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형 글쟁이의 화해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by 하라온

'커리어가 아깝지 않니?

안 쓰는 사람이 젤 답답해.'


글 좀 쓰라고 친구가 옆구리를 찌른다. 그것도 주기적으로 여러 번. 왜 포기를 모르는 건데. 성의는 고마운데 용기가 안 난 달까. 먹고 사는데 찌들어 여유가 없달까. 온갖 핑계로 방어 중이다. 심드렁한 반응을 보여도 개의치 않다니. 믿어도 너무 믿는 거 아니야? 네 발등 어쩌려고 그래. 어딜 봐서 내가 쓰게 생겼단 거야. 근거 없이 잘할 거라 용기를 뿜뿜 주다니. 소꿉 친구가 좋긴 좋다. 기분 좋은 과대 평가였다. 기대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최면처럼 '야, 나도 할 수 있어', '잘 할 수 있잖아' 몽글몽글했다. 하지만 생각뿐이고, 액션이 문제였다. 쉽사리 연필이 쥐어지지 않았다. 친구 만날 때마다 편집자처럼 글 독촉은 이어졌고, 마음이 무거웠다.


보다 못한 친구가 링크 하나를 보내왔다. '슬기로운 초등생활 브런치 프로젝트' 신청 페이지. 단톡방에 무심하게 투척했지만 '너 꼭 신청해, 알겠지?' 음성이 지원된다. 이은경쌤과 함께 하는 글 쓰기 프로젝트고, 지금 신청 기간이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눈 질끈 감고 페이지버린 걸 들킨 것만 같다. 이래서 오래된 친구가 무섭다. 추천한다는데 하긴 해야겠고, 하자니 두렵고, 귀찮고, 어렵고. 매일 마감 됐으려나 열어 보고 닫고, 고백이 마려운 강아지처럼 서성였다. 마지막 날까지도 '조기 마감'의 요행은 없었다. 이제는 마침내 승복이다.


친구가 글쓰기를 강추한 건 내가 '생계형 글쟁이'여서다. 카피라이터로 시작해서, 콘텐츠 제작자로 먹고 살다 보니 글을 놓지 않고 산 건 맞다. 친구 입장에서 글로 밥벌이도 하는데, 니 글쯤이야라고 생각했으리라. 생계형 글쟁이의 속 사정도 모른 채. 남의 얘기는 쉽고, 생명도 입도 없는 제품들이야 말해 뭐하겠나. 이 아이들의 탄생 스토리며, 매력 포인트를 조물주처럼 전하리라는 사명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고 그럴 듯하게 포장을 해댔다. 있어 보이는 컨셉트에 맞춰 팩트를 내세우고, 미사여구로 제품을 메이크 오버했다. 컨펌의 컨펌의 컨펌을 받으면서, 수정의 수정의 수정을 거쳐 모두의 글로 종지부를 짓는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글은 월급을 받는 일, 직장 상사들을 만족시키는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글, 카피, 스크립트는 쓰지만 누가 점을 찍으라 하면 찍고, 빼라 하면 빼야 하는 회사원 신세다. 신물이 난 글이라는 녀석과 무감각하고 무신경하게 거리두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냉전 중인 부부 사이였다. 각자의 도리는 다 하고 남이 보기에 문제 없지만, 특별한 정은 없는 사이. 이제 와서 내 이야기, 내 글을 쓰자니 다정한 척 쇼윈도 부부가 되어야 하는데, 그 어색함과 뻘쭘함을 견디기 힘들었다. 이은경쌤은 부부 클리닉의 신구 선생님처럼 '1주 후에 뵙겠습니다'하고 매주 글쓰기 숙제를 내주셨다.


오글거림을 참아야 했던 자기 소개서. 미간 주름을 패이게 한 글의 목차 정하기를 지나 드디어 글 한 편 쓰기가 떨어졌다. 일할 땐 타이핑이 술술술 되더니, 내 글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꽉 막힌 고속도로 자체였다. 일주일을 끙끙대도 별 수가 보이지 않았다. 글로 밥 먹고 산 거 맞니 자책 타임이다. 이 글과 저 글이 다르고, 남의 글은 쉽고 내 글은 어려우니 도리가 없다. 150명의 동기들은 척척 써 내려 가며, 브런치 합격 소식을 전했다. 마감 시간 1분 전에 간신히 제출했지만 개운하지가 않았다. 다시 1주일의 숙려 기간을 받아서 고치고, 갈아 엎고, 결국엔 새로 써서 브런치 작가 타이틀을 따냈다. 방구석 작가, 이게 뭐라고 심장이 나댄다.


그 동안 남의 이야기꾼으로 글에게 민낯을 이리저리 숨기느라 애써 왔다. 나의 이야기를 쓴다는 건 베스트 프렌드랑 목욕탕에 처음 간 날처럼 민망하고 화끈거리는 일이었다. 날 위한 한 줄도 못 썼던 건, 자신을 마주하고 글로 담담하게 풀어낼 용기가 부족해서였다. 그리고 게을렀다. 브런치 첫 글 발행을 한 지금, 화해의 악수를 먼저 건넨 것처럼 후련하다. 한 편을 완성하니 게 그럴 듯하고, 자신이 장하고 글이 다시 보인다. 녀석을 많이 오해하고 멀리했던 지난 날이 미안하다. 같이 목욕하고 나온 친구처럼 한층 끈끈해진 기분이다. 발행하고 누가 읽어는 보았을까, 좋아요는 몇 개가 되었을까, 기분 좋은 설레임에 두근거린다.


'여러분 쓰기 시작한 오늘은 어제와 달라요.', '읽으세요, 쓰세요, 자기 개발 하세요, 달라지세요, 할 수 있어요'


이은경쌤이 더 많이, 잘 쓰라고 더 멋진 사람이 되라고 끊임 없이 외쳐 주신다. 옆구리를 찌르던 그 친구처럼 말이다. 이런 응원이 얼마만인지 젖 먹던 힘까지 나올 지경이다. 쌤이 멈추지 말고 계속 쓰는 삶을 살라고 했는데, 글 한 편 한 편이 왜 이리 어려운지 언제쯤 브런치 매거진을 채울 지 모르겠다. 화해했다고 바로 친해지기는 어려운 법이니까 또 마음을 열고 다가가 봐야겠다. 쌤, 제가 잘 되면 쌤 덕분이라고 말해 달라고 하셨는데요, 노오오력해 볼게요. 꼭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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