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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담 Mar 30. 2023

늘 나누어 주던 사람

이젠 그곳에서, 평온하시길

"동서, 아직 소식을 못 들었나 본데... 어머님이 아무래도 돌아가신 거 같아"

"에?"


 월요일 아침은 늘 바쁘다. 내부적으로 진행된 일 처리등을 체크함과 동시에, 고객사를 포함한 대외적으로 우리 팀이 어떤 것들을 받아와야 하고, 어떤 것들을 줘야 하는지 빠짐없이 챙기느라, 시간이 금방 지나가기 일쑤다. 이번주 월요일도, 늘 그렇듯 밀도 있는 오전시간을 보내고, 뒷자리 동료와 드라마 카지노에 대한 결말도 이야기하며 잠깐 쉬고 있었던 그때, 안 받고 싶었던 전화 한 통을 받게 된 것이었다.


 장모님이 돌아가셨다는 내용의 전화 통화였다. 그나마 한 가지 1%의 확률은, '신원 확인 중'이라는 내용도 함께. 그 1%의 희망을 걸어볼 수밖에 없었다. 


"장인어른, 어떻게 된 거입니까..?"

장인어른은 흐느끼며 말씀 주셨다. "어.. 박서방, 그게, 네 장모가 먼저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목소리의 떨림과 슬픔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느껴졌다.


 집에 있던 와이프와도, 어머니를 잃은 슬픔으로 절규하는 전화상의 목소리를 듣고, 내가 더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저 들어주고, 기댈 수 있게 옆에서 지켜주는 일뿐이라는 것 밖에.


 그렇게 우리 가족 모두, 어머님이 계신 장례식장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너 걔랑 계속 만날 거니?"

 세상에 딸 가진 부모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이십 대의 나는, 다른 어른들이 보기엔 한없이 부족해 보이셨나 보다. 군대 전역해서 빌빌대고, 취업준비한다고 문제지나 풀고 있던 나를 보고는, 못 미더운 셨는지 내 와이프에게 '공군사관학교' 졸업한 장래가 유망한 남자를 소개해 줄까? 라며 묻기도 하시고 그러셨다고 한다. 나는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 나보다 돈 많고 능력 좋은 남자는 세상에 쌔고 셌다. 그런 식으로 같은 잣대로 비교하면 끝도 없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짧은 취준생 생활을 끝내고, 잠깐의 이별 후에 다시 만났을 때에는, 장모님이 오히려 더 결혼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셨다고 한다. 그 당시 내 나이가 스물일곱여덟이었으니, 그때 기준으로도 결혼하기엔 꽤 젊은 편이었지만, 나보다 연상이던 와이프다 보니, 비록 내가 가진 건 없어도, 조금 더 노력하고 건실하게 살면 가정을 일궈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나만의 기대감' 하나로, 결혼을 일사천리로 진행하게 되었다. 

 그렇게 그 분과 첫 인연을 맺게 되었다.


"박서방은 잠을 도대체 몇 시간을 자는 거니? 지치지도 않나 봐 ㅎ"

 가진 거 1도 없이, 잘할 수 있다는 믿음만으로 진행한 결혼, 현실은 역시 녹록지 않았다.

낡은 전세 빌라 옥탑방에서 신혼집을 차려, 우리끼리 아기자기하게 꾸미고 사는 건 좋았으나, 아이가 태어나면서 모든 조건이 불비해지기 시작했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고, 단열이 안되다 보니, 아가옷에도 곰팡이가 슬기 일수 였고, 아이가 산책할 공간도 허락되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보다 못한 장모님이 '세대 합가'를 제안하셨고, 나는 너무 감사하게도 약 2년 반을 새로운 '부모님'과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 


 아마 돌이켜보면, 그분의 시각에서는 나라는 생물체가 정말 특이하게 보이셨을 것 같다.

토요일 아침에 농구 갔다 와서 하루종일 잠만 자질 않나, 맨날 하루에 한 개씩 맥주 깡통이 나오질 않나, 아침 식사는 굉장히 신성한 것이겠만, 저놈의 사위는 그 시간 잔다며 쿨쿨 꿈나라로 가있질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한테 직접 이야기는 안 하시더라. 두 딸들에게 우스갯소리로 박서방은 잠을 도대체 저렇게 오래 자도 건강에 문제없느냐, 매일 맥주를 먹는데 간은 멀쩡한 거냐며 걱정과 불만(?)을 이야기하셨다고는 들었었다. 


