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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담 Nov 20. 2021

어서 와, 사회는 처음이지?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낭만은 돈이 있어야 완성된다."

 스무 살이 되었다. 대학생활의 낭만.. 은 꿈도 못 꾸었다. 그 당시 용돈 15만 원, 지하철 정액권 60번 왕복하면 약 10만 원의 금액이었고, 학식이 그 당시 2,000원에서 3,000원 사이였으니 정말 빠듯하게 살아왔던 기억이 난다. 집-학교-집-학교 만 해도 15만 원으로는 사실 택도 없었다. 그래서 중앙동서관에 가서 책도 많이 읽고, 돈이 없어서 맘에 맞는 선배들과 농구 후에 술을 얻어마시며 근근이 생활할 수 있었다. 캠퍼스의 낭만을 느끼려면, '돈' 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해 11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지금의 내무부 장관님을 만나서 가난하게나마 연애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연애를 하게 되면 돈이 아무래도 더 나간다. 영화도 봐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하고 그래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죽을 맛이었다. 그녀가 내 사정을 이해해 주어서 연애를 이어 나갔지, 소비에 과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스파게티 식사에 커피 한잔씩 먹는 사람이었어도 그 당시 나의 재력으로는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두 번째는 어머니께서 나에게 주는 용돈을 끊어버린 것이었다. "등록금 마련하기도 비싸, 좋지도 않은 대학이 뭐 그렇게 학비는 비싸니" 게다가 여자 친구도 생겼으니... 돈이 필요하기는 했다. 툴툴거리는 김 여사님 덕분에라도 결국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 나서야만 했다. 

어머니는 철인이시다.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도 자녀들을 모두 다 길러 내셨다.

"3,200원 Per Hour"

 집이랑 가깝던 번화가, 노원역을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위해 돌아다녔다.. '알바 구함'이라고 써져 있는 곳이면 한 번씩 들어가서 일할 수 있냐고 물어봤다. 그 당시에도 제한적이긴 하나 알바몬 같은 구인 사이트는 있었으나, 왠지 모르게 그냥 그런 것도 귀찮아서 직접 발품을 팔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아, 우리는 주말만 구하는 사람은 됐고, 풀타임을 원하는데..." 문제는 시간이었다. 주말 알바를 원하는 나와, 업체 간에 시간이 잘 맞지 않아 실패를 반복했다. (물론, 시간만 문제가 있지는 않았을 수도 있겠지)

 하릴없이 문 밖으로 나와 배회하던 중, 지하로 연결되는 일식집 통로에 '알바 구함'이라고 써져 있는 A4용지를 발견한 뒤 식당으로 들어갔다. 일식 위주의 음식과 술을 판매하는 주점이었다. "알바 구하신다고 해서 왔는데요. 주말 알바 가능합니다" "나이는 어떻게 되세요?" "스무 살입니다" 나를 스캔하는 매니저의 날카로운 눈빛이 느껴졌다. 지금도 외모는 자신 없지만 그 당시에는 더 없었던 거 같다. 이윽고 판정의 시간, "내일 가능해요? 금요일 밤" "네 가능합니다!" "시급은 3,200원, 숙련되면 200원씩 오릅니다" 이렇게 계약이 성사되었고, 여자 친구에게 전화해서 합격의 소식을 알렸다.


"첫 출근"

 그다음 날, 떨리는 마음으로 일식점 '코이'를 찾았다. 매니저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서 와, 아 이제 그냥 편하게 말 놓을게, 형이 29살 이거든" 그러면서 나의 맞선임을 소개해주었다. "A야 이리 와라, 새로 온 알바야, 잘 좀 알려주고" "어, 이야기 들었다. 나도 편하게 할게, 21살이고 A라고 해" 그렇게 상견례 자리가 끝나고, A는 와이셔츠와 앞치마를 어디선가 가져와 옷을 코에 갖다 대고 킁킁대더니 나에게 던졌다. "이거 갈아입고 와, 여기선 이거 입어야 돼, 일 마치고는 본인이 입은 건 본인이 빨아와서 저기다 걸어놓는 거야" 하며 암막이 쳐진 창고를 손으로 가리켰다. 나는 그곳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난방이 되지 않아 엄청 추웠던 그곳, 그곳에서 나는 '코이맨'으로 재탄생했다. A는 주방에 김 부장, 이 차장을 소개해주었다. "김 부장, 이 차장님, 신입 왔어요. 여기서는 주방장 부주방장을 부장 차장으로 불러"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그래, 편하게 삼촌들한테 모르는 거 물어봐 알았지?" 하시더니 껄껄 웃으시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A는 계속해 말을 이어나갔다. "너는 일단 설거지를 해야데, 솔직히 외모가 되진 않아서 홀에는 못 내보내겠고, 여기서 설거지하면서 차부장님들 음식 나오면 실수 없이 홀한테 전달하는 역할을 맡는 거야" 그러면서 식기건조기와 식기 닦는 법, 음쓰 처리 등등의 업무를 가르쳐 주었다. 

