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로 건네는 현실의 대답, <굿모닝 홍콩>

2025.3.3~2025.4.6, 국립정동극장 세실

by 임다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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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홍콩>은 시위가 한창인 홍콩에 방문한 장국영 팬클럽의 고군분투를 다룬 연극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연극을 보면서 머릿속에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시위 모습이 맴돌았다. 전장연은 대중교통에서 소외된 장애인들의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시위를 시작했다. 그런데 여태껏 대중교통을 편안히 이용하며 당연하게 ‘대중’에 속해왔던 사람들은 전장연의 시위 방식을 두고 도가 지나치다며 비난한다. 장애인 인권은 중요하지만 피해를 주는 방식의 시위는 과도하지 않냐는 지적에는 자신은 장애인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배타적인 시선이 포함되어 있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을 구분지으며 자신은 언제까지고 ‘정상인‘의 범주에 속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든 내가 아닌 존재가 될 위험을 안고 있다. 어느날 다리라도 다쳐 목발을 짚게 되면 지하철 엘리베이터가 얼마나 멀리에 있는지, 버스를 타는 게 얼마나 눈치 보이는 일인지 알게 될 것이다. 단적인 예시를 통해 우리가 상정하는 ‘나’와 ‘타인’의 범위는 매우 연약하고 배타적임을 느낄 수 있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타인의 모습은 결국 내가 될 수 있는 모습이자 나의 모습이 된다. <굿모닝 홍콩> 속 인물들은 오늘날 홍콩의 모습에서 이제는 타인이 되어버린 과거의 ‘나’와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연극은 과거의 한국과 오늘날 홍콩을 통해 타인과 ‘우리’를 구분하는 연약한 경계를 조명하고, 우리가 잊은 ‘우리’의 모습을 일깨운다.


안전 앞에 무너진 ‘중립’
장국영을 추모하기 위해 홍콩에 모인 ‘장국영을 사랑하는 모임(이하 장사모)’는 홍콩의 시위대 때문에 매년 진행하던 행사에 차질을 겪는다. 시위로 생긴 제약 때문에 매년 진행하던 장국영 필모그래피 패러디 영상을 촬영하는 일이 어려워진 탓이다. 중국에 대한 홍콩의 독립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보며 장사모 회원들은 ‘각 국의 입장이 있’다며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듯 보이나, 불편에서 비롯된 불만이 비집고 나오는 것은 어찌하지 못한다. 신이 나서 계획한 촬영이 번번이 무산되는 모습을 보면서 회원들은 허탈해하고 탄식한다. 하필 촬영할 곳에 시위대가 지나가냐며 불만을 표하는 이들은 시위대를 완전한 타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시위에 대한 입장을 보류하던 장사모의 회원들은 중요한 순간이 오자 ‘중립’을 손쉽게 저버린다. 시위대에 휩쓸려 구치소에 갇히게 되자 ‘우선 나가야’ 한다는 명목 하에 중국 정부의 입장에 동의하는 서약서에 서명을 한다. 결국 그들은 중립이라 말하지만, 자신의 안전이 위협 받자 힘의 논리에 편승하여 강한 쪽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역사를 알고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은 지루한 사람이고, 자신의 소신대로 서명하지 않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 된다. 안전을 위해 소신을 지키는 사람들과 빠르게 선을 긋고 강한 쪽에 동조하는 모습은 중립이라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약자를 옹호하며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사람은 손쉽게 타인이 되고, ‘우리’의 영역에서 배제된다.


신발 한 짝이 가리킨 길
장사모 회장 현도의 처남 기찬은 시위 현장에 휩쓸리는 과정에서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다. 이 신발은 장국영의 신발로, 몇 천만 원에 육박하는 금전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기찬은 잃어버린 신발의 행적을 따라 시위대와 함께 이동한다. 처음 기찬은 신발을 찾고 있을 뿐이라며 자신을 시위대의 일원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생각을 정정하지만, 동행이 지속될수록 기찬 역시 변화하게 된다. 자신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방독면을 걸어주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타인’이었던 시위대는 ‘우리’로써 기찬에게 다가온다. 관계의 확장은 기찬의 신발을 찾아준 시위대의 일원과 만나는 장면에서 극대화 된다. 신발의 주인을 찾아주겠다는 단순한 호의 하나로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기찬의 신발을 끌어안고 있던 시위 참여자는 도둑 취급을 받으면서도 생색 하나 없이 신발을 돌려준다. 자신과 시위대를 구분 짓던 기찬의 경계는 그를 기점으로 완전히 무너진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시위대와 동행하던 기찬마저도 ‘우리’에 포함시켜 보호를 해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결국 기찬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몇 천만 원의 신발을 장사모에 기증하고, 시위대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시위에 참여한다.

기찬뿐만 아니라 장사모 회원들 심지어는 관객들까지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홍콩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시위대가 나오는 대부분의 장면에서는 광둥어와 영어가 혼재되어 사용된다. 대부분의 광둥어 장면에 자막이 있지만, 극의 초반부에는 자막조차 나오지 않아 갑작스러운 외국어가 매우 당황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극이 진행될수록 자막 없이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생긴다. 홍콩에게 자유를 달라는 시위대의 외침이나 경찰에게 항의하는 목소리를 알아 듣기 위해서는 굳이 자막이 필요하지 않다.

