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9년 11월 10일 날씨와 기분이 더없이 쾌청
알람에 눈이 한 번에 떠진 건 거의 처음이었다. 소풍날 아이들이 스스로 일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회사 다닐 때는 일어나기 싫어서 오 분만, 십 분만 고뇌가 깊었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빅스비, 오늘 할 일 알려줘하며 기지개를 펴 본다. 일정을 보니 지금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트레이닝을 주섬주섬 입고 현관을 나선다. 초겨울의 쌀쌀한 날씨지만 왜 이리 도파민이 분출되는지 추운지도 잘 모르겠다. 빠른 걸음으로 스튜디오에 도착하니 필라테스 선생님께서 먼저 와 계신다.
"룰루레몬은 퇴직 선물이에요. 4 사이즈도 남을 거에요"
무려 브라탑이라니 운동한 보람이 느껴진다. 5년 전만 해도 펑퍼짐한 티셔츠 쪼가리나 입고 몸매를 뽐내는 언니들 사이에서 쭈굴댔는데, 딱 붙는 레깅스와 브라탑 사이의 선명한 복근이 자랑스럽다. 운동복마저도 프로페셔널하고, 바렐에서 하는 스완, 트리, 사이드 밴드까지 흐트러짐 없는 동작으로 완벽하게 마무리 짓는다. 나만의 레지던스에서 프라이빗 필라테스 레슨이라니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미라클 모닝이다.
런드리 서비스로 오늘 입을 옷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퇴사한 다음 날 다시 출근이라니 정말 아이러니하다. 오늘 의상이 말해 주듯 완전히 다른 나, 새로운 일로 가는 거라 싫지만은 않다. 퇴사하기 전에는 청바지에 티셔츠 쪼가리에 운동화나 끌고 다녔는데, 오늘은 블랙 재킷에 화이트 셔츠, 미디 스커트, 7cm 하이힐로 한껏 멋을 내 본다. 사옥 앞에는 '하라온 작가의 2030년 마케팅 트렌드 강연회'라고 엑스 배너가 늘어서 있다. 정작 퇴사하고 환영받는 존재가 되다니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모르겠다. 회사 다닐 때는 이름 석자가 걸릴 일이 하나 없었는데, 퇴사한다니 강연회 좀 해 다오, 멘토 좀 해 다오, 정책 아이디어를 내다오 요청이 넘쳐난다. 있을 때 잘하란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닐텐데 말이다. 화려하게 유종의 미를 걷어 보겠다는 마음으로 발간한 책에서 발췌한 강의안을 고치고 또 고치며 회장님 회의실에서 강연을 기다린다.
강연회는 무려 500명이 넘게 몰렸고, 어떻게 작가가 됐는지, 어떻게 마케팅 분야의 거장이 됐는지 질문이 쇄도했다. 런칭할 때마다 수십개의 의견을 내도 반려시키기 일쑤더니,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하자 뭐라도 고견을 반영해 보겠다고 태세 전환이 참 우습다. 질의 응답이 조금만 더 늘어졌어도 큰 일 날뻔했다. 민뽕실이, 유뽕이실이와 페이스타임을 할 시간이다. 민뽕은 뉴저지에서, 유뽕과 남편은 런던에서, 나는 서울에 있지만 비대면으로 가족을 상봉한 지 일년이 다 되어 간다. 민뽕은 레고에서 일해 보고 싶다더니 고등학교를 조기 졸업하고 뉴저지에서 인턴 생활을 한 지 3개월이 다 되어 간다. 유통성 없는 어린 아이가 사회 생활은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궁금하고 걱정스럽지만 엄마는 거들뿐, 아들의 몫으로 두었다. 유뽕은 공부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패션과 아트에만 흥미가 있어, 영국 아트앤디자인의 주니어 프로그램을 수료 중이다. 딸 바보인 아빠가 함께 동행하게 되어, 의도하지 않게 기러기 엄마로 살아가는 중이다.
휘몰아치는 오전 일정을 마치니 배가 고픈 게 느껴진다. 퇴사 파티를 해 준다고 컬러풀 클로쓰 언니들이 더 파크뷰에서 기다리고 있다. 언니들과 회사에서 울고, 웃고, 서로 어깨 두드려주면서 다닌 세월이 주마등같다. 언니들과 어느 저녁에 연말 기분 좀 내자고 부페 식사권을 당근으로 알뜰히도 사서 본전 뽑을 때까지 푸지게 먹고 온 기억이 나서 피식 웃음이 났다. 더 이상 오픈런도, 당근 거래도 할 필요가 없는 이 언니들은 파크뷰를 대관해 놓았다. 언제 그만 두냐고 노래를 부르던 우리들은 오늘로 퇴직자 모임을 시작해 본다. 작은 답례로 부쉐론 쎄뻥 2030 에디션을 준비했는데 럭셔리한 우리 언니들 마음에 들어 해야 할텐데 조바심이 난다.
CEO로 거듭나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언니들과 모임은 여전히 유쾌하고 즐겁게 마무리되었다. 십년 넘게 함께 일했던 고달팠던 그 시절을 이제 추억거리로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다함께 잘 견뎌냈고, 앞으로 나아갔으며, 그 곳을 벗어나 다시 시작했다. 걸음을 옮기면서 그 답답했던 과거를 잘 지나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강남사옥으로 돌아와 38층을 눌러 본다. 그 곳에 집무실이 있기 때문이다. 임원 출신이 아닌 직원에게 그 동안의 공로와 잠재력을 인정하여 '고문'이라는 새로운 직함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퇴사자에 대한 이례적인 역대급 대우라고 한다. 빌딩 숲이 내려다 보이는 나만의 공간이라니 정말 근사하다. 여기서 일기만 써도 일과가 행복할 것 같다. 밀려 있는 원고들로 사실은 더 행복한 고민을 할 예정이다.