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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 Aug 16. 2024

올레길의 첫걸음, 우도

"나 결심했어!, 제주 올레길 완주하기로!" 주변 사람에게 했을 때 응원 반, 걱정 반이었다.

 정신건강을 위해 응원만 챙겼다.

어떤 코스를 먼저 걸을까? 나름 큰 숙제였다. 처음이라는 상징적 의미와 도전한다는 기대감, 설렘을 충족할 수 있는 곳이면서, 동시에 제주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으면 했다. 고민 끝에, 우도로 좌표를 찍었다. 섬 전체가 큰 굴곡이 없고, 관광객이 많아 심리적 안정감이 들며, 한 바퀴를 도는 원점 회귀라 길을 잃어도 크게 낭패감을 느끼지 않을 코스였다.


 제주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기대감보다 두려움과 걱정이 앞섰다. 공항안내소에서 보증금 5만 원을 건네고 간단한 설명과 함께 예약한 제주여행 지킴이 ‘스마트 워치’를 받았다. 걱정은 접어서 잠시 가방 안에 넣어두고 용용하게 나섰다. 늦은 밤 성산일출봉 방향 ‘111’ 버스 안은 스산했다. 차창 밖은 어둡고 내리는 사람, 타는 사람도 없이 꾸불꾸불 산길을 넘어가는 버스 안에서 스마트 워치를 만지작거리며 ‘다 잘 될 거야!’ 되뇌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여사장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늦으셨네요!, 회사 다니시나 봐요?, 혼자 오셨어요?, 올레길 걸으시게요?’  호기심 많은 주인의 질문이 불편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었을 때 알았다. 성산일출봉이 훤히 보이는 아주 전망 좋은 곳임을. 주인이 충분히 생색 낼만 했다, 인정! 간단하게 아침 식사 후 채비하고 나오는데, 현관에서 여사장과 마주쳤다. ‘잘 주무셨어요? 아침은 드시고 출발하시는 건가요?, 안전하게 다녀오세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친절함이란 이런 건가?,  긴장이 조금 풀렸다.

우도가 보이는 성산일출봉 해안도로를 20분 걸었다. 우도는 소보다 뱀처럼 생겼다. 성산항에서 도선을 타고 눈 깜짝 사이 천진항에 도착했다. 하늘과 바다는 경계선 없이 푸르디푸르고, 바람은 마른 풀꽃향기가 났다, 짭짤한 기분 좋은 갯내를 맡으며, 발길을 어디로 옮길까? 관광 안내 지도를 보며 서 있었다. 우도 올레길 코스는 왼쪽 혹은 오른쪽, 방향만 정하면 된다. 나는 쇠머리오름, 우도봉, 검멀레 해수욕장이 있는 오른쪽 방향이 더 익숙하지만 왼쪽을 선택했다. 올레길을 계획하면서 ‘단순해지기, 하던 대로 안 하기, 반대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낯선 곳에서 안내표지는 길라잡이가 된다. 흔하게 볼 수 있는 두 가닥 리본은 바다를 상장하는 파란색과 제주 특산품 감귤을 상장하는 주황색 리본을 한데 묶어 전봇대,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는다. 화살표는 진행 방향을 가리키는데, 정방향은 파란색, 역방향은 주황색이다. 색깔로 금방 확인할 수 있어서 공부랄 것도 없다. 반나절 정도는 안내표지를 보는 게 익숙지 않아 갔던 길을, 왔다 갔다 했더니 슬슬 긴장됐다. 나처럼 왔던 길 다시 걷는 길동무를 만나니 나만 그러는 것 같지 않아 안심됐다. 덕분에 긴장감도 풀리고 ‘좀 돌아가면 어때’ 생각하니 발걸음이 가벼웠다. 돌담 아래 활짝 핀 유채꽃도 ‘괜찮아, 괜찮아’ 어깨를 토닥여 주는 듯했다. 아직 덜 자란 호밀밭 길, 나지막한 지붕을 덮고 있는 아기자기한 섬마을 길을 오롯이 혼자 걷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서빈백사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 틈에서 잠시 쭈뼛거리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걸었다. 아기 엉덩이처럼 고운 모래에 발이 푹푹 빠졌지만, 부드러움 속에서 단단함이 느껴졌다. 사람도 부드러움 속에 단단함이 있어야 피곤함이 덜 생긴다. 하지만 나는 예민하고 까칠한데 속이 여려, 되레 상처를 잘 받았다. 훌훌 떨어내지도 못하는 소심함을 자책하며 발에 묻은 모래를 털었다.

