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발마하다 도끼자루 썩어나고
원만한 합의를 바랍니다
회사의 결과물에는 지독한 정치적인 견해 내지는 싸움이 총망라되어 있다. 보고서, 보도 자료, 광고 시안, 디자인 시안, 각종 콘텐츠는 파워 게임의 산물이자 의사 결정의 결정체이다. 방향을 설정하는 기획자, 크리에이티브 한 제작물을 만드는 제작자, 프로덕트 매니저, 브랜드 매니저 외 사소한 연관을 두고라도 많은 사람이 얽히고설켜 있다.
이렇게 관여하는 데는 나중에 책임지기 싫어서 미리 수를 쓰거나, 잘 됐을 때 공을 얻고 싶은 경우가 많다. 프로젝트가 기업의 중책 사업이거나 성공 확률이 높을수록 성과를 인정받기 쉽기 때문에 입김은 세지고, 밥 숟가락 수는 많아진다.
배는 산으로 가고 만다. 노 젓는 사공은 여간 난감한 것이 아니다. 2시 방향으로 저으시오라고 해서 하고 있으면 다른 이가 와서 10시 방향으로 바꾸시오 역정을 낸다. 그럼 또다시 2시 방향을 주장하는 이가 와서 책망한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김부장이라는 자가 2시는 북동풍의 영향으로 아니 된다고 하옵니다. 이에 10시 방향으로 노 젓고자 하오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서로의 변을 전하며 읍소해 본다. 간신히 10시로 합의 보고 나아가면 이번엔 제3자가 끼어든다. 6시 방향이 어떠냐며 당장 뱃머리를 들라 한다. 10시와 2시를 주장한 이에게 각각 가서 다시 윤상무라는 작자가 6시 방향이 맞다고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나이까 토로한다.
A의 말을 B에게, B의 말을 A와 C에게 다시 C의 말을 A와 B에게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쳇바퀴처럼 전달한다. 본연의 업무인 노 저어 목적지로 가는 것과 말을 전하러 다니는 것이 주객전도 된다. 업무를 오더 한 이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여쭙고 협의를 이끌어 내는 데 시간과 에너지가 더 많이 든다. 이 말, 저 말을 전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일일이 설득하다 보면 노 저을 힘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회의만 든다.
회사원이 아니라 조선 시대 파발꾼 신세가 따로 없다. 파발꾼은 나라의 중요한 문서를 전하던 사람이었다. 조정의 명령을 지방에 전달할 때 말을 타거나 걸어가서 '어명이요'를 외치면, 누구나 머리를 조아리고 명을 받들었다. 목적지에 당도하기까지 고충은 있었지만 반발 거부하려는 자들의 의견을 역으로 전하거나 합의를 이끌어 낼 필요는 없었다. 파발은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이고 파발꾼은 전달만 하면 되는 단순 업무를 수행했다.
지금은 전화, 메신저, 메일, 즘 회의까지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널려 있어 꼭 사람이 가서 구두로 전할 필요가 없다. 손가락만 까딱하면 의견을 몇 초 안에 타진해서 즉각 공유가 가능하다. 그럼에도 회사의 어르신은 비공식 파발꾼을 통해 의사를 전달하고 피드백을 받고자 하신다.
수시로 바뀌는 방향을 전달받고, 끝나지 않는 노 젓기를 하고 달라진 경로와 목적지를 전달하고 해명하고 설득하다 보면 늘, 어김없이, 간절하게 생각나는 분은 전설의 최부장 언니이다. 언니는 부서장으로서 방향, 콘셉트가 정해지지 않아 일의 진도가 안 나가면 온갖 부서의 말단 직원에서 임원까지 한 자리에 집합시켰다.
"대신들은 들으시오. 국정 논의를 위해 지금 당장 모이세요. 중대사를 위해 중지를 모읍시다." 선포하고 현안이 이러저러 하니 의견을 내시오. 의견이 요래 저래 하니 이렇게 결정합시다. 이의가 있으시면 지금 말을 하셔라, 없으면 이렇게 결정해서 진행하겠다. 도장 쾅쾅쾅! 거침없이 원스탑 논스톱으로 결론을 내주셨다. 그야말로 인간 사이다였다. 1 부서마다 1 최언니의 보급이 필요했다.
교통 체증이 극심한 사거리의 교통정리 경찰처럼 언니는 정의롭고 정확하고 단호했다. 한 자리에서 모두가 동의한 사안이었기에 관련 담당자들과 유관 부서는 정해진 대로 프로젝트에 적용했고,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나를 따르라 외치는 장군님처럼 회의실에서 언니는 가장 빛났고 카리스마가 넘쳤다. 사람들이 의견을 내지 않고 쭈뼛거리면 아이디어를 쏟아냈고, 생각이 중구난방이면 의견을 하나로 이끌어 냈다. 회의 결과에 대해서는 일사불란하게 공유해서 실무자가 즉각 적용하도록 했다.
정체가 심한 퇴근길 같던 막힌 업무를 한 방에 뻥 뚫어서 속도 시원하게 해 주셨다. 유관 부서의 높으신 분이 급작스럽게 지시한 합당하지 않은 업무는 언니가 그분께 직접 말씀드려서, 업무 내용을 조율하든지 데드라인이라도 미뤄서 시간이라도 벌어 주셨다. 파발마 하느라 몸 고생, 마음 고생할 필요 없이, 언니가 목적지를 설정한 지도를 따라 노만 잘 저으면 되니 효율적이고 능률도 오르면서 일하는 재미까지 붙었다.
언니가 퇴사한 뒤, 언니처럼 의사 결정을 한방에 시원하게 쫑 내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요리 빼고 저리 빼고 탁구공 핑퐁하듯 떠 넘기기 바빴다. 파발마 하면서 새우 등이 터지는 건 언제나 실무자였다. 의견을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서로에게 공유하지 않아서 혼선이 생기고, 파발꾼이 동동거리는 사이에 배는 강에 가라앉을 위기를 맞는다.
A, B, C, D, E가 한 자리에 모여 결론을 사공에게 전했다면 배는 산으로 가지 않고 쉽고 빠르게 강을 건넜을 것이다. 나는 업무에 있어서 날이 잘 서 있는 예리한 칼이고 싶다. 칼을 이렇게 갈아라, 저렇게 갈아라 훈수 듣느라 진을 다 빼기보다는 일정하고 묵묵하게 갈고 또 가는데 집중해서 쓰임새를 다 하고 싶다. 파발마 하느라 썩어 난 도끼자루를 보면서 한탄할 일은 없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