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호수에
필자가 근무하는 회사는 요새 피어리뷰(Peer Review)가 한창이다. 피어 리뷰란, 함께 일하는 동료가 바라보는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를 의미하며 우리 회사는 아직은, 다른 회사들과는 다르게, 슈퍼 바이저들이 해당 데이터를 '레퍼런스'만 한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나는 이러한 '전사적'인 업무에 대해선 상당히 무관심한 편이다. 사실 무관심해도 되는 것이, 고객이나 동료의 업무를 체크하거나 내가 봐줘야 하는 부분은 '즉시'성을 동반하기도 하거니와, 일정을 내가 체크를 해야 하는 반면에, 평가, 피드백, 사내 필수 교육 등 '전사' 적 이벤트는 결국 시간이 지나면 아쉬운 누군가가 단체방을 만들어서 나에게 '해야 합니다'라고 노티를 해 주기 때문에, 그냥 뭉개고 있어도 크게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귀찮아서 계속 동료 평가를 뭉개던 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사내 시스템 메일을 받고 나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A프로님은... 음, 뭐 대충 기분 안 나쁘게 써주자."
"B프로님은 올해 임팩트가 엄청났잖아? 최대한 미사여구로 써드리자"
"C프로님은, 책임감이 강하셨지. 최대한 그 부분을 살려서 글을 써 드리자"
동료 평가 페이지에 접속 한지 수 분이 흘렀을까? 나는 나에게 할당된 동료 3명에 대한 장점 및 보완점을 간단히 기술 한 뒤, '저장'버튼을 눌러 피어 리뷰를 모두 마칠 수 있었다.
평가 페이지에서 빠져나온 뒤, 밀린 업무를 하고 있던 와중에, 수신 메일함에 나의 슈퍼바이저가 남긴 "수시피드백 확인요청"이라는 내용의 시스템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컴퓨터 노티바에 울렸다.
사실 나는 그동안 평가결과 코멘트 같은 것도 안 본 지 오래다. 한 3년 전부터 안 보기 시작한 거 같다. 본다고 해서 내 평가가 달라질 것도 아니고, 평가가 내 기준에 공정하다고 여기 지도 않아 그저 슈퍼바이저를 통해 고과 통보만 받고 시스템 상 평가 결과는 열어보지도 않는 편이었다.(나중에 해가 되려나?)
이번엔 피드백 결과에 대한 작은 호기심에 이끌려, 수시피드백 확인 요청 메일의 링크를 따라 사이트에 접속해 보니, 앞서 내가 피어리뷰를 했던 그 페이지로 랜딩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슈퍼 바이저도, 이곳에서, 나에 대해 보완점과 더불어 장점을 적기 위해 노력하셨겠구나...'라는 개인적인 공감을 하며 수시 피드백을 열어 보았다.
"현재 맡고 있는 업무에서, 높은 책임감과 주인의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고객 대응 및 프로덕트를 잘 관리하고 있으며.... (중략) 팀원들을 잘 이끌어 가며 프로젝트의 소중한 산출물 작성에도 기여를 하고 있음."
순간, 그동안 회사에서 우리 팀에 주어진 많은 일들에 대해 주인도 아닌 놈이 주인의식 갖추고 사느라(?) 온갖 일에 다 관여하며 물을 여기저기 퍼줬던 터라 가뭄에 시달려 말라버린 지 오래인 나의 마음속 호수에도 단비가 내리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간 '내가 나에게 해 주던 셀프 격려'를, 남이 나에게 해주는 것을 들으니, 마음 한 구석에서 울음이 나왔나 보다. 그 울음이 내 마음속 호수의 비가 되어, 말랐던 대지를 젹셔준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평가 결과도 아닌데, 실제 내 연봉과 직결되지도 않는데도 나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나를 공감해 주는 사람이 나의 슈퍼바이저라니. 내가 회사에서 해온 일들에 대해, 상사가 함께 공감을 표했다는 것이 기쁠 따름이었다.
비록 이번 수시피드백이 한 해 농사에 대한 정식 성적표는 아니었지만, '내가 이 조직에서, 남에게 폐 안 끼치고 잘 해내고 있구나.' 하는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은 거 같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수 있었다.
그래도, 이대로 기뻐만 할 수 없겠다고 생각이 든 게, '이 정도 공감'으로 메말랐던 나의 마음속 호수가 적셔진 것은 문제라고 생각이 들었다. 평소 수자원 관리를 내가 안 했으니, 이렇게 되는구나 싶더라. 사실 어떻게 내 마음속 호수의 수자원을 관리해야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노는 법을 잘 모르고 살아온 인생, 어떻게 쉬어야 수자원을 관리할 수 있는 것일까? 앞으로 이런 '칭찬'이라는 채찍에 휘말려 달릴 수도 없는 몸을 이끌고 달리기를 하려 하지는 않을지, 그러다 보면 또다시 내 마음속 호수에는 가뭄이 밀려올 텐데... 하는 걱정도 들었다.
뭐, 다가올 걱정은 굳이 사서 하지 않기로 노력 중이다. (잘 안된다 사실, 어렵다.)
언젠간 어떻게든 나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번 나를 믿어보기로 했다.
내 마음은 마른 호수를 가지고 있어도, 큰 불 없이 잘 이겨냈으니까, 너무 걱정말자. 혹시나 길을 못 찾더라도 괜찮고 또 괜찮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