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세기 사이버 포뮬러
10년 전쯤의 일이다. 새로 부임하신 과장님을 모시고 출장가야할 일이 있었다. KTX를 타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출장을 갈 때면 적어도 40분 전에 버스정류장에 가서 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새로 오신 과장님은 조금 여유를 부리는 것 같았다. 아직 같이 식사도 한 적이 없는 서먹한 사이라 눈치를 보다가 "과장님, 출장가셔야 하는데요." 했더니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기차 출발시각까지 남은 시간은 30분이었다. 진작 얘기했었는데.
대중교통으로는 도저히 제때 도착하기 힘들 것 같아서 내 승용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과장님은 약간 책망하듯이 주차비를 내주신다고 하셨다. 과장님도 기차역 주차비가 부담되서 버스를 타는 게 보통인데, 다른 일에 신경쓰느라 시간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하시며, 앞으로 그런 건 눈치보지 말고 얘기해 달라고 하셨다.
생각보다 시간이 빠듯하다. 나도 출장에 동행해야 해서 주차시간까지 감안하면 속도를 내야 했다. 평소 운전 스타일은 다른 차에게 양보하면서 뒤에서 욕하는 비겁한 스타일인데, 이 날은 욕을 먹는 운전기술이 필요했다. 모드 전환에 대한 부담감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회사에서 KTX역에 가는 길은 왕복 8차선의 간선도로지만, 중간에 급한 커브길이 있다. 적어도 시속 오십킬로미터 미만으로 커브를 돌아야 안정적인 급커브 구간이었다. 우리 SUV가 진입하기 1초전 쯤 좌회전 화살표가 꺼지고 노란불이 켜졌다. 평상시와 다르게 엑셀을 밟았다. 다음 신호를 기다렸다가는 기차를 놓칠 게 뻔했다. 신임 과장님과 함께하는 첫 출장을 그렇게 망칠 수는 없었다.
시속 백킬로미터 정도의 속도에서 급히 핸들을 왼쪽으로 돌렸다. 큰 도로라 다른 차와 충돌할 위험은 없었지만 중형SUV로 시도하는 급커브가 너무 위험하다고 느꼈다. 차체가 높다보니 자칫 전복될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스라다~!"
아스라다는 사이버 포뮬러에이스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F1 자동차에 장착된 슈퍼컴퓨터의 이름이다. 주인공 이름이 강진우였는데, 이 친구는 매번 엑셀을 밟은 채 커브를 돌다가, 너무너무 위험한 순간이 되면 "아스라다~!"하고 슈퍼컴퓨터를 불렀다. 그러면 슈퍼컴퓨터 아스라다는 차체 옆의 선풍기를 작동시켜 차체가 뒤집히지 않도록 눌러준다. 애니메이션을 즐겨 보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 그게 생각이 났는지 본능이라는 게 정말 무서웠다.
십년 넘게 몰고 다닌 SUV에 선풍기는 없었지만, 안전한 좌회전에 성공했다. 조수석에서 회의자료를 보시던 과장님의 몸이 기우뚱 했지만 다행히 내 비명을 듣지는 못한 것 같았다. 경유차라 차가 조금 시끄럽기도 했고, 음악도 틀었던 것 같고, 너무 집중을 하셔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기차역에 주차를 하고 출장에 다녀올 때까지도 내 비명에 대해 아무 언급이 없었다. 분명히 못 들은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그 이후에도 며칠동안 자꾸 생각이 나서 얼굴이 혼자 시뻘개지곤 했다.
얼마 후 신임 과장님의 환영회식이 있었다. 술이 얼큰하게 오른 채로 화장실에 다녀오는 데, 과장님이 건배사를 하고 계셨다. "어! 마침 왔구만. 자, 건배합시다!!"
영문도 모른 채 잔을 들고 합류했는데, 과장님이 건배사를 한참 하더니, "우리는!" 하고 선창하셨다.
그러자 부서원들이 "아스라다!~"하는 것 아닌가?
진짜 쪽팔렸다.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폭발할 것 같았다.
사실 그날 과장님은 처음 보는 직원이 갑자기 운전을 하다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아스라다~!"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데, 너무 놀랬다고 했다. 그런데 안 한척 태연한 모습을 보니 어이가 없고, 얼마나 민망하면 저럴까 싶어서 이해는 되는데, 자다가도 낄낄대며 일어날 만큼 웃겼다고 하셨다. 과장님도 그 애니메이션을 봤었는데, 실제로 운전할 때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게다가 과장님 입장에서는 그 때 그렇게 빠른 속도도 아니었다고 했다.
한동안 과장님을 비롯한 빌어먹을 부서원 놈들은 사무실 안에서 걷다가도 방향을 틀 때면 아스라다를 외쳤다. 어쩌다 아스라다를 안 하고 턴을 하면 과장님이 진지하게 그러다 사고난다고 하셨다. 옆 부서에서 놀러 온 사원이 왜 저러냐고 묻길래 몰라도 된다고 했다. 그 놈 눈빛이, 다 알고 하는 소리 같았다.
여유있게 계획해서 안전운전 하자고 과감히 고백하는 흑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