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스치는 바람에

조용히 그댈 그리워하네

by 하라온

J 너와 첫 만남은 피아노 학원에서였어. 30년도 더 지난 얘기를 간신히 기억해냈다. 왜냐하면 피아노 학원에서 너랑 피아노를 뚱땅거렸다던지, 발표회를 했다든지, 벌을 섰다든지 그런 에피소드는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거든. 아무튼 너랑 나는 같은 학교, 같은 동네였고 그 길로 단짝 친구가 됐어. 12년을 통틀어 같은 반은 고 2 때 단 한 번이었지만, 우린 쭉 친했지. 국민학교, 고등학교는 등, 하교를 같이 했고, 중학교 때도 3분 거리에 살면서 부르면 나오는 사이였거든. 여자친구들이 그렇듯 팔짱 끼고, 화장실 기다려 주고, 쇼핑같이 하고, 시시콜콜 수다 떠는 사이 말이야.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친해졌을까 궁금해. 카톡도 인스타도 없던 그 옛날에 말야. 우린 달라도 너무 달랐거든. 외모면 보면 거꾸리와 장다리. 넌 하얗고 길고 마르고 갈색 머리에 얌전해. 난 보통 피부에 짧고 통통하고 검정 머리에 발랄했지. 네 스타일은 무채색에 중성적이고 단정했고, 네일은 까망이 잘 어울렸어. 하얗고 가느다란 열 손가락에 블랙 매니큐어는 지금도 임팩트가 장난없다. 그마저도 잘 어울렸으니 패셔니스타 맞네. 아, 버스 손잡이만한 은색 링 귀걸이도 있다. 나는 뭐 스타일이라고 부를 건덕지도 없었지만 암튼 총천연색에 화려하고 촌스럽고 네일은 할 필요도 못 느꼈지. 귀걸이는 단정한 큐빅 하나 할까말까 했고. 친구 중에 젤 길고 쉬크하고 엣지있고 분위기 있고 조용한 애가 너였나봐. 얌전하고 모범생이었지만 스타일 주장은 확실했던 차도녀 나의 워너비 J.


좋아하는 거라도 같았냐고? 아니. 외모만 봐도 알잖아. 너만의 호불호가 확고한 아이였어. 좋아하는 거에 대한 취향이 뚜렸했지. 무채색, 미니멀리즘, 심플, 보이쉬, 나쁜 남자까지. 금사빠로 시작해서 오타쿠로 가기도 했어. 좋은 건 좋고, 싫은 건 싫고 중간은 없었나 보다. 착한 애가 그런 거는 타협은 없이 단호했어. 그런 널 보는 자체가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것 같아. 네가 좋아하는 걸 얘기할 때면, 눈빛은 반짝거렸고 몽상가 소녀같기도 했어. 뚜렷한 취향도 없는 나랑은 말도 잘 안 통했을텐데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무슨 옷을 좋아하는지, 어디 샵에 가서 뭘 사고 싶은지, 집을 어떻게 꾸미고 싶은지 그런 얘기를 좋아했지.


아, 난 너 따라쟁이였나봐. 초등학교 때 우리 엽서 모으던 거 기억난다. 네 취미였잖아. 나도 사기 시작했지. 그 시골 바닥의 문구점, 팬시점은 다 돌았나봐. 시간 날 때마다 엽서 구경하러 시내가는 게 즐거웠다. 온갖 풍경이며, 명화, 일러스트, 인물까지 엽서 한 장에 다 있었어. 평범한 건 50원, 더 이쁜 건 100원. 지금으로 치면 그게 인스타고 인터넷이었던 거 같아. 시골 소녀들의 바깥 세상을 구경하는 렌즈, 우리들의 로망 같은 거. 그러다 생일 날, 크리스마스에는 정말 아끼는 엽서 한장 골라서 편지도 주고 받고 그랬잖아. 그 엽서를 얼마나 고심해서 샀는지, 네게 얼마나 소중한 지 그런 걸 아니까 편지가 더 특별했어. 지나고 보니 다 이쁜 쓰레기였지만 그 땐 그게 보물단지였지. 애들이 포켓몬 카드를 사달라고 조를 때, 이걸 기억했다면 좀 더 관대하게 지갑을 열었을 거야.


엽서 취미는 십대가 되면서 여성복 카탈로그 모으기로 바뀌었어. 넌 그 때부터 옷을 많이 좋아했다. 열 몇 살짜리가 웬 여성복이냐고. 심은하, 신은경, 최진실 그런 언니들의 화보가 정말 멋졌거든. 게다가 부끄러움만 참으면 무료잖아. 지금으로 치면 연예인들 포토 카드 그런 거지. 그걸로 새 학기마다 교과서 표지를 열심히 싸고, 아세테이트지로 한번 더 감쌌어. 연예인 언니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대단한 정성이었지. 마르고 닳도록 공부할 것도 아니면서 말이야. 카탈로그가 갖고 싶지만, 차마 말은 못한다는 너 땜에 얼굴에 철판은 내가 깔았어. '카탈로그 하나만 주세요' 거절 당할까 얼마나 심장을 졸였는지 다 옛날 얘기다. 그러다 흔쾌히 한 부씩 받아내면 그 이쁜 언니, 고급 옷들이 다 내 것만 같았지.


