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와 15평 남짓한 작은 방, 그리고 실바도르 달리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버스는 밤거리를 쌩쌩 달린다. 언제나 그렇듯 밤거리는 조용하고, 창문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곳에는 가로등이 켜져 있다. 좌측편에는 둥근 달이 떠 있다. 보름달이다. 버스가 달리는 속도에 맞춰, 이상하게 레일 같은 풍경의 흐름은 점점 더 빨라져간다. 거리는 한적하고, 사람은 거의 없으며 주택가에 불빛이 띄엄띄엄 들어와 있다. 그리고 곧 멀리서 아파트 단지가 눈에 띈다. 아파트는 끝없이 높다. 고층 빌딩으로 둘러싸인 21세기답게, 호수 뒷편으로 길게 늘어선 아파트 단지를 본다. 저 불빛이 들어온 아파트는 도대체 언제 세워진 걸까.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얼굴을 하고, 어떤 생활양식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도로변에 잔뜩 늘어선 아파트를 보면서, 문득 아파트가 드물었던 지난 여러 세기들을 떠올린다. 그 시대에 맞추어 준비된 마부와 마차, 고층 아파트가 아닌 1인용 집에 대해 생각한다. 만약 이글루에 사는 에스키모족이 한국의 고층 아파트를 본다면, 대체 여기는 무슨 곳일까 하고 의아해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버스는 한적한 도로를 빠르게 지나쳐간다. 창문을 여니 바람이 버스 안으로 밀려 들어온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아주 자연스럽게. 나는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느낌의 감각의 회로를 차단하고, 호흡을 하는데에 집중한다.
호흡,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일을 반복한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다. 시원한 공기가 느껴진다. 다시 후욱 하고 내뱉는다. 마시고 내뱉는 일을 여러번 반복해나간다. 그것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는 사이 버스는 어느덧 종점에 도착한다.
높은 고층 아파트를 지나, 호수를 넘어 달을 따라가다 보면 작은 집이 나온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재미있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버스가 스스로 알아서 운전해 내 집까지 데려다주고, 또 알아서 정류장에 사람들을 태워주는 판타지스러운 세계. 왜인지 버스에 타있는 나는 그렇게 느껴진다. 이 버스가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운전해지고 있다는.
그러다 문득, 이 버스가 신데렐라의 호박마차와 닮았다는 생각이 스친다. (밤 12시가 되면 사라지는 것도 그렇고, 어딘가 마법적인 요소도 그렇다.)
물론 신데렐라의 마차는 호박 마차이므로 내가 아는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말이다. 반짝거리는 외관에 쉽게 깨질 수 있는 푸른빛이 은은히 감도는 유리로된 호박 마차, 그 속에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안고 신데렐라가 올라탄다. 그녀를 대신해 마차를 몰아주는 마부, 생쥐가 변한 말, 또 다른 존재들이 변신한 시종들. 마법이란 참 편리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현실에서는 이걸 위해서는 엄청난 돈이 들어갈것이다.
왕자는 한 짝의 구두를 들고, 무도회에서 춤을 춘 여자를 찾기 위해 온 집안을 수소문한다. 처음에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받고 집안일로 고생하지만, 결국 왕자는 신데렐라를 찾아낸다. 구두에 발이 꼭 맞는 단 한 사람, 신데렐라. 그리고 그녀는 왕자와 결혼해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 나는 이런 생각을 거듭하며 내 집으로 향한다. 내 집은 오르막길을 올라야 도착할 수 있다. 올라가서 도어락을 누르고 문을 열면, 15평 남짓한 작은 방이 나온다. 집은 좁지만 혼자 살기에는 큰 무리가 없다. 벽에는 큰 액자가 걸려 있고, 그 속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인 「별이 빛나는 밤」이 있다. 물론 진품은 아니고 모사품이지만, 나는 실제 진품을 MoMA 미술관에서 본 적이 있다. 그 그림은 그곳의 어느 층에 전시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내가 처음 MoMA를 알게 된 것도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때문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그림을 아주 좋아한다. 놀랍게도 이 작품의 이름은 원래 ‘별이 빛나는 밤’이 아니었다. 영어 제목은 Starry Night. 고흐 생전에는 이 그림을 그렇게 부르지 않았고, ‘별이 빛나는 하늘’, ‘밤 연구’, ‘밤 효과’ 등으로 불렸다 한다. 단순히 작품뿐만 아니라 나는 고흐라는 사람 자체에도 큰 흥미가 있다. 그는 이 작품을 그리던 무렵 정신질환에 시달렸고, 자신의 귀를 스스로 자르는 기괴한 행동까지 했다. 많은 학자들은 그 원인이 동료 예술가 폴 고갱과의 싸움 때문이라고 하지만, 다른 해석도 있다.
