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간의 일본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지 벌써 12년이 흘렀다. 그곳은 내가 처음 발을 디딘 외국이었고, 남편과 결혼 생활을 시작한 곳이었으며, 딸 셋을 낳고 키운 곳이었다.
이제 그때의 일들은 아득히 멀어져, 세세한 것들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더욱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새해가 되자마자 나는 결심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이라도 적어두리라고.
예상치 못한 출발
1998년, 결혼과 동시에 우리 부부는 오사카로 향했다. 남편은 어학연수를 마친 뒤 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출발부터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97년 가을까지만 해도 엔화 환율이 700원 정도였다. 그런데 학비를 낼 시점에 IMF가 터졌다. 원화 가치는 폭락했고, 엔화는 순식간에 1500원까지 치솟았다. 예상했던 금액의 두 배가 필요해진 것이다.
간신히 학비를 마련해 공항에 도착했지만,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어 학교 입학 허가서를 갖고 있었음에도 입국 심사는 유난히 길었다. "한국에서 왔다고요?" 심사관의 눈빛이 달랐다.
지금은 보통 1~2년짜리 학생 비자가 나오지만, 우리가 받은 건 고작 6개월이었다. 나라가 가난해지자, 우리는 '공부하러 온 학생'이 아니라 '일하러 온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계속 관찰하겠다는 뜻이었다. 외국에서 비자는 곧 '살 권리'다. 그것이 불안정하면 모든 미래 계획이 흔들린다. 언제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야 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때 나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국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싫어했던 나라로 가다
사실 남편과 나는 일본을 무척 싫어했다. 알고 싶지도 않은 나라였다. 그래서 일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일본어를 두 번이나 배웠다. 고등학교 때 한 번, 대학교 때 한 번. 하지만 관심이 없어서였을까,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결국 오사카에 도착해서 'あいうえお'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30년 전 오사카, 충격의 기록
1998년.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오사카에서 내가 본 것들을 나열해보려 한다.
물론 지금의 한국에는 이런 것들이 모두 당연하다. 하지만 98년을 떠올려보시라. 당신이 살던 그 시절에 이런 것들이 있었는가?
반려동물 천국
당시 한국에서 내 주변에 개를 키우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키워도 한 마리 정도. 그런데 일본은 달랐다. 개를 키우는 사람도 많았지만, 3~5마리씩 키우는 사람들도 흔했다. 고양이를 기르는 집도 엄청났다. 공원은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겨울에도 반바지
오사카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초등학생들 교복은 짧은 반바지와 치마였다. 처음엔 아이들이 추워 보여서 안타까웠다.
천장의 에어컨
가게들의 냉난방기가 천장에 달려 있었다. 지금은 흔하지만, 당시 한국에서는 창문형이나 벽걸이형이 대부분이었다. 그것도 회사나 가게에서나 있었다. 내 주위에 집에 에어컨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비데가 있는 집
가정집 화장실에 비데가 설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화장실과 욕실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크리스마스는 평일
크리스마스가 휴일이 아니었다. 교회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오사카에서 나라까지 가는 길에 교회 하나 볼까 말까였다. 신기하게도 다른 종교 단체들도 '교회(敎會)'라고 불렀다.
급행 전철, 같은 요금
전철에 완행과 급행이 있는데 요금은 똑같았다. 한국은 무궁화호와 새마을호의 요금이 달랐다. 지인이 급행을 타고 교토로 오라고 했는데, 당연히 요금이 다르다고 생각해서 표자판기에서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어서 한참을 헤맸다. 시스템 자체가 달라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난다.
거리의 장애인들
다운증후군 아이들도, 휠체어를 탄 사람들도 자주 보였다. 도로에 턱이 없어서 휠체어와 자전거가 자유롭게 다녔다. 지하철역엔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휠체어 탄 사람이 타고 내릴 때면 역무원이 와서 깔판을 깔아주었다. 역끼리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다.
회색빛 도시
사람들이 무채색 옷을 많이 입었다. 살다 보니 나도 유채색 옷 입기가 부담스러워졌다. 어느새 내 옷장에서 유채색은 점점 사라졌다.
대문 밖 화분들
동네 길을 걷다 보면 대문 밖에 화분을 여러 개 놓은 집이 많았다. '정원도 없으면서 왜 저렇게 도로까지 내놓나?' 싶었는데, 살다 보니 좋더라. 나도 화초를 키워 밖에 내놓았다가... 도둑맞았다. 나중에 근처 약사가 일러주었다. 화분 도둑도 있으니 작고 예쁜 건 내놓지 말라고.
아파트촌 없는 풍경
한국 같은 아파트 단지는 없었다.
비싼 영화 관람료
영화표가 상당히 비쌌다.
즐비한 외제차
남편이 놀란 점이다. 차에 관심 없는 나도 벤츠와 포르셰가 유난히 많다는 걸 느꼈다.
농부의 아들이 본 풍경
농부의 아들인 남편은 시골에 갔을 때 또 다른 충격을 받았다. 길가에 자판기 두 개 크기만 한 정미기가 있었다. 500엔을 넣으면 쌀을 바로 정미할 수 있었다. 당시 시아버님은 정미소나 농협에 가서 쌀을 정미하셨는데, 일본엔 가정용 정미기가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건 휴경지 정책이었다. 농사짓지 않는 땅에 대해 물었더니, 나라에서 보조금을 준다고 했다. 휴경을 하면 토질이 좋아지지만 농부에게는 수확이 없어 손해다. 그걸 국가가 보상하는 것이다. 물론 계속 농사를 짓는다는 조건 하에. 지금 내가 사는 한국 농촌은 반대다. 경작을 해야 나라에서 보조금을 준다.
스웨덴 친구의 충격
같이 어학연수를 하던 스웨덴 친구도 신기한 점을 이야기했다. 일본 사람들은 친구를 만날 때 집이 아니라 카페에서 만난다는 것. 그 친구에게도 그게 낯선 풍경이었나 보다. 스웨덴에서는 집에서 만남을 가진다고 한다.
이 모든 것들을 기록하면서도 약간 조심스럽다. 역사적으로 한국을 착취한 나라이기에... 일본이야기를 하는 것이 때론 힘들다. 그래도 이곳은 나의 청춘이 머물렀던 곳이고, 내 아이들이 자란 곳이며, 내 삶의 17년이 새겨진 곳이다. 그 추억만큼은 솔직하게 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