넌 우혁이 오빠, 성재 오빠, 교회 오빠를 좋아했고, 네 가슴앓이하는 얘기를 많이 들어 줬나봐. 지금 보니 이상형들이 키 크고 댄디한 스타일이구나. 그런 남자 옆에 네가 있으면 꽤나 그림이 좋았겠다. 에쵸티 장우혁 오빠랑 결혼한다고 했는데 너땜에 오빠가 아직 싱글이다. 성재 오빠가 일찍 떠났을 때 네가 얼마나 슬퍼했던지 여고생에겐 가혹했어. 말 수도 없이 조용한 애가 짝사랑은 쉬지 않았는데, 고백 한 번 제대로 못했다는 게 에라야. 넌 숯기도 없고 소심하고 E였거든. 사랑에는 대범하게 빠지지만, 표현은 못하니 얼마나 애가 탔겠어. 난 금사빠가 아니라서 이해는 잘 안 됐지만, 네 맘 아프게 하는 그 놈 새끼들은 미웠다.


소녀 소녀해서 너 좋다는 남자도 많았는데, 넌 쳐다도 안 봤지. 이상하게 너 좋다는 사람보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했어. 강직한 뇬, 난 뇬, 상녀자라 맘 고생 말도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순 나쁜 남자들인데 나도 남자 보는 눈이 없어서 단호하게 말도 못했네. 삐삐에 뭐라도 남겨놔라, 집 전화를 걸어볼까, 오빠네 집 앞에서 기다렸다 쪽지라도 줘보자 그런 연애 참견을 많이 했었어. 지도 모쏠이면서 웃기지. 네 맘을 몰라주는 그 놈들을 침 튀기면 엄청 욕해줬던 거 같아. 지금 같으면 만나서 담판 한 번 지어봤을텐데, 그 자식들한테 복수라도 해줬을텐데 좀 아쉽다 그치. 지금 다 대머리 까지고 배 나오고 마누라한테 구박이나 받으며 살 거야. 잘 안 되길 잘 했어. 그래 그래.


둘 다 서울에서 취업은 했지만 서울살이가 팍팍해서 주말마다 서러움을 나눴다. 모쏠 쑥맥들은 소주잔이나 터는 거 밖에 할 일이 없었나봐. 그 얌전한 애가 술만 마시면 분위기 타서, 금새 취해가지고 평소랑 딴 애가 돼. 텐션이 지하 10층에서 월드타워까지 올라 갔거든. 지지배는 매번 취해서 그 수습도 또 내 전담이었잖아. 한 번은 술자리에서 네 교정기를 휴지에 싸놨다가, 흥이 올라서 2차 가자고 나와 버렸어. 신사동 그 집 기억하지? 여기 저기 물색하다가 취중에 기억이 난 거야. 코 묻은 월급으로 산 비싼 건데 큰 일 난 거지. 돌아 갔더니 이미 다 버렸대. 아쉬우면 저기 한 번 보래. 업소용 쓰봉있지, 사장님이 그거 가리키더라. 술 취해가지고 그 쓰봉만 몇 개를 뒤져서 찾아냈어. 취해서 그것도 신난다고 헤헤거리던 거 생각난다. 못 산다 못 살아.


너 있는 데 버스표 끊고 누우니까 필름처럼 다 지나간다. 하나 하나 떠올렸다간 밤새겠지. 오랜만에 만나는데 얼굴 부으면 안 되는데. 앱으로 띡띡 14000원짜리 1시간 40분짜리 버스 표면 만나는 거였더라. 이렇게 쉬운 건데, 할 말이 많은데 왜 안 만나고, 못 만나고 산 걸까. 맨날 붙어 다녔었는데 말이야. 우리 이랬던 거 너도 다 기억난다고 해 줘서 좋았어. 얼마나 웃었는지 잠시나마 소녀들 같았다. 그 때 자기를 많이 이해해줘서 고마웠다고도 했지. 나의 십대, 이십대, 그리고 지금까지 옆에 있어줘서, 그걸 같이 추억해줘서 나도 고마웠다 친구야. K의 얘기처럼 언젠가 네가 다시 자유주의자로 사는 날이 올거야. J야, 어느 날 까만 손톱에 링 귀걸이 하고 찢어진 청바지 입고 우혁 오빠 보러 가자고 하면 바로 따라 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