고흐의 생애와 죽음은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주제다. 그는 약 900점에서 1100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다. 불과 10년 정도의 기간 동안 그렇게 많은 그림을 그렸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심지어 그 10년이 그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던 때라는것을 생각해본다면, 더더욱 놀랍다.
내가 그에게 흥미를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채로 계속해서 살아갔다. 그리고 그런 불안한 감정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강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어쨌든, 내가 그의 그림을 본 곳은 MoMA 미술관이였고, 그곳에는 「별이 빛나는 밤」뿐 아니라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1931)도 전시되어 있었다.
흐물흐물 녹아내린 시계로 유명한 「기억의 지속」은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명작이다. 고체로서의 성질을 잃어버린것만 같은 시계는 시간의 상대성과 무의미함, 그리고 기억의 불확실성을 상징한다. 「기억의 지속」의 작가인 ‘실바도르 달리‘는 편집증과 강박관념,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살았던 20세기의 초현실주의 화가였다.
나는 그 그림 앞에서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작품 속 배경은 그의 고향 카탈루냐 해안 절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황량한 해변을 응시하면, 그곳에서 느껴지는 쓸쓸함이 밀려온다. 엎드려 바닥에 철푸덕 누워있는 괴생명체는 그 감각을 더 강렬하게 만든다. 마치 그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생물은 녹아내리는 주변에 맞추어 진화한것처럼 보이기 까지 한다.
편집증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실바도르 달리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 무의식적인 세계’ 에 대해서 무언가 자신만의 고유한 견해를 가지고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그림을 보고있자면, 그의 세계가 물밀듯이 밀려들어온다.
그러니까, 나도 왜인지 모르게 그가 바라보았을 시선처럼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라는 이야기 이다.
그는 이 세상을 초현실주의적인 시각으로 보았다. 현실에서 보여지는 그런 평범한 시각을 넘어선 새로운 감각으로 세계를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장면들, 그는 그런 작품을 수없이 많이 남겼다. 그는 우리가 굳게 믿었던 현실이 사실은 손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흐물흐물 죽처럼 녹아버린 회중시계를 통해 보여주었다. 나는 때로 그의 그림을 보고있자면, 참을 수 없는 감각이 느껴지고는 한다. 그리고 나는 마치, 그의 그림과도 비슷한 꿈을 꾼적이 있다. 물론 세부적인 디테일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다. 하지만 뭔가 그의 그림과 꼭 닮은 것이 있다. 가령 흐물흐물 녹은 시계와도 같은것.
나는 꿈속에서 어떤 장소에 있었다. 그곳은 짧은 시간마다 계속해서 모습을 바꿔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정신적으로 흔들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가구와 방이 하얀색인 공간에 멈춰 섰다. 그곳에는 ‘나’와 ‘거울’, 단 두 가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나머지는 전부 하얀색이었다. 회중시계도, 시간을 알리는 뻐꾸기 모형도, 침대도, 심지어 거울속의 ‘나’조차도 모두 하얗게 변해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할 수도 없이,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진짜 나와 거울 속 ‘나’의 모습은 어딘가 이질적이다.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거울에 비친 나는 하얗게 보였다.
거울속의 나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온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그리고 거울 속의 나는 씨익 웃는다. 이윽고 거울 속의 나는 모습을 바꾸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