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입장과 나의 입장
"빛담, 평가면담했어?"
"아니요, 형님은요?"
"응, 나는 방금 하고 왔네, 나보다 더 고생한 사람이 있어서 나는 좋은 평가는 못 받았어"
"그런 게 어딨 어요, 다들 열심히 한 건데"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올해 정말 열심히 해서 후회는 없어"
바야흐로 평가 시즌이었다. 평소 연락하던 A프로님에게서 평가면담을 했고, 결과가 좋지 못해 서운한 듯한 말을 나에게 하신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 A프로님의 평소 노력을 잘 알기에, 나까지 더 기분이 안 좋아지는 듯했다.
한해 개인 평가의 결과는 꽤 많은 것들에 영향을 미치기에, 우리는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다음 해 연봉인상률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아울러 연봉 외의 1회 소멸성 특별 보너스도 받게 된다. 게다가, 회사에서 시행하는 해외 연수나 석박사 선발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에, 회사생활에 조금이나마 뜻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평가는 너무나도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A프로님이 면담결과를 나에게 메신저로 알려주셨을 때, 나는 아직 평가 면담 전이었고, 올해 필자가 해온 여러 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내심 스스로 '꽤 좋은' 평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평가권자는 무슨 일인지 나를 불러 면담을 하지 않았다.
이전에 나는 그에게 대면 면담보다는 메신저를 통한 면담이 편하다고 이야기를 해 두었기에, 그와의 1:1 메신저 창에서 무슨 결과가 올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의 채팅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더라.
점점 평가 오픈 날이 다가오는데, 불안해졌다. 다급히 사내 게시글을 찾아보니, 나와 같은 사례가 몇몇 있더라. 그들도 불안하니까 그런 글을 올렸던 게지. 그러한 글들에 달린 댓글들은 대부분, '좋은 평가는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논리는, 좋은 평가를 받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미리 이야기를 해도 크게 상관이 없지만, 상대적으로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아가는 사람에게 미리 이야기해 봤자 좋을게 뭐가 있냐는 논리였다.
설득력은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길 바랐었다. 내가 고과권자에게 '좋은 평가'를 맡겨두었던 건 아니지만, 과장 진급하고 나서부터는 사원 대리 시절에 비해 좋은 평가를 받아가는 비율이 너무나도 줄어들어 평가철만 되면 자괴감에 빠지곤 했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좋은 평가를 못 받아 가는 건 아닐지, 불안한 감정이 점차 커져만 갔다.
결국, 고과권자는 나에게 평가면담을 하지 않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평가를 사이트에서 직접 확인하게 되었다. 결과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좋지 못했다. 어떻게든 이번만큼은 잘 받고 싶어 길게 작성했던 나의 평가 sheet 항목 내 내용에 비해, 1차 및 2차 평가권자들의 아주 메마른 한 줄,
"더 열심히 하세요"라는 말이 지난 1년간 누구보다 스스로 일을 만들어서 해오며 팀 내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고 생각한 내 이성을 잠시 잃게 했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누르고, 외투를 조용히 입고 핸드폰을 챙겨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평소 화가 치밀거나 생각을 혼자 해야 할 때가 있을 때 나는 회사 주변을 홀로 걷곤 하는데, 이번 경우가 딱 그랬다.
'도대체, 올해도 안주는 거면, 나보고 나가라는 건가?'
'나도 몇 년 있으면 부장진급 해야 하는 연차인데, 언제까지 다른 부장진급해야 하는 사람들 챙겨주겠다고 나만 못 받아 가는 거지?'
내가 받아들인 초라한 성적표가 스스로 납득이 가질 않았다.
고과 등급 중 최상위 고과를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생각한 건,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성과'가 가야 한다는 나의 지론이었고, 나는 '열심히 잘' 올해 해왔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평가 면담등을 통해 왜 나에게 이런 안 좋은 평가가 내려졌는지에 대한 피드백도 없었던 것에 더더욱 분노했다.
'미안하다, 너 말고 다른 사람 챙겨줘야 했어서...'
평가권자와 면담하는 상상을 하였는데, 분명 저럴 것이다.
너무 싫었다. 이 게임에서 가장 싫은 부분은, '정보의 비 대칭성'에서 기인한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무엇을 더했길래 그 사람이 좋은 평가를 가져가야 하는지에 대해 알 수 없으니 더욱더 '기울어진 운동장' 안에서 나 홀로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돌아와 외투를 벗고 있는데, 평가권자와 눈이 살짝 마주쳤다.
'젠장, 이런 상황인데도 내 감정을 숨겨야 한다니...' 나는 하릴없이 쓴웃음을 지으며 외투를 벗어 의자 뒤편에 걸쳐놨고, 평가권자도 이런 나의 눈인사를 살짝 받아주었다.
사내 다른 곳에서도 일해보고 싶은데, 대내외적으로 안 좋은 경제 탓에, 사내에서도 '좋은 일자리'는 가뭄에 콩 나듯 씨가 말라버렸다. 필자가 현재 있는 곳이 그나마 남들이 이야기하는 '좋은 프로젝트' 중 1개이다.
그럼에도 나는 답답한 마음을 감출길이 없어 한동안 멍하니 자리에 앉아 계속 수신되고 있는 나의 메일함을 그저 바라반 볼뿐이었다.
나는 그래도 기운을 내서, 메신저에서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사내 메신저에서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 한 사람 찾기는 어려웠었다.
"수석님, 잘 지내시지요?"
"어, 빛담, 잘 지내니?"
또 한 번의 선물 (brunch.co.kr)에서 등장했던 Y수석님 이셨다. 주니어시절부터 나의 가치를 가장 높게 평가해 주시던 분, 나태해질 때면 따끔하게 이야기해 주시던 그런 분이셨었다.
