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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라온 Feb 25. 2024

휴양림에서 자고 싶어요

어머님은 호텔이 좋다고 하셨어

지난 제주 여행에서 숙소를 나서며 아이들이 말했다.

"엄마, 다음엔 수영장 있는 호텔로 가요. 이런 휴양림 말고요"

내 속도 모르는 속 없는 것들. 애미라고 호텔 수영장에 너희를 넣고 썬베드에서 모히또 마시는 로망이 없는 줄 아니. 나라고 산골짝 허허벌판의 휴양림이 좋기만 하겠냐고, 삼박사일 동안 숲 놀이터며 삼나무 숲이며 종횡무진 뛰어놀고, 목공 체험에 리어카 타기에 노루, 고라니를 눈앞에서 발견하고, 밤하늘의 무수한 별을 보고 좋아할 땐 언제고 배은망덕하도다. 제주 올 때마다 휴양림을 거의 빼놓지 않았으니 일단 수긍하고 얼버무렸다.



남편은 한 여름 극성수기에만 휴가를 냈다. 뜨거운 날씨도 힘들지만, 진짜 고충은 2~3배 올라간 물가다. 덥기도 더운데 돈도 더 내라니 여간 억울하지 않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삐질하고 불쾌지수가 오르는 걸 생각하면 오히려 깎아 줘야 할 것 같다. 방학에, 휴가에 관광객이 몰리고 물놀이하기 좋은 계절이라 비싸다는 게 정설이다. 헌법에 나온 것도 아닌데 항공사, 여행사, 숙박 업소에서 딱 집어 기간을 정해 놓고 요금을 올려 받는다. 그 시기가 매년 우리 집 휴가와 맞물리니 고민이 깊어 간다.


평소에 5, 6만 원이던 숙소가 8월에는 20만 원까지 몸값을 자랑한다. 예약 인기순으로 정렬해서 첫 번째 숙소를 시원하게 결제하고 싶지만, 현실은 최저가순에서 찾기 바쁘다. 그래 숙박은 가성비로 가는 거야. 앞자리가 다른 바닷가 앞 숙소 빼고, 호텔 스위트룸 열외고, 독채는 꿈도 못 꾸고, 풀빌라도 제쳐 놓는다. 결국 좁다란 스탠다드 호텔방, 오~래된 쓰러지기 직전의 숙소, 차 타고 한참 들어가야 나오는 외딴 숙소만 남는다. 애들도 커서 원룸은 답답하고, 후진 데는 여행 기분이 안 난다. 주방과 거실이 없으면 불편하니 예선 통과한 곳이 몇 곳 없다.


그래서 이 엄마의 묘안이 뭐냐 하면 '휴양림'이다. 나라에서 운영하니 믿을 수 있고 가격도 착하다. 호텔 원룸 가격으로 거실에 주방까지 딸린 독채를 구할 수 있다. 어차피 제주는 자연 보러 가는데 휴양림에서 자는 게 근사하다며 희망 회로도 돌린다. 게다가 내가 낸 세금도 뽑을 수 있다며 회심의 미소까지 짓는다. 숙박비가 꼭대기인 이 시기에 휴양림에서 솟아날 구멍을 찾아 제주 올 때마다 부지런히 이용해 주었다.


휴양림은 가성비와 자연, 힐링을 내주는 대신에 불편을 감수하라 한다. 자연보호를 위해 차는 숙소까지 가져갈 수 없고 입구에 내려 짐을 들고 걸어야 한다. 구불구불 컴컴한 숲으로, 오솔길로 리어카에 짐을 잔뜩 싣고 끌고 간다. 이용 후에는 모든 쓰레기는 다시 입구로 고스란히 들고 나와야 한다. 차 안에 짐이나 아이 인형이라도 놓고 오는 날에는 왕복 30 분을 막막하게 오가야 한다. 깜깜한 늦은 밤이나 비라도 오는 날이면 양손도 무거운데 애들까지 챙겨가며 걸어가는 길이 여간 수고스럽지 않다. 이때 공복이거나 여행 피로 게이지가 가득이라면 부부 싸움이나 아이들의 다툼도 곁들여진다. 오롯이 자연만 가득하고 부대시설이 없어서 자연과 한 몸이 되어할 일 없이 쉬거나, 액티비티를 즐기려면 차를 타고 한참 나가야 했다. 화재 예방을 위해 바비큐도 절대 금지 사항이다.


한라산에 오르기 위해 떠나는 지금은 2월이다. 얼마만의 비성수기 여행인가. 선심 쓰듯 수영장과 부대시설 빵빵한 호텔로 잡겠다고 큰 소리부터 쳤다. 분명 가고 싶댔는데, 좋아할 줄 알았는데 반응이 이상하다.

"저번에 나무 연필꽂이 만들었고, 이번에 독서대 만들 거야. 거기 가자."

"엄마, 노루 나왔던데 거기서 자는 거지? 노루 보고 싶어."

응? 휴양림 이제 싫다며. 비수기라서 리조트 가도 되는데, 큰맘 먹고 좋은 데 갈 건데 너네 왜 그래? 몇 번을 물어도, 아무리 좋은 숙소를 보여줘도 흔들림이 없다. 성수기 휴양림은 땡잡은 느낌으로 기쁘게 결제했는데, 비수기 휴양림은 호텔, 펜션이나 가격 차이가 없어 손해 보는 느낌으로 마지못해 예약했다.


제주 시내에서 사십 여분을 산으로 달려가 도착했다. 아이들이 익숙한 듯 리어카부터 챙긴다. 남편이 착착 짐을 싣고 그 위에 상기된 아이들이 올라탄다. 숲이 성벽처럼 좌우로 펼쳐진 그곳에 수레를 끌고 들어 간다. 이왕 온 거 뽕을 빼겠다며 아침, 저녁으로 오름 산책이며, 숲 놀이터며 걷고 뛰고 누빈다. 둘째는 목공체험소에서 독서대를 완성해 냈다. 남편과 큰 아이는 한라산이 바로 옆이라 등반할 때 오가기 좋았다. 밤이 되면 어느 행성에 뚝 떨어진 것처럼 칠흑 같은 어둠 속 고요가 느껴졌지만, 쏟아 내리는 별 보는 건 여전히 좋았다.




마지막 날 밤, 마지막 미션을 위해 우리의 마당이자 숲으로 산책을 나섰다. 큰 아이의 바람은 이루어질 것인가. 나무인지 돌인지 분간도 안 되는 어둠 속에서 아이가 나직하게 탄성을 지른다. 엄마, 저기 저기! 저 멀리 새끼 노루가 풀을 뜯으며 산책하고 있다. 휴대폰 불빛도 켜지 말고 발소리도 내지 말라고, 노루가 놀라서 달아나면 안 된다고 아이들이 쉿 하고 주의를 준다. 제법 가까이에서 노루를 살핀다. 얘들아, 왜 이제 왔어, 여기서 기다렸잖아. 만나서 반가워 말하듯이 녀석은 그렇게 나타나 주었다. 호텔에는 없는 너희 친구를 만나려고 우리는 이곳에 온 거였구나. 친구야, 사실은 나도 반가웠어. 다음에 우리 또 보자. 그때가 비수기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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