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써보자
그동안 잊고 살아왔던 게 있었던걸, 요 근래에 깨닫게 되었다.
작년 말, 베트남과 일본을 여행하며 느꼈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그것인데, "외국어에 대한 배움"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라는 것을 요 근래 다시 상기하게 되었다.
시작은 나의 중학생 시절이었다. 나와 다섯 살 차이가 나는 우리 형이, X-Japan의 Tears와 Endless Rain을 흥얼거리며 문을 걸어 잠그고 노래를 부르던 장면이 생각난다. 형이 외출하는 순간이 오면, 형 방에 몰래 가서 그 CD를 컴퓨터에서 재생해서 들어보곤 했는데, 노래야 뭐 그렇다 치고, 앨범 커버가 지나치게 게이(?) 같다고 해야 할까? 예쁘지도 않은 남자가 여장을 하고 있어서 아주 거북했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흘러, 나도 그 당시 엑스 재팬의 노래를 흥얼거리던 형의 나이가 되었다.
그 시대 때에는 초고속 통신망이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라, 웹하드 등을 통해 해외 드라마나 영화를 쉬이 볼 수가 있었는데, 그중에 나는 일본드라마를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 그 당시 한국드라마와 비교했을 때, 다양한 직업의 전문성을 잘 보여주고 있었고, 무엇보다 어쭙잖게 러브라인을 넣지 않는 것과, 16부작인 한국드라마에 비해 11부작이었던 일드의 빠른 전개가 성격 급한 나에게는 아주 딱 이었다. 그러한 결과로, 많은 드라마와 애니메이션, 거기에 더해 해당 작품들의 OST까지 섭렵하다 보니, 일본문화와 일본어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진학했다. 점수에 맞춰 흥미를 생각하지 않고 왔기에 내가 딱히 듣고 싶었던 교양과목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1학년때에는 일본어, 3학년때에는 중국어, 4학년때에는 스페인어를 수강해서 좋은 점수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나는 언어를 배우는 게 가장 재밌고 흥미로웠던 순간이었다고 기억한다. 사실 와이프에게도 그 당시 많은 상담을 했지만 진지하게 일어일문학과로의 전과도 고민했었다. 물론 지금은 안 한 게 정말 신의 한 수이긴 한데, 적성과 맞지 않는 과를 와서 4년 내내 꽤나 자괴감에 빠져있던 나로서는, 대학시절, 유일하게 나의 자존감을 올려주는 것은 '외국어 학점'였던 거 같다.
나는 해외어학연수 같은 것을 받아보지는 못했다. 영어는 물론이고 일본어 중국어등도 현지에서 배워본 적이 없는데, 지금 생각하면, 내가 다니던 대학에서 1년간 중국으로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걸 ROTC 한다고 못해본 게 매우 아쉽다. 그 당시로 돌아간다면, 일반 군복무를 하더라도 교환학생을 Try 해봤을 거 같다. 그만큼 아쉽다.
어려서는 막연히 '돈'만 없어서 해외를 못 간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점차 자라면서 비용적인 부분은 제한요소에서 점점 줄어들지만 시간과 기회라는 요소가 점차 주요한 제한요소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나이나 체력, 용기 등과 같이 앞으로 더 큰 제한요소가 등장한다는 것을 이제는 확실하게 알고 있다.
비록 어학연수를 받아보지는 못했지만, 중고등학교 수능 영어공부부터 해서 취업 전 토익스터디 그리고 취업 후 주기적인 영어말하기 등을 공부하면서 나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것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언어를 배움에 있어 그다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컴퓨터 공부나 언어 외적인 공부를 할 때는 정말 머리를 쥐어짜면서 스스로에게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입사해서도 정말 하기 싫던 알고리즘 시험을 준비하면서 인생 최대의 위기라고도 생각했었다.
그런데, 외국어 공부를 할 때에는 그다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던 거 같다. 내 기억이 물론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취업을 앞두고 토익공부를 할 때에도 그랬고, 입사해서도 오픽공부 그리고 중국어 자격증 공부를 할 때에도 늘 즐거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한 외국어 자격증 시험들도 그 당시에는 꽤나 Time Critical 했던 시험들도 많았었는데...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점차 그런 재미를 놓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외국어를 즐겁게 공부한 건 입사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아침마다 나가서 학습한 중국어였다. 그때 우리 회사는 나름 교육에 진심(?)이었어서 외국어 수강에 있어 진심을 다했고, 덕분에 우리 중국어 회화반은 6개월여 동안 같은 멤버로 유지가 될 정도로 꽤 재밌었던 기억이 난다. 덕분에 중국어 말하기 시험도 급수를 딸 수 있었고, 회사에서 중국어를 배울 생각에 아침에 일어나서 회사 가는 게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중국어 공부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외국어 회화 등급 유지를 위해 '억지로' 영어 스크립트를 외워 시험 보는 등, 외국어 공부는 그저 다른 사원들과 '급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바쁘니까, 어쩔 수 없지'라는 무적의 논리로 그냥 편하게 인생을 살기 바빴던 거 같다.
계기는 역시 여행이다. 베트남을 다녀오면서, 너무나도 친절했던 사람들과, 공항에 쓰여있던 알 수 없는 알파벳이 그렇게 예뻐 보이더라. 나중에 기회 되면 꼭 한번 배워보고 싶은 언어이다. 아울러 곧바로 떠났던 일본에서, 고등학교 때부터 드라마와 애니로 학습된 나의 '가짜 일본어'로 큰 불편 없이 커뮤니케이션하고 무사히 돌아올 수가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야 느낀 거지만, 나는 외국어를 배울 때 즐거움을 느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지하철 오고 가는 시간도 아까워 네이버 사전으로 언제나 중국어를 쏼라쏼라 외우고 다니던 사회 초년생 시절 내 모습이 생각났다. 갑자기 그때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며, 공책에 단어를 써 가며 외국어 공부를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학원을 비롯해 이것저것 검색 해 보다가 "일본어 학습지"를 나에게 선물했다.
"여보, 나 일본어 학습지 신청했어"
"어머, 나도 그거 공부 같이하면 안 될까? 9월에 갈 때 좀 읽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어 그래? 좋다 좋다 같이해보자"
때마침, 와이프도 올해 9월 일본에 가기 전에 공부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돈 써서 혼날 줄 알았는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학습지를 신청한 지 2일 만에, 집에 꾸러미가 도착했고, "비닐을 뜯으면 환불불가"라는 메시지를 읽고, '환불 할리 없다' 라며 쿨하게 비닐을 뜯고 1주 2주 치를 모두 공부했다. 아주 옛날에 써버릇하던 히라/가타 가나가 손에 익지 않았다. 하지만 학습 범위가 초반이라 쉬워서, 문자 익히기 위주로 공책에 단어를 써 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쾌감. 종이에 한글 말고 다른 문자가 내 손을 통해 쓰여 나갈 때 기분을 다시 느끼니 너무나도 좋았다.
올해는 작년처럼 숨죽이고 살지는 않을 예정이다. 특히 학습적인 부분에 대해, 좀 더 챌린지 해 보며 스스로를 가꾸어 나갈 것이다. 아빠로서 내가 유튜브 보면서, 아이들에게 책을 보라고 하는 부분도 하지 않을 것이고, 그동안 아이들에게 '공부는 나랑 안 맞는다'는 말을 많이 하며 도망치곤 했었는데, "공부에 진심인 아빠"의 모습도 보여줄 생각이다. 물론 본질은 남을 위한 공부가 아닌, "나를 위한 외국어 공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