"네.. 제 평가에 대해 고민을 들어주실 수 있나 해서요"
"응 그래, 시간 괜찮아."
나는 평가권자의 평소 나에 대한 코멘트를 Y수석님께 전달했다.
그는 나랑 둘이 있을 때에는 내가 일하는 것에 너무나도 만족하고, 고맙다고 이야기를 해 주는 반면에, 다른 동료들과 있을 때는 나보고 '일 좀 그만해라'라고 하고 다니곤 했었다.
게다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평가 면담도 없이, 그냥 이런 평가를 나에게 준 것이 내 입장에는 '그가 비겁하게 도망치는 느낌'을 받고 있다고도 솔직히 Y수석님께 이야기를 하였다.
이런 이야기가 가능할 수 있던 건 Y수석님은 현재 나의 평가권자와 과거부터 최근까지의 나에 대해 모두 잘 알고 계시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 이야기를 다 들으시곤, Y수석님은 간단하게 한마디를 뱉으셨다.
"주고 싶은데, 줄 카드가 없었나 보다."
분명 예상했던 답변이긴 한데, 신기하게 Y수석님께 그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빛담, 일을 할 때 서로 입장차이가 존재한단다."
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본인이 회사 다닐 때 나와 비슷했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었다.
Y수석님도 나처럼, 평가에 대한 불만을 품고, 고과권자를 찾아갔더라는 이야기. 결과는 안타깝지만 '운영 PM 업무를 하는 너'에게 좋은 평가를 줄 명분은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셨단 말씀. 하지만, 그 당시 고과권자는 결국 Y수석님 진급 시즌에 맞춰 최상위 고과를 주셨다고 하시며, 섣불리 그 당시 고과권자를 찾아가 평가에 대해 하소연했던 부분에 대해 미안함을 갖고 계시다고 하셨다.
"나는 그 당시, 운영 PM업무를 똑같이 했으면 했지, 진급 철이라고 더 열심히 한 적은 없단다."
"그렇군요..."
"내가 봤을 땐, 너의 평가권자는 너를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더 있는 거 같아. 빛담, 좀 더 때를 기다리면 어떨까?"
속으로는, 사람일 어떻게 될 줄 알고, 받을 수 있을 때 좋은 평가를 받아놔야 하지 않나요 라는 이야기가 나의 뇌를 타고 내 손가락에서 타이핑이 될 무렵, Y수석님은 마지막으로 내게 이런 조언을 해 주셨다.
"이제, 빛담 나이도 중견이야, 절대 어리지 않아. 이제는 회사생활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보다, 현재 맺고 있는 관계를 잘 유지해 나가는 것도 중요한 거 같아"
적을 만들지 않는 게 좋지 않겠냐는 Y수석님의 연륜과 경험에서 나온 피드백이었다.
나는, 나의 주니어 시절을 가장 잘 알고, 나에게 수많은 기회를 주며 나를 아끼셨던 Y수석님의 의견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네에, 수석님, 새겨듣겠습니다. 수석님의 말씀이 일리가 있는 거 같습니다."
"그래, 평가에 대해서는 슬쩍 나중에 '웃으면서' 이야기를 해봐."
나지막이 타이핑을 치고,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은 내 이성을 잠재우며 그렇게 채팅을 마무리했다.
"식사하러 가실까요?"
우리 팀은 평소 11시 30분 정도 되면 식사를 하러 내려간다. 팀 인원이 많기에, 선약 속이 있는 사람들 제외하고는 늘 약속이 없는 사람들이 주로 먹는데, 그중 나도 있고, 평가권자도 함께 있다.
"빛담, 독감은 좀 나았냐, 몸 관리 잘해"
"네 ㅎㅎ 그래도 연차 안 쓰고 버틴 거면 잘한 거 같습니다."
"으이그, 그래, 너 맨날 매년 쓰러져서 연차 두 개씩 버리더니, 올해는 잘 버텼네"
평가권자는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옛날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식사하러 엘리베이터로 내려갔다.
'피엠님, 저에 대한 평가가 어떻든, 도망치지 말아 주세요. 피드백 주실 거 있으면 주셔야 됩니다. 그래야 제가 발전을 하지요'
'그래 알았다'
평가에 대해, 나는 평가권자에게 예전부터 나에게 안 좋은 피드백이 있으면 직접 이야기를 해 달라고 누누이 부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알았다고 한 사람인데, 이번에도 이렇게 나에게서 도망친 저 사람이, 내 앞에서 밥을 먹는데 어쩜 저렇게 미워 보이던지... 그럼에도 나는 한마디 할 수 없었고, 평소처럼 식사를 할 수밖에 달리 방법은 없었다.
결국, 조직은 이렇게 망해간다. 필자처럼 일을 열심히 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어떠한 피드백 없이 그저 '부여'된 1년의 성적표로는, 이것이 내가 어떤 걸 잘 못해서 발생된 일인지 납득이 가지 않으면, 누가 열심히 일을 하려 하겠는가.
이 맘 때가 가장 그래서 필자는 힘들다. 스스로의 평가와 타인에게서 받은 평가가 엇갈릴 때, 무엇이 진짜인지를 잘 판단이 안 가서 그런 거 같다. 대부분의 자기 계발서에서는 남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말라는데, 아직도 많이 남은 회사생활을 함에 있어, 어떻게 남의 평가를 아예 배제하고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아직도 앞으로 어떻게 일에 대한 자세를 취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사실 계속 모를 거 같다.)
그저 '잡힌 고기' 취급받으며 남들에게 'xiexie' 해가며 속 없어 보이는 웃음이나 지으며 살아가야 할지, 무기력함과 당혹스러움이 동시에 밀려오는 시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