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구포대교를 건너 부산 북구와 사상구를 지나 남으로 향했다. 종착지 부산역까지 구덕산이 가로막았다. 산을 뚫은 구덕터널이 지름길이지만 차량 통행이 빈번한 2km의 터널을 걸어서 지날 수는 없었다. 지방 터널을 수차례 지났어도 차량이 뜸해서 가능했다.
산을 올라야 했다. 시멘트로 포장된 산길 초입부터 구덕산은 나를 시험했다. 경사가 급해 비 오듯 땀을 흘리며 걸어 올랐다. 이 오르막길 옆에도, 그 위에도 사람 사는 집이 있다. 나에게는 힘든 산길이지만, 그곳에 사는 분들에게 이 길은 매일 오르내려야만 하는 삶의 길이다.
경사가 완만해지며 한숨 돌리며 걷던 중이었다. 깨지고 파인 시멘트 산길 한쪽에 노인 한 분이 앉아 있었다. 나도 쉬고 싶어서 인사를 드리고 옆에 앉았다. 서로 나누던 인사말에 이북 사투리가 섞였다. 부산에는 전쟁 중에 북에서 온 피란민이 많다. 이분도 피란민 같았다. 조심히 물어보았다.
“어르신, 혹시 육이오전쟁 때 북에서 피란 오셨습니까?”
“무슨 말이오. 아니오.”
낯선 이가 북에서 왔냐 물어보니 약간 당황하면서 처음에는 아니라 하였다. 아마 본능적으로 그랬을 것이다.
“제 아버님도 함경남도 고원이 고향인데 전쟁 전에 평양으로 나왔다가 1‧4후퇴 때 이남으로 내려왔습니다. 오래전 돌아가셨지요.”
“난 평안도에서 내려왔다오.”
그제야 피란민인 걸 말씀하셨다.
구십을 앞둔 노인이지만 북에서 온 것을 알리고 싶지 않은 이유는 뭘까. 한때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TV 화면을 점령하며 온 국민의 눈물샘을 자극하였지만 신청하지 않은 이산가족도 상당수였다. 혹여 북에 두고 온 가족에게 무슨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일 것이다. 분단 70년이 넘도록 실향민의 두려움과 아픔은 가시지 않았다.
그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르신은 부산에 피란 내려와서 산을 오르내리며 일해서 먹고살았단다. 지금까지 육십여 년을 이곳 구덕산 자락에서만 살았다 하니 어렵게 지내왔을 것이다. 함께 산을 넘어 버스 종점에서 헤어지며 건강하시라 인사드렸더니 아무 말씀도 없이 내 두 손을 꼭 잡았다가 놓으시고 휘청휘청 반대편 언덕으로 올라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