언어를 뛰어넘는 소통의 경험은 구호와 음악을 통해서 극대화 된다. 영화 <천녀유혼> 속 흑산대왕을 물리치기 위한 주문 ‘반야바라밀‘을 외치던 장사모의 회원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시위대가 섞여 홍콩의 자유를 외친다. 의도치 않게 함께 구호를 외치던 회원들은 이를 두고 당황스럽지만 나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나아가 자신들이 시위가 아닌, 장국영을 위해 홍콩에 방문했다는 사실을 밝힌 후에도 장사모와 시위대는 장국영의 ‘월량대표아적심’을 함께 부른다. 통역 없이는 말도 통하지 않는 이들이지만, 함께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는 순간만큼 이들은 어떠한 제약도 없는 하나의 집단으로 보인다. 장사모 회원들이 홍콩 시위대에 완전히 동화되는 장면은 광둥어 버전의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정점을 찍는다. 이전까지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느슨하게 연상시키던 연극은 이 장면을 통해 직접적으로 한국의 역사와 홍콩의 역사를 연결 짓는다.


당신의 ‘오늘’은 우리의 ‘어제’
장사모의 회원 절반은 50-60대 남성이다. 이들은 홍콩의 시위를 보며 과거 한국 민주화 운동 때 자신의 활약을 떠올린다. 화염병을 얼마나 잘 던졌는지를 뿌듯하게 자랑하는 그들의 모습에는 자부심마저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연관된 일이 아니기 때문에 홍콩의 민주화 운동과 본인의 경험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한다. 그들의 공감은 단순히 과거의 활약을 추억하기 위한 매개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때 무대 위로 신발이 다시 등장한다. 기찬이 놓친 신발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채인다. 애니메이션으로 무대에 투사되는 신발은 무대 연출의 범위와 더불어 신발이 가지는 의미를 확장한다. 수많은 발들 속에서 헤매고 있는 신발의 모습은 단순히 신발이 아닌, 인파 속에 휩쓸리는 한 사람의 모습으로까지 보인다. 대립하는 이념들 사이에 떨어져 휩쓸리는 신발의 이미지는 이한열 열사의 벗겨진 운동화를 연상 시킨다.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유는 그의 죽음이 가족의 죽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 가족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대학생의 죽음이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었고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타인이 아닌,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의 죽음은 민주화 운동의 주체를 더 이상 ‘타인’으로 느낄 수 없게 만들었다.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나’와 ‘우리’의 개념을 타인까지 확장시키기에 충분했고, 그렇게 확장된 ‘우리’가 있었기에 민주화 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장사모 회원들에게 신발은 시위대를 더 이상 타인으로 느끼지 못 하게 하는 강렬한 기폭제다. 편의와 안전을 위해 시위대와 자신을 구분 짓던 장사모의 회원들은 더 이상 시위대를 외면할 수 없다. 이한열 열사와 더불어 ‘임을 위한 행진곡’을 통해 시위대의 현재가 자신의 과거와 밀접하게 닿아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반복되는 역사는 국가와 언어를 뛰어넘어 타인에 대한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나’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나’의 범위 확장은 인물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정환은 죽은 동생이 좋아하던 장국영에 대해 알고 싶어 장사모에 가입한 인물이다. 동생의 죽음은 정환에게 일종의 원동력이 되었다. 동생이 궁금해서 장사모에 가입한 그는 10년 후 부회장직을 맡을만큼 장국영에게 진심이 되었다. 결국 동생 덕분에 그의 세계가 확장된 것이다.

퀴어 정체성을 가진 승재 역시 ‘나‘의 범위가 확장되는 맥락 안에 위치한다. 2025년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퀴어는 여전히 정상성의 범주 바깥에 있다. ‘정상성’과 ‘정상 가족’의 논리에 속하지 않는 퀴어는 법적인 보호망조차 가질 수 없다. 승재는 여성의 외관을 가지고, 패러디 영상에서 여성을 도맡아 연기하지만, 남자가 아닌 여자와 연애 관계를 유지한다. 그럼에도 중년의 남성들이 대부분인 장사모 속에서 승재는 위화감 없이 어울린다. 승재의 정체성을 퀴어로 설정한 것은 극이 강조하는 ‘나’의 경계 확장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무대 위를 다방면으로 가르며 울타리가 되었다가 사람들을 나누기도 하는 펜스는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무대의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펜스의 이동에 따라 모아지기도 흩어지기도 하던 장사모와 시위대는 결국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경찰에 대항한다. 그들은 어떻게 ‘우리’가 되었는가. <굿모닝 홍콩>은 ‘나’의 경계 확장의 근간을 판타지 로맨스 영화 <천녀유혼>에서 찾는다. 장국영은 영채신으로 분해, 영화의 초반부터 사랑의 힘에 대해 말한다. 장국영을 패러디하고 있는 장사모의 무대에서도, 싸우는 두 인물 사이에서 영채신 역할의 인물이 형제애나 동료애, 우정 등을 강조한다. 영채신의 “사랑하면 서로를 죽일 필요가 없잖아요”라는 대사는 무대에 모습을 달리하며 등장한다. 정환은 형제애로, 기찬은 동료애로, 장사모는 우정으로, 그들의 세계는 확장되었다. 타인의 과거에서 나의 현재를 찾을 수 있기에, 타인의 모습은 결국 내가 될 수 있는 모습이자 나의 모습이 된다. <굿모닝 홍콩>은 그렇게 ‘우리’의 범위를 넓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