 의욕이 앞섰을까? 첫날부터 피를 보았다. 일식집이다 보니 백자 모양의 작은 잔을 술잔으로 쓰는데, 그게 깨졌는지 모르고 맨손으로 설거지를 하다가 비어서 손에서 크게 피가 난 것이었다. 매니저는 보더니 어서 일단 집에 가서 치료부터 하란다. 나는 혹여나 잘릴까 봐 매니저에게 내일 치료받고 다시 나오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매니저는 은근 대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래, 내일 보자"라고 이야기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을까? 싶지만, 도망가고 싶진 않았다. 설거지라 할 지라도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피를 흘리며 집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나는 너 안 올 줄 알았어"

 그다음 날, 손에 붕대를 감고 가서, 매니저에게 인사를 했다. A에게도 인사하고, 홀에 있는 반반한 형 누님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주방으로 갔다. "좀 괜찮냐? 할만해?" "네네, 할만합니다" 김 부장이었다. 나는 맨손이 아닌 고무장갑을 끼고 쉴 새 없이 설거지를 해 나갔다. 이를 지켜보던 A는 한가해진 시간을 틈타 "야, 1층에 쓰레기 버리러 가자"라고 나를 이끌고 갔다. 쓰레기를 버린 후, A는 담배 한 대를 피며 나에게 이야기했다. "보통 이런 일 주면, 힘들어서 그만둔다고 하루 만에 빤스 런 하는데, 게다가 피까지 크게 본 놈이, 나는 너 안 올 줄 알았거든" A가 놀라는 눈빛과 대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어깨를 툭툭 쳤다. "네, 괜찮습니다. 감당해야 할 일인걸요" 우리는 잠깐의 휴식시간을 마치고, 가게로 들어와 다시 일을 했다. 하루 종일 설거지만 해서 그런가 정말 허리가 끊어질 거 같았다. 새벽 4시, 마감시간이다. 매니저는 "수고했다. 잘했어" 라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렇게 나의 첫 동료들이 생긴 것이었다.


"새벽 4시, 저녁"

 그렇게 4주를 일하고, 첫 월급을 받았다. 흰 봉투를 들이밀며 매니저가 나에게 수고했다고 해주었다. 한국 정서상 받은 자리에서 돈을 열어보기 민망해서 퇴근 후 열어보니 20만 원 조금 넘는 금액이 찍혀있었다. 에누리 없이 정말 칼 같은 계산... 이 돈 벌려고 내가 허리 끊어져가며, 주부 습진 걸려가며 일을 했나 보다. 여자 친구에게 전화해서 "월급 받았어!, 내일은 스파게티 먹으러 가자"며 허세도 부려봤고, 새벽 퇴근길에 맥주 두 캔도 사서 집에 가 홀짝홀짝 마셨다. 이게 바로 직장인의 삶인가.

 3,200원의 시급. 지금 최저임금 대비 대략 1/3 수준이지만, 그렇게 받고도 좋았다. 몸은 힘들어도 예뻐해 주고 챙겨주는 형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름 회사라고 새벽 4시에 마감 치고 가끔 사장님이 오셔서 말씀하신다. "야 오늘 내가 저녁 쏜다. 가자" 새벽 4시 저녁이라니... 그래도 거절할 수없다. 사장님이 가자면 가야 하는 거다. 사장님은 항상 감자탕 집을 찾아가곤 했다. 비용도 적게 먹히고, 무엇보다 서로 찐한 국물 나눠먹으면서 동료애가 생긴다나... 생각해보면 그것도 좋았다. 지금처럼 내가 '회식 불편러'로 회사를 다니는 걸 생각해보면 180도 달랐다. 같이 누구보다 고생한 걸 아는 동료들이기에, 고된 하루를 마치고 입에 털어 넣는 소주 한 잔이 이렇게 달구나 라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렇게 술을 먹어도 체중이 늘지 않는 것도 신기했다. 지금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인데... 그렇게 6개월 간 코이에서 일하고, 아는 형을 따라 조금 쉬운 아르바이트로 이직을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은 아르바이트들 이였다.