 사실 회사에서도 지금보다 업무 시간이 더 길었던 옛날옛적인지라,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안고, 혹은 아이는 말똥말똥한데 나 홀로 거실에서 쓰러져 자기 일쑤였었다. 그럴 때마다 일어나 보면 이불이 덮여 있고 시간은 멈춘 듯 고요하고, 아이가 놀던 거실은 모두 말끔히 정리가 되어 있었었다. 정말 '사랑'만을 나눠 주시던 분이셨는데...


 그렇게 벌써, 우리 가족이 장인장모께 폐 끼치며 더부살이를 하다가 독립한 것도 만 7년이 다되어 간다.

그간 합가하며 살면서 허튼데 돈 쓰지 않고, 미래를 위해 열심히 모은 결과 우리 네 가족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집'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게 다 장모님 은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세대 분가하고는 같이 살던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결국 우리 부부가 '아쉬울 때' 마다 도움을 요청드렸고, 만사 일 제쳐 두시고 오셔서 도움 주시던 장모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올해 초, 우리 가족은 가을쯤 일본에 가족여행을 가기로 했었다. 그 이후에, 장모님께 말씀을 드려봤더니

약간 머뭇거리시다가 여권을 나에게 주시며, 함께 가고 싶다고 말씀을 하셨었다. 

"내 표도 하나 부탁 함세. 내가 언제 또 건강하게 해외를 나가겠는가"

"아이코, 아직 일흔도 안되신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ㅎㅎ 자주 놀러 가야죠 장모님"

"고맙네"

 

 하지만, 이제는 함께 갈 수 없게 되었다...


 마지막 내가 나눈 통화는 지난주 금요일이다. 몸에 무기력증이 와서 기운이 없다는 정도만 내가 알던 정 보였었던 터라, 곧 괜찮아지시겠거니 하고 통화를 드렸었다.


"저예요, 박서방"

"어 그래, 별일 없는가?"

"네네, 몸은 좀 어떠셔요"

"좋아져야 하는데 아직 기력이 없네... 서현이 소미는?"

"네, 서현이는 학교 잘 다니고, 소미도 유치원 보다 학교가 더 좋다고 하네요"

"다행일세.."

"네네, 몸 잘 챙기시고, 기력 찾으시면 찾아뵐꼐요"

"그래, 또봄세"


 이 통화가 나와는 마지막이 될 거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장인어른을 뵈었다. '1%'의 확률을 믿었건만, 그렇지 않았다.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고, 3일간 둘째 사위, '상주'로서 가시는 길 예를 다하고자 노력했다.


 입관부터 발인까지 모두 끝나고, 볕 좋고 터 좋은 납골당에 모셔 드렸다.

돌아오는 길에 나와 주고받은 장모님의 카톡 대화를 보니, 그간 일부러 대화를 자주 한다고 했는데도, 많이 없었다. 아직도 포천 간다고 하면, "조심히 오게" 같은 답을 바로 주실 거 같다. 그러나 이제는 회신 못주시겠지...


 내가 사진 찍는 걸 좋아하다 보니, 그래도 우리 장모님 사진 많이 남겨 드렸었다.

하지만 더 남겨 드릴걸, 고우셨던 우리 사모님 더 남겨드릴걸 하는 후회감이 밀려왔다. 결국 떠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그 채울 수 없는 빈자리.. "부모님은, 기다려 주시지 않는다"


 아직도 포천을 가면 내가 즐겨 먹는 갈비탕을 데워오시고, 천년손님 사위 왔다며 광어회를 내오실 것 같다.

이런 장면들을 다시 생각하다 보니 글을 쓰는 와중에도 눈가가 촉촉해지는 거 같다.


 앞으로는 점차 그분의 흔적이 하나하나 하늘나라의 이삿짐센터로 전달되며, 미처 못 가져오신 유품들도 함께 올라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 브런치는 한 번도 못 보셨겠지만, 글 쓰고 있는 제 뒤에서 보고 계실 장모님께 작별 인사를 전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장모님, 비록 짧게나마 사위로서 만날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남은 시간도 그러셨던 대로 나누고 베풀어 주며, 알차게 살다가 가겠습니다. 그때 되어서는 장모님 좋아하시던 코다리찜 하나 사서 하늘나라로 제가 올라가겠습니다. 편히 잠드시고, 감사했습니다." 


그곳에서는 다 내려놓으시고, 편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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