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 비로소 잡념이 멈췄다.

머릿속 소음을 잠재우는 가장 격렬하고 고요한 방법.

by 병아리 트레일러너

진료실 밖에서 내뱉은 안도의 한숨

52세라는 나이는 이제 '전형적인 문제'들을 훈장처럼 달기 시작하는 시기인가 보다. 긴장된 마음으로 마주한 GP(가정의학과 의사)는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자궁 초음파에서 발견된 작은 폴립 하나, 조금 높은 콜레스테롤, 그리고 여전히 나아지지 않은 철분 수치까지. 3개월 뒤 재검사와 철분 주사 예약을 마치고 진료실을 나오자, 참았던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심각한 병은 아니라는 안도감, 그리고 동시에 '이제 정말 내 몸을 단단히 챙겨야겠다'는 서늘한 각오가 교차했다. 그 길로 나는 나만의 진료실로 향했다. 병원 문 밖이 아니라, 숲길로 이어지는 문 말이다.



Dandenong Creek,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

집을 나서 5분 정도 걸어 다리를 건너면, 호주 멜번 동북쪽의 'Dandenong Creek'이라 불리는 숲길이 나타난다. 트레일 워킹과 러닝을 시작한 지 이제 겨우 3주 차. 이곳은 건강검진 결과표에 적힌 숫자들을 잠시 잊고,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안식처다.

형형색색의 앵무새 떼가 머리 위를 수놓고 계절의 변화가 발끝에 닿는다. 나는 오르막(업힐)을 만날 때마다 일부러 숨을 몰아쉬며 뛴다. 헉헉대며 정점에 다다라 거친 숨을 고를 때, 비로소 머릿속을 괴롭히던 잡념들이 시원한 바람에 씻겨 내려간다. 반면 내리막은 더없이 겸손하게 천천히 내려온다. 부상을 경계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신중을 기하는 법을, 나는 숲길에서 배우고 있다.


집 밖을 나서기 전의 작은 전쟁

사실 매번 기운차게 나가는 건 아니다. 신발을 신기 전까지 내 안에서는 치열한 실갱이가 벌어진다. "오늘 컨디션도 별론데 하루만 쉴까?" 하는 게으른 나와, "일단 나가면 좋아질 거야" 라고 다독이는 착한 나. 결국 "에이, 일단 나가보자!"라며 스스로를 끌고 나간다.

그렇게 숲길에 도착해 Kelly Clarkson의 파워풀한 음악을 들으며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하면, 속으로 나 자신을 힘껏 칭찬해 준다. "잘했어!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져."



사소하지만 확실한 변화들

트레이닝을 마치고 돌아와, 평소엔 잘 마시지 않던 콜라에 커다란 얼음을 넣어 '캬~' 소리가 나게 들이킨다. 그 시원함은 어떤 보상보다 달콤하다. 샤워 후 머리를 말리며 흥얼거리는 콧노래는 덤이다.

변화는 서서히, 하지만 분명하게 찾아오고 있다. 작아서 못 입던 옷이 여유 있게 맞기 시작했고, 오후 내내 커피를 수혈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던 루틴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아이스 라떼 대신 내 몸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초보 트레일러너의 단단한 다짐

나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초보 트레일러너다. 남들이 보기엔 대단치 않은 변화일지 모르지만, 내 몸과 마음 어딘가에서는 분명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의사의 처방도 중요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스스로 케어하겠다는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굳건하다.

나의 트레일러닝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멜번의 숲길처럼 아주 꾸준히, 그리고 확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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