 나의 대학 학창 시절은 학업과 아르바이트의 병행의 연속이었다. 그만큼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쉽지 않았지만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고 일을 해본 경험들이 결과적으로 나의 업무에 대한 자세를 긍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분명하다.

군에서 봉급을 받은 이후에야, 나의 소비활동이 개선될 수가 있었다.

"끊긴 유대감"

 2011년, 현재 다니는 회사에 입사를 했다. 입사 초기에는 정말 좋은 일들이 많았다. 일은 분명 고되고 힘들었지만, 휴게실에서 머리 부여잡고 있으면 선배들이 찾아와서 "뭐 안 되는 거 있어? 봐줄게" 하고는 내 모니터로 달려가서 같이 머리 부여잡고 고민해주던 기억이 눈에 선하다. 나도 질까 봐 선배들 늦게까지 남아 있으면 함께 남아서 도움이 되는 뭐라도 해 드리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밤 1시 2시에 일과가 끝나도, 그 이후 간단한 반주 한잔에 서로가 고맙고 소중하다고 말해주던 그때가 기억이 난다.

 시간은 유수와 같이 빠르게 흘렀다. 요 근래에는 연락하는 선 후배가 없다. 뭐랄까, 연락을 해서 밥이라도 먹자고 하려면 그 사람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는 느낌이 든다. 업무적으로 끈끈함도 크게 없다. 그저 각자의 일을 하고, 시간이 되면 각자 집으로 돌아갈 뿐이다. 회식을 할 때면 이야기할 것들도 크게 없다. "날씨는 어때요?" "주식하신다면서요?" 정도이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이야기도 겉돌 뿐이다. 

 왜일까? 버는 돈은 2004년에 비해 비약적으로 늘어났는데,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그 반대가 되었다. 일하다 보면 동료들 서로가 도와주려는 모습들 보다, "그거 어디 어디에서 찾아보세요"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고, 그마저도 이 정도면 양반에 속한다. 동료에 대해 관심을 주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원인을 유추해 보면, 서로가 같은 어려움을 겪고, 동지 같은 느낌을 받는 경우가 줄어들어서 그런 거 같다. 나날이 올라가는 인건비에, '갑'은 가성 비적 메리트를 느끼지 못해 재 계약을 안 해주는 경우가 생겨났고, 이를 통해 조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다른 부서로 적을 옮겼고, 점차 1개의 일을 N명이 일하던 시대에서, 1명이 N개의 일을 하는 시대로 변화해 온 것 같다. 효율성을 최고 덕목으로 평가하기 시작하며, 사람은 줄고 일은 많아졌다. 그러면서 동료에 대한 유대감이 쉽게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좋든 싫든 엮여야 하는데, 엮일 일이 사실 없어진 탓이 크다.

저런데 입사하면 인생이 바뀌는 줄 알았다. 사실 그다지 바뀌는 건 없다.

"그땐 그랬지"

 스무 살,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몸은 고달프지만 마음만은 편했다. 회사 내에서 1년에 두 번 자본주의를 빙자(?)한 평가를 당할 필요도 없었고, 동료들과 새벽에 술을 먹어도 전혀 불편함이 없이 편했다. 때로는 실수해서 혼이날때도 기분이 나쁘지 만은 않았다. 대기업이고 중소기업이든, 사회생활, 즉 주 5일 풀타임 근무를 하게 되면, 여러모로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아진다. 일만 잘한다고 잘하는 것도 아니고, 관계만 좋다고 잘하는 것도 아니다. 변수가 너무 많아지다 보니 머릿속이 복잡해지게 된다. 그러면서 그 옛날, 스무 살 때 코이에서의 힘들었던 알바 경험을 생각하게 되는 건 아닌가 싶다.

 이번 주 목요일, 드디어 수학능력시험이 끝났다. 어떤 사람들은 재수를 선택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대학 진학을, 어떤 사람들은 취업을 선택할 것이다. (어떤 분들은 휴식을 택할 수도 있다.) 무슨 선택을 하던, 각자 놓인 환경하에서 조금이나마 버텨 나가기를 기원한다. 그러한 노력은 켜켜이 쌓여, 당신에게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진또배기 경험'으로 승화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연꽃은 진흙탕에 머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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