챙겨 매고 방을 나서는 뒷모습. 그 되풀이가 신체의 조건을 형성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아도 그날은 분명히 지나갔다.
드러나는 장면은 전체 날들 가운데 일부를 차지할 뿐이다. 특별한 감흥 없이 보낸 보편적인 하루하루가 실상 한 사람의 가장 많은 영역을 구성하고 있지 않은가. 기억에 남는 대목은 생애 기간 중에서도 짧은 구간에만 머문다. 글자 하나 남기지 못한 채 흘러간 수만 일은 분명하게 근육과 습관에 새겨져 있다. 파악되지 않았던 매일이 존재했다는 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유지한다. 인지되지 않았던 세월의 합계야말로 실존을 지탱하는 정직한 지표로 남는다.
매일 신는 신발의 뒷굽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조금씩 낮아진 그 높이는 보행이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발바닥이 지면에 남긴 압력은 매번 달랐지만, 이동은 늘 같은 방향으로 이어졌다. 손 역시 마찬가지다. 매일 창문을 열고, 도구를 들고, 가방의 지퍼를 올리는 거동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기억할 이유가 없는 움직임이었으나 손바닥의 작은 굳은살과 손톱 밑의 흔적들은 그 세월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이름 없이 이어지는 작은 움직임들이 지금의 상태를 조용히 붙잡고 있다. 눈에 띄지 않는 순간들이 서로 맞물리며 하루의 길을 만든다. 주방 바닥에서 전해지는 서늘한 감촉이나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낮은 울림이 겹쳐 들리듯, 수많은 날들이 모여 한 사람의 삶을 또렷하게 세운다. 지금 서 있는 자리는 매일 내디뎌 온 보폭이 차곡차곡 겹쳐 남긴 자리다. 층층이 쌓인 날들이 결국 사람이 딛고 선 곳의 단단함이 된다. 발바닥에 전해지는 감각과 나무 의자의 건조한 향기는, 일상이 한 번도 멈춘 적 없다는 사실을 말없이 보여 준다.
집으로 돌아와 식탁 앞에 앉아 식어 버린 음식을 천천히 입에 옮기다 보면, 그런 사소한 움직임들이 하루를 조용히 닫아 간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이어진 평범한 동작들은 어느 순간 삶의 골격이 되고, 사람은 소리 없이 흐르는 시간을 지나며 안쪽에서 조금씩 단단해진다. 그 변화는 요란하게 드러나지 않으며, 바깥의 시선으로는 좀처럼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거칠어진 호흡과 굳어 있는 근육의 긴장 역시, 그저 살아 있으려는 몸이 남기는 흔적처럼 남는다. 매일 같은 보폭으로 땅을 밟아 나가는 발걸음은 눈에 띄지 않아도 어딘가에 조용히 자취를 남기고, 먼지가 내려앉듯 인식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하나둘 쌓여 마음 깊은 곳에 자리를 잡는다.
몸은 의식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일을 계속 이어 간다. 혈액은 멈춤 없이 흐르고, 심장은 일정한 리듬을 유지하며 하루의 시간을 밀어 보낸다. 이런 움직임들이 모이고 겹쳐지면서 결국 한 사람의 실제가 만들어진다. 외부의 평가나 화려한 수식은 그 본질에 쉽게 닿지 못하고, 끝내 남는 것은 반복된 행위가 만들어 낸 시간의 밀도뿐이다. 하루가 이어지고 또 하루가 더해질수록 우리는 어느새 멀리 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출발할 때는 보이지 않던 도착지가 어느 순간 시야에 들어오는 것도, 그렇게 겹겹이 쌓인 발걸음이 만든 자연스러운 귀결일 것이다.
결국 모든 큰 결과는, 보이지 않던 반복의 무게 위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어떤 날은 움직이지 못했다. 의자에 깊이 몸을 파묻은 채 그대로 멈춰 있었다. 베란다 구석에서 잎이 마른 화분이 저녁 빛에 몸을 숨기는 것을 보았다. 물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무거웠던 그날, 주변의 서늘한 기운이 손바닥의 온도를 순식간에 빼앗아 갔다. 방 안에 앉은 채, 생각만 움직이고 몸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마디는 시간이 다 지나간 뒤야 비로소 실체로 확인된다. 책은 펼쳐 둔 채 한 장도 넘기지 못했고, 화면도 몇 번 켰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창밖 자동차 소리만이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때는, 이렇게 버티는 시간이 정말로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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