바다를 등지고 섬 안쪽으로 이어지는 검은 돌담을 따라가면, 구불구불 곡선으로 이어진 포장된 길과 흙길이 번갈아 나온다. 무심하게 걷다 보니 방사탑에 도착했다. 마을의 무사 안녕과 액을 물리치기 위해 세운 탑이다. 소원을 빌고, 마을의 재난을 막아 달라고 제를 올렸던 신령스러운 곳이다. 초자연적인 기운이 지배했던 옛날 바닷가 마을에 ‘용왕은 갑 중에 갑’이었구나 생각했다.      


백패킹의 성지라는 섬 속의 섬 비양도를 지나갔다. 몇 해 전 비양도 해녀 촌에서, 친구랑 생미역에 소라구이를 쌈 싸서 막걸리와 먹던 추억을 생각하며 하고수동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맛있게 먹었던 음식을 생각하니 입맛이 당겼다. 카페에 들러 먼저 자리를 찜하고, 땅콩 아이스크림과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주인이 “다른 일행분, 곧 오시나요?” 묻길래, “아니요, 저 혼자예요!”. 괜한 질문을 했다 싶은지 어색하게 웃는다. 나도 ‘괜찮아요!’ 눈으로 말하듯 웃었다. 찜해둔 자리는 해수욕장 바다가 훤히 보이는 명당자리였다. 주인장의 배려인지, 주문했던 걸 직접 가져다줬다. 달달함과 쌉쌀함, 차가움과 뜨거움을 오가며 맛의 절정을 만끽하고 있는데, 갑자기 퍽! 소리와 함께 삼륜 전동차가 방지턱에서 힘없이 꼬꾸라졌다. 나도 모르게 “어머!” 소리쳤다. 운전미숙으로 보였다. 아픔보다 창피함이 먼저인지 전동차를 재빠르게 일으켜 세우더니 속도 없이 히죽 웃는다. 그 모습에 놀란 사람은 나뿐인 것 같다.     


동쪽으로 호젓한 숲길을 걸었다. 딴생각에 빠지면 영락없이 리본을 놓친다. 심장이 두근거릴 때 바람과 함께 펄럭이는 리본을 발견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중산간 마을 길에서 조금 지칠 무렵 푸른 바닷가로 나왔다.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석편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아찔한 절벽 위로 우도봉과 ‘고래 콧구멍’이라고도 하는 동안경굴이 보이는 검멀레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몸이 휘청거릴 만큼 거센 맞바람과 마주했다.

“아!, 행복하다!,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주책맞게 눈물이 흘렀다. 혼자 해내고 있다는 뿌듯함 때문인지, 나는 이미 올레길 완주한 사람이 됐다. 도대체 어느 지점에서 눈물샘을 자극했는지 모르겠지만,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그런 거라고 감정을 추슬렀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보며 ‘행복이 별것인가? 걸어서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면 그게 바로 행복이지!’. 생각하며 두 개의 등대가 우뚝 서 있는 우도등대에 도착했다. 관리인 아저씨가 혼자 왔냐며 사진을 찍어주신다기에 핸드폰을 얼른 내밀었다. 찰칵찰칵! 내 인생에 오래오래 기억될 소중한 하루!     

우도등대에서 내려와 옆 탐방길로 걸어 우도에서 가장 높은 ‘쇠머리오름’에 도착했다. 한발 물러서 바라보는 본섬과 성산일출봉의 전경이 내 마음처럼 고요하고 차분했다. 좋아하는 우도에서 더 좋아하는 성산일출봉을 보며 올레길의 첫걸음을 마무리했다. 할까 말까 고민될 때는 역시! 하는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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