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전야 - 제1화
제주4.3 북촌 생존자들의 증언
(계간 수필미학 수록)
<글을 시작하며>
칠십육 년 전, 죽음을 목전에 둔 아홉 살과 열네 살 두 소녀의 기억은 너무도 생생했다. 음력 1948년 12월 19일, 양력으로는 1949년 1월 17일에 제주도 조천읍 북촌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북촌의 너븐숭이4.3기념관에서 소개해준 당시 생존자를 만나러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마을 주민들이 운영하는 깔끔한 카페에서 할머니 두 분을 만났다. 85세의 <제주4.3북촌희생자유족회> 고완순 회장님은 당시 아홉 살 아이였고, 90세 이영자 할머니는 열네 살 소녀였다. 두 분은 현재 북촌에서 당시 자세한 상황을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자들이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구술을 부분적으로 수정하였음을 밝힌다.)
<폭풍 전야>
- 해방이 되었지만 미군정의 점령지였던 3.8선 이남에서는 일본제국주의의 손발이었던 행정과 경찰조직이 미군정에 의해 고스란히 그 직을 이어받으며 일제강점기 때와 같이 남한 민중 위에 군림하였다.
“순경들은 해방되고 나서도 아주 못살게 굴었어요. 저 우도에서 순경들이 바람에 밀려서 이 앞 북촌 선창에 들어왔어요. 그 순경 두 명을 무장대가 잡아다 죽였어. 그래서 여기는 더 위험 지역이 되어서 맨날 탄압받는 거예요. 젊은 여자들이 모여서 놀면 반동질 한다고 잡아가고 그랬어. 48년 초에 마을에 서북청년단(순경)이 들어왔어요. 군인 2연대가 함덕에 주둔했고. 하루는 군인이 오고 하루는 순경이 오면서 젊은 여자들 잡아가기 시작했어요. 잡아가서는 나중에 안 일인데 막 성추행도 하고 죽이고 그랬어요.
- 제주4.3 나던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제주에서는 투표율 과반수 미달로 미군정은 무효를 선언하고, 6월 재선거를 명령하였다. 이로 인해 북촌뿐만 아니라 제주 전역이 더욱 참극의 회오리에 휩싸이게 되었다. 12월, 이곳 북촌에서는 토벌대에 협조하던 민보단도 낮은 투표율 때문에 처형의 대상이 되었다.
“군인들이 30대 전후반 사람들을 잡아갔어. 북촌은 더군다나 찍힌 마을이니까. 우리 외삼촌은 제주시에서 중학교 교편 잡아서 출근해서 안 잡혀갔어. 마을에서 일 보던 사람 24명을 잡아가서 몇 날 며칠을 두들겨 패다가 차에 싣고 가면서 낸시빌레 가서 총으로 쏴 죽였어.”
“이 언니네(이영자 할머니) 작은아버지가 붙잡혀가게 된 거예요. 거기서 총을 맞았는데 다리를 맞았어. 죽은 사람 밑에 숨었다가 순경 군인들이 가니까 거기서 기어 나온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10시쯤에 군인 차에 24명을 싣고 가는데 붙들려 가던 어떤 사람이 손수건인지 뭐에다가 손을 물어 피로 글을 썼어. 우리가 동쪽으로 죽으러 간다고. 차 트럭 밑으로 훅 집어던진 거를 밭에 갔다 오던 사람이 그걸 주워 가자고 왔다는 거야. 어디서 죽였는가 찾다가 낸시빌레라는 걸 알아서 이 언니 아버지가 작은아버지를 찾아와서 다리 치료도 못 하다가 며칠 있다 마을 4.3을 맡게 된 거고. 총 맞아서 이를 악무니까 오줌을 싸서 뜨거운 오줌을 먹였다잖아. 응급 처치로. 근데 큰길로 오다가 군인들한테 걸리면 또 죽일 걸 알고, 저 산으로 다리 총 맞은 사람을 빙빙 돌아가서 살게 되었어. 왜 그렇게 잡아다 죽였냐 하면, 투표 인원이 적어서 너희는 빨갱이들이다 투표를 안 했다 이래서 죽인 거예요.”
- 무장대는 주로 경찰이나 군인을 살해하였으나 때로 민간인들도 희생양이 되었다.
“함덕에 2연대가 들어오고 경찰도 들어왔어. 조병옥이가 서북청년단에게 경찰 임명권을 줬잖아. 하도 못살게 구니까 김성규라는 이장이 경찰들에게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을 판 돈으로 좀 봐달라고 뇌물을 바쳤어. 이 앞 다려도에서 해산물이 많이 났거든요. 경찰들한테 바쳤는데 산에서 내려온 무장대가 반동분자라고 이장을 대창으로 찔러 죽여버렸어. 밤에. 바로 우리 집 앞에서. 김성규와 부인 죽이고 홍성도라는 후원회장도 죽여서 가마니로 덮어놓고 있었어요. 제가 그때 여덟 살 때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