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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담 Dec 27. 2021

이사

하기는 싫은데, 해야 하는 것

"조직개편의 결과로, 우리는 다른 층으로 이사를 가야 합니다."

팀 리더의 말씀이셨다. 우리 조직은 그간 함께하던 팀장님 곁을 떠나, 다른 팀장님에게 '배속' 되어 버렸다.

(https://brunch.co.kr/@c9d642ac94b141d/59)

 나는 곧바로 이사 갈 때 필요한 방화벽 정보를 이번 기회에 모두 현행화를 해 두었다. 아울러 백신 휴가로 자리에 없는 A 책임의 방화벽도 함께 올리고자 카톡을 보냈다.


"A 책임, PC비번 좀 알려줘요, MAC 주소 확인해야 하니까"

"아, 그게, 한글로 A책임00!@ 해보시겠어요?"

"음... 틀렸다는데?"

"아, A책임01!@로 해보세요"

"어어 로그인됩니다. 필요하면 또 연락할게요"

 

 어렵게 A 책임의 MAC Address까지 파악한 후, IP를 신규로 발급받아 방화벽 및 예외 사이트 차단과 관련된 일괄 결재를 올려서 재가를 받았다. 사실 이게 가장 귀찮은 일이다. 수명 업무라는 게, '잘되면 본전, 안되면 마이너스'라 다들 하기 꺼려한다. 그래도 나는 내가 팀원들까지 챙겨서 함께 결재를 올린다. 나로 인해 다른 동료가 조금이라도 다른 걸 할 수 있으면 그걸로 좋기 때문이다. 덕분에, 앞으로 신규인력이 우리 프로젝트에 왔을 때 당황하지 않고 방화벽을 한 번에 신청할 수 있게 업무 정리가 잘 된 거 같아 뿌듯했다.

 "좋아, 방화벽은 완료되었고"


 그러고는 공용 캐비닛을 포장해야 한다. 다행히 다른 층의 이사도, 포장 업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가이드라인이 내려왔다. 누구나가 공감하겠지만, 보통 본인의 짐은 본인이 잘 싼다. 하지만 회색 영역에 있는 공통 관리 영역이 있다. 바로 공용 케비넷 물품. 캐비닛을 죄다 열어보는데 한숨이 나왔다. 누구 하나 관리하지 않고 그저 자기네들이 필요할 때만 와서 집어가는 그런 곳이다.


"B선임, C수석님, 공용 캐비닛 싸는 거 좀 도와줘요"

 알아서 해주기를 기대하면 안 된다. 직접 이름과 호칭을 지정해야 겨우 도와준다. 이렇게라도 도와주는 경우는 양반이다. 보통은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는 직원도 많다. 한 겨울에, 사무실의 온도는 생각보다 더웠고, 세수하고 싶을 정도로 난 땀을 닦느라 혼났다. 그래도 겨우 공용 케비넷 짐을 포장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개인 짐을 싸는 일이다. 보통의 사무실 이사 순서는, 업무와 상관없는 수첩(사실 수첩 잘 안 쓴다.), 책(책도 잘 안 본다. 장식용), 그리고 기타 물품을 박스 아래로 깐다. 이제, 이 박스 안에 들어오지 못한 녀석들은 아쉽게도 안녕이다. 이런 기회에 내가 가진 짐을 경량화시키고, 지금 시점의 꼭 필요한 짐들로만 꾸려지게 되는 것이다.


 이삿날은 하필 크리스마스이브여서, 많은 직원들이 최소 업무시간만 하고 퇴근하려고 대기 중에 있었다. 나 또한 그날은 고양이 '이브'가 집에 오는 날이라 일찍 가려하고 있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지고, 남은 박스에 키보드, 마우스(패드 포함), 노트북 등을 넣고 박스테이프를 봉인했다. 미리 출력한 이사 갈 사무실 주소도 야무지게 붙였다. 마지막으로 모니터에 뾱뾱이를 붙이고, 주소도 태깅하면 끝! 이제는 일을 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집에 가야만 하는 것이다.


 여태껏 회사생활을 하며 꽤 많이 이사를 다녔다. 그중, 내 짐이 다른 곳에 가 있던 적이 한번 있었는데, 여간 찾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18층으로 주소를 태깅해놨는데, 15층에서 발견된다거나... 그래도 안 잃어버린 게 어딘가 싶다.


 오늘은 이사 후 첫 출근이었다. 그럼 그렇지, 엘리베이터에서도 18층을 눌렀다가 아차 하고 17층을 눌렀다. 습관은 이리 무서운 것이다. 다행히 분실물은 없었다. 기분 좋게 이삿짐을 언박싱 하고, 새로 발급받은 IP로 환경 세팅 후, 주요 사이트들 접속을 테스트해 보는 것으로 일과가 시작되었다.


 내가 배정받은 자리는 하필이면 '휴게실'앞이다. 귀를 쫑긋 하면 모든 사우들의 뒷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는 곳, 시끄럽고 소란스러워도 역시 시간이 지나면 잘 적응해 갈 것이다.

 앞으로, 어느 기간 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있는 동안 잘 부탁한다. 새로운 의자님, 새로운 책상님, 새로운 케비넷님.


나좀 잘되보자..비나이다 비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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