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서쪽 낮은 곳으로 내려앉으며 세상의 빛깔을 솎아내기 시작하자, 복도를 오가는 발길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는 깊은 고요가 고였다. 통로 끝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온 오후의 햇살은 바닥 나무판 위에 길게 누워 제 몸을 늘리고 있었다. 그 빛은 누군가의 구두굽에 긁힌 상처와 오래된 매끄러움의 흔적을 낱낱이 드러내며, 긴 통로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느다란 길잡이 선을 그어놓았다.
문이 닫힌 방마다 가두어진 공기의 흐름은 저마다 달랐다. 통로를 가로지르는 바람의 힘이 달라서인지, 문틈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들은 작게 흔들렸다. 벽에 걸린 시계는 톱니가 맞물리고 풀리는 마른 소리를 내며 시간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 건조한 소리만이 이 조용한 복도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움직임이었다. 나무의 바탕 사이사이에는 정오를 지나며 내려앉은 먼지들이 얇게 붙어 있었고, 어느 곳에 박힌 옹이 하나는 깊은 구멍처럼 검은 점으로 박혀 눈길을 붙잡고 있었다.
나는 늘 걷던 대로 그 길을 거닐고 있었다. 날마다 오가는 길이었지만, 그날은 유독 대기의 무게가 묵직했다. 발바닥에 닿는 나무 바닥의 느낌이 평소보다 딱딱하게 다가왔고, 벽면에 발린 칠이 가늘게 갈라진 모습까지 눈에 들어왔다. 그때였다. 모퉁이를 돌다가 바닥 구석에 놓여 있는 종이 한 장을 찾아낸 것은.
하얀 종이 위에는 펜으로 꾹꾹 눌러쓴 듯한 짧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3 시, 물 끓이는 방.’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내밀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지면의 까슬한 느낌이 지문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것은 오랫동안 물기를 머금지 못한 채 놓여 있던 쪽지 특유의 메마른 감촉이었다. 표면은 거칠었고, 가느다란 식물성 섬유가 손끝에 걸리며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질량은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웠지만, 내 손바닥 위에 놓인 그 하얀 조각은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펜촉이 지나간 자리는 종이의 속살을 짓누른 힘이 그대로 남아 있어, 뒷면을 만져보지 않아도 글을 쓴 이가 얼마나 마음을 담아 획을 그었는지 알 수 있었다. 획의 끝에는 잉크가 모였다가 마르며 남긴 짙은 테두리가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네 모서리는 반듯했으나, 가장자리에는 아주 작은 보풀들이 일어나 있었다. 코끝을 가져다 대자, 나무 냄새와 섞인 옅고 씁쓸한 먹 향 같은 것이 끼쳐 왔다. 그것은 글을 쓴 이의 정성이 담긴 냄새였다.
나는 그 종이 한 장을 접지 않았다. 행여나 날카롭게 날이 선 그 글자들이 접힌 틈 사이로 꺾일까 봐 마음이 쓰였는지도 모른다. 그대로 손에 쥔 채 자리로 돌아왔다. 주변은 여전히 날마다 겪는 소음들로 가득했다. 글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들이 날카롭게 이어졌고, 천장 불빛 아래 번들거리는 입력 장치 표면은 지나치게 매끄러워 낯설게 보였다.
책상 위에 놓인 쪽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또렷해졌다. 내 눈길은 화면 위를 떠돌다가도 결국 탁자 위의 그 하얀 섬으로 되돌아왔다. 수중에 남아 있던 종이의 느낌이 사라지지 않고 이어졌다. 쪽지 끝이 내 손의 열기에 아주 조금씩 말려 올라가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마치 밖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에 반응하여 몸을 웅크리는 살아있는 것의 모습 같았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시계의 바늘이 한 칸씩 옮겨갈 때마다 내 심장박동도 그 길을 따라 작게 떨렸다. 오후 세 시라는 때는 하루 중 가장 지루하고도 힘이 빠지는 구간이다. 햇빛은 꼭대기에서 내려와 그림자를 길게 늘이고, 사람들의 마음은 흩어져 공중에 떠도는 먼지처럼 갈 길을 잃는다. 그 힘없는 시공 속에 '다용도실'이라는 가야 할 곳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안의 멈춰 있던 힘은 서서히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각이 되었을 때, 나는 몸을 일으켰다.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평소보다 유독 크게 들려 스스로 놀랐다. 나는 복도를 가로질러 물 끓이는 방의 문을 열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쇠로 만든 싱크대와 낡은 물 걸러내는 기계, 그리고 줄이 복잡하게 얽힌 주전자들이 나를 맞이했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차가운 벽의 냉기가 옷을 뚫고 전달되었다. 눈을 감자 건물의 깊은 곳 어디선가 기계가 돌아가는 낮은 떨림이 발바닥으로 전해졌다. 그것은 이 건물이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내가 이 공간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나직한 속삭임이었다.
잠시 뒤, 유리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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