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환상을 보다

02.녹아내리는 나에 대한 꿈, 그리고 태양신 라(Ra)

by Norturne

거울 속의 ’나’ 는 갑자기 왼쪽으로 어깨를 부자연스럽게 기울이며, 다리부터 천천히 녹아 없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내가 녹아서 없어지는 모습을 바라본다. 다리가 마치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변한다. 더이상 그 다리로는 걸을수도, 앉을 수도 없을것 같다.

눈사람이 녹듯이 거울 속 ‘나’는 스르르 녹아 이윽고 얼굴만 남기고 모두 사라져버린다.

녹아버린 나는 더 이상 진짜 ‘나’를 바라봐 주지 않았다. 하지만 물컹물컹한 덩어리 같은 형체로 다시 나타나, 나를 뚜렷이 응시했다. 너무 똑바로, 마치 무언가 꼭 알아야만 하는 진실을 전하려는 듯이. 하지만 그건 더이상 나‘ 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컹물컹한 ‘그것’은 녹아버린 손가락으로 거울 바깥쪽을 가리켰다.

나는 몸이 이끌려 거울로 들어가버릴듯이 손을 뻗어 ’그것’ 을 만지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손가락을 대는 순간, 거울은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져버렸다.

산산조각이 난 유리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물컹물컹한 ‘무언가‘도 사라졌다.

바닥에 떨어지자 유리 조각들은 온통 하얀색으로 변해버렸다. 더이상 손을 비춰도 비춰지지않은채로. 유리가 하얀색으로 변해버리자, 나도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녹아내리는 감촉은 참 이상하다. 질척질척하고도 흐물흐물하게.

그렇게 되니 이젠 더이상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그곳에 있던 ‘나’ 또한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너무 놀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후우 하고 크게 내쉬며,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했다. 내 머리, 내 등, 내 다리, 그리고 내가 누워 있는 이 자리가, 그것들이 내가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있는 곳은 그곳이 아니라, 바로 여기다.


유려한 아침이 밝았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지금은 오전 6시 50분. 오늘도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기 위해, 녹아버린 ‘나’ 같은 건 잠시 잊어버린 채로, 다시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나는 개인적인 이유로 지금 일을 쉬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인지 낮과 밤이 자주 바뀌곤 한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밤이 되면 저절로 눈이 감기고, 아침이 되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예전에 직장을 다닐 때와는 차원이 다른 자유다. 정해진 틀에 맞춰 아침마다 전철을 타고, 회사에서 하루 종일 컴퓨터를 두드리고, 점심때는 의례적인 대화를 나누던 시절. 불과 일주일 전의 일이지만,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나는 이 휴식 기간을 잘 활용해 보려고 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난 뒤, 15평 남짓한 작은 방 안에서 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동안 나는 이 작은 집 안의 사물들을 세세하게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을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는가. 아마 그래서일까, 익숙해진 풍경 속에서 5년 동안이나 매일 자고 일어나고 준비만 하며 의례적인 생활을 반복해 온 것이다.


오른쪽에는 베란다가 있다. 창밖으로 해가 떠오른다. 둥글고 눈부신 해. 내 눈에도 이렇게 신비롭게 보이는데, 과거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문득 이집트 신화가 떠오른다. 나는 원래 건국 신화나 그리스·로마 신화, 혹은 신에 관한 이야기에 흥미가 많다.


고대 이집트 제5왕조 때, ‘태양신 라(Ra)’는 주신으로 숭배를 받았다. 그는 단순히 사람의 형상을 한 것이 아니었다. 벽화 속 라는 매의 머리를 하고, 코브라가 태양을 둘러싼 모양의 왕관을 쓰고 있다. 머리 위에 거대한 태양을 이고 다니는, 절대적인 힘의 소유자였다. 물론 파라오만큼은 아니었지만, 이집트의 왕은 거의 신에 버금가는 권력을 지닌 존재였다. 태양신 라는 세상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여겨졌고, 해가 뜨고 지는 것은 곧 그가 하늘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정오의 태양처럼, 라는 가장 강력하고 완전한 힘을 가진 존재였다.


태양은 오후 12시쯤 가장 높이 뜨는데, 이를 ‘남중고도’라 한다. 나는 해를 바라보며 그런 사실들을 곱씹는다. 태양은 다른 별들에 비해 지구와 멀지 않다. 평균 거리 약 1억 4,960만 km, 즉 1AU(천문단위). 태양 표면 온도는 약 5,500~6,000, 대기층은 무려 100만에 이른다. 만약 우리가 지금 거리보다 더 가까이 있었다면, 이미 타서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낮과 밤이 생기는 이유조차 태양 덕분이라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다.


매일 맞는 아침이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이렇게 해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으니까.

저 멀리 있는 붉은 점이 사실은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내가 태양의 무수한 대기층을 뚫고 그 앞에 다가선다면, 나는 꿈속의 ‘나’처럼 금방이라도 녹아 사라져 버릴까?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저 멀리 태양신 라가 머리에 태양을 이고서 하늘을 유유히 건너고 있는 듯하다. 마치 늘 하던 일처럼 자연스럽게. 나는 속으로 그를 응원한다. “네가 없으면 낮과 밤도 없겠지“ 라고.


나는 기본적으로 조용하고 침묵을 지키는 성격이라 혼자 집에 있을 때는 책을 읽거나, 예전에 꾼 꿈을 재구성하는 일을 즐긴다. 또 퍼즐 맞추기를 좋아하고, 유명한 예술작품과 그림 보는 것도 좋아한다. 그래서 하루 대부분을 혼자 보낸다고 해도 크게 심심하거나 권태롭지는 않다.


대학 시절에는 친한 친구와 종종 시간을 보냈었다. 또 대학 전공을 살려 어린아이들에게 영어책을 읽어주는 봉사활동을 주 1~2회 하기도 한다. 운동을 하러 나가거나 가끔 외식하는 일을 제외하면, 나는 대부분 하루를 집 안에서 보낸다. 하지만 이런 나의 라이프스타일에 이제는 무척 익숙해졌고, 이 루틴을 잘 받아들이고 있다.


놀랍게도, 꽤나 두꺼운 책을 한두 권 정도 읽다 보면 몇 시간은 그냥 휙휙 지나가버린다. 이럴 때는 정말 “Time flies like an arrow”라는 말이 잘 와닿는다.

시간은 내가 잡을 수 있는 선을 이미 완전히 벗어나버려, 내 손이 전혀 닿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이럴 때는 꽤나 곤란하지만, 나는 사색하는 시간조차도 좋아한다.


내가 붉어지는 태양을 보며 하는 일에 대해 소개해보자면, 커피를 내려 마시기 위해, 커피콩을 직접 갈아 종이 깔때기에 갈아놓은 커피가루와 뜨거운 물을 같이 넣고 컵에 우려낸다. 우려내는 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리므로 나는 기지개를 펴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린다. 여기까지 하게 되면 커피에는 물과 가루가 적당히 섞여 풍미가 깊은 커피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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