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베지터

by 김과장

드래곤볼에 등장하는 베지터는 항상 화가 나있었다. 사이어인이라는 종족 특유의 공격성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같은 종족임에도 손오공이 온순한 것을 보면 태생 외에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손오공의 도복보다 훨씬 좋은 전투복을 입고, 멋진 스카우터로 전투력을 측정할 수도 있으면서 왜 베지터는 항상 화가 잔뜩 나 있었을까? 왜 그토록 비열하게 웃으며 지구인들을 괴롭혔어야 했는지, 심지어 왕족이면서 꼭 그래야 했는지 궁금했다.


어른이 되고 사십줄을 훌쩍 넘고 나서야 베지터가 세상에 가진 원망의 이유와 치유과정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우연히 처남이 쓰던 방에 소중히 꽂혀있던 드래곤볼 만화책을 펼쳤을 때, 지면 한페이지를 가득 채운, 초사이어인으로 변한 결연한 표정의 베지터를 보며, 왜 이걸 이제야 알았을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사이어인의 왕족인 베지터가 손오공을 그토록 질투한 원인은 바로 머리숱이었다.


내 반듯했던 이마선은 아주 은밀하게, 느리지만 순식간에 변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이발하다가 앞머리를 조금 짧게 잘랐나 싶었다. 외출 준비를 하다보면 와이프가 자꾸 다가와서 머리를 만졌다. "왜 여기만 짧은 것 같지?" 하며, 이마 양쪽이 보기 싫게 드러난다고 했다. 염색이 되지 않은 머리카락 뿌리부분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염색을 하려는데 미용실 사장님이 탈모가 있어서 염색을 최소화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인정할 수 없었다. 염색을 했는데도 이마가 허전했다. 어느날 자전거를 타는 데, 아들녀석이 "아빠, 바람에 머리가 날려서 대머리 같아!" 하며 크게 웃었다. 티비를 보다가 대머리 얘기만 나오면 아들녀석이 나와 눈을 맞췄다. 나는 베지터가 되었고, 눈치없는 트랭크스는 엄청 혼났다.


정말 신경이 쓰였다. 탈모에 효과가 있다는 스프레이를 샀다. 바람이 불어도 이마가 드러나지 않도록 머리를 고정해 주었다. 앞머리가 자꾸 가운데로 모여서 펌도 했다. 바람이 불면 머리를 붙잡고 걸어야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혹시 우습게 볼까 걱정이 되었다. 스쳐지나가는 학생들이 갑자기 '와'하고 웃으면 괜히 내 머리를 보고 웃는 것 같아 인상을 쓰고 걸음을 채촉하곤 했다. 자전거 출근을 그만두고 와이프 출근차를 얻어타고 다녔다.


어느 날 옆 부서 남과장이 말을 붙였다. "김과장, 정말 노력하는구나. 얼추 가려지긴 하네?" 하며 빙글빙글 웃는다. '회사사람들도 다 알고 있구나' 남과장의 빽빽한 머리숱을 흘끗 보는 데 하마터면 울뻔했다. 남과장에게 카톡이 왔다.

「나도 심각한 탈모야. 정수리부터 빠졌었는데, 약을 먹었더니 괜찮네. 부작용이 있다고는 하는데 한 번 찾아가봐. 나는 효과봤어. 화이팅!」남과장의 난데없는 커밍아웃이 너무나 고맙고 힘이 났다. 그래, 포기하지 말자. 성지에 가자. 손오공이 성지에서 선두를 얻은 것처럼, 나도 성지에 가서 탈모약을 받아보자.


성지는 역시 성지였다. 수많은 베지터들이 오만상을 쓰고 모여 있었고 크리링도 몇몇 보인다. 주말의 성지는 명동성당만큼 붐볐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뭐하는 곳인데 이렇게 사람이 많나 궁금해 하는 표정이지만 서슬퍼런 베지터들에게 말을 붙일 수 있는 용기있는 자는 없었다. 모발 결핍은 남녀노소, 직업과 국적을 가리지 않고 발생하는 것 같았다. 독일 베지터의 이름도 있었는데, 간호사 선생님은 능숙하게 호명했고 독일 베지터도 알아듣고 진료실에 들어갔다. 결여된 자들이 모인 성지에 언어의 장벽은 없었다. 여기는 성지, 바벨탑이다.


내 앞에 50여명이 있었다. 오늘 약을 받을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한시간만 대기하면 된다고 한다. 사람들 표정, 이마, 정수리를 몰래 보고 나름 평가하면서 상황을 즐기고 있는데, 크리링 한 분이 낙담한 표정으로 진료실을 나왔다. 진료실의 시험을 통과한 자만이 선두(드래곤볼에 등장하는 회복제, 성지에서 카린이라는 고양이가 키우는 콩)를 얻을 수 있는 것 같았다. 내 차례가 되어 진료실에 들어갔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의사선생님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머리카락만 만져 보셨다. 많이 가늘어졌지만 잘 왔다고, 구원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아까 독일 베지터한테도 한국말로 설명하셨는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얼른 나가라고 하셨다.


선두를 복용한 지 일년이 지났다. 혹시라도 떨어지지 않도록 꾸준히 성지를 방문하고 있다. 이제 파마도 하지 않고 스프레이도 뿌리지 않으며 자전거도 씽씽 타고 다닌다. 다른 분야의 자존감이 약해지는 부작용을 많이 걱정했는데, 다행히 여전히 강력한 자존감을 유지하고 있다. 손등에 머리카락이 나는 게 유일한 부작용이다.


드래곤볼은 소원을 들어주지만, 베지터는 머리카락을 소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지터는 더 벗겨질 수도 있다는 공포와 손오공에 대한 질투를 극복하고, 결국 멋진 미소와 의리로 꽉찬 사나이가 되었다. 머리카락을 얻지는 못했지만 아름다운 아내 부르마와 사랑스러운 아들 트랭크스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베지터가 수련을 관두고 눈썹 위 몇 센티까지 씻어야 세수라고 얘기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면, 아빠가 되거나 다른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베지터가 난 놈이라는 거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베지터도 나중에는 깨달았을 것이다. 초사이어인이 되어 머리가 노랗게 되어도, 기가 가득한 장풍과 주먹에 곤죽이 된 후에도 그의 머리숱은 변함이 없었다. 크리링을 보며 늘 노심초사하던 세월도 어느 덧 수 십년, 이 정도면 베지터도 알았을 것이다.


아. 나는 그냥 이마가 넓은 거였구나. 그렇게 베지터는 손오공 일당에 합류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고마워 남과장. 덕분에 당당하네